왜 용서해야 하는가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 원마루 옮김 / 포이에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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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인류의 숨구멍


 <왜 용서해야 하는가>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서평


깜깜한 밤 하늘을 올려다보라. 검푸른 하늘에서 우리는 구름을 보고 달을 본다. 때로는 칠흑 속에서 반짝이는 별 하나를 발견하고는 소중하고 반가운 무엇을 만난 듯, 가슴 설레기도 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밤 하늘의 별들이 떠올랐다. 미움과 분노, 살인과 폭력,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보복들, 그것들이 만들어가는 암담한 세상이 밤하늘이라면, 용서로 그 어둠의 무거운 사슬을 끊고 새로운 삶과 자유를 선물한 사람들이 반짝이는 별이 되었으리라.  그들이 있었기에 별을 바라보며 우리도 어두운 현실 속에서 새로운 소망을 꿈꾸며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게되는 것이 아닐까. 세상의 어둠을 덮기에 턱없이 부족하지만, 용서와 화해를 경험한 사람들이 밤하늘 별만큼 많았음을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왜 용서해야 하는가? 이미 용서라는 위대한 일을 해 낸 기적의 사람들의 말을 통해 그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뜻밖에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사고를 당하고, 자신과 가족들을 모두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어갈 때, 그들에게 떠올랐던 순간의 생각들, '등에 박힌 총알보다 가슴속에서 자라는 복수심이 더 끔찍하다' '증오의 악순환을 끊으려고' '심판이 죽은 아이를 살릴 수 없어', 등. 그것들은 증오심에 불타는 사람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용서는 기적이다. 용서하는 이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용서는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시 복수의 칼을 잡고 싶도록 부추키는 안팍의 소리를 이겨내야 한다. 거듭 용서를 결심해야 한다. 미인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용기라 할 수 있겠지만, 용서하는 사람이 가진 용기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용서할 대상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다. 복합적이다. 딸아이를 죽인 살인자를 용서해야 하고, 그 살인자를 막지 못한 경찰도, 그리고 아이를 보호하지 못한 자신도 용서해야 하고 이런 일을 허락한 신도 용서해야 했다. 그러니 용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1999년부터 전신마비 사고를 당한 뉴욕 경찰관 스티븐 맥도널드와 함께 '폭력의 고리 끊기'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해서 '용서를 통한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저자의 소망, 그것은 우리 인류가 용서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다. 어느 날, 전 세계에서 용서하는 일이 금지 되었다고 상상해보자. 이제 이 세상엔 보복과 심판, 앙갚음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된 것이다. 어떠한가? 인류가 인간으로서 숨 쉴 수 있는 숨구멍이 용서에 있었다. 그러므로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포기하지 않고 가르쳐야 하는 과목은 영어가 아니라 '용서'여야 한다. 용서가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용서할 때 감당해야 할 어려움, 난관은 어떤 것이 있는지, 용서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지, 등등, 이 책을 교과서 삼아 가르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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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인생최고의 가치 예배3부작 1
김기현 지음 / 죠이선교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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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회복하라 / 서평

- <예배, 인생 최고의 가치> 김기현 지음


 거짓예배가 판을 친다. 예배인지 쇼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 먹을 것이 많아도 영양가가 없다. A. W. 토저는 오늘날 교회가 예배라는 가장 가치있는 보석을 잃어버렸다고 한탄한다. 기본으로 돌아가라. 무엇이 기본인가?  우리에게는 참예배를 확인 할 수 있는 시금석이 필요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에게 이 시금석을 제시한다. 바로 '예배 현장에서 가장 중시되는 가치가 하나님인가?'라는 자(ruler)이다. 인생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인생이 살아서 할 수 있는 최고로 가치 있는 일은 '시와 찬미와 즐거운 노래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엡5:18-19). 저자는 인생이 가장 경배해야 할 가치로 하나님을, 그래서 예배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하는 부분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임을 주제 선율 삼아 이 책을 풀어가고 있다. 

  '최고의 가치'는 어느 것과 견주어도 뒤로 밀릴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을 말한다. 예배의 절차나 형식, 시간, 설교, 찬양, 보조기기, 비기독교인이나 초신자에 대한 배려, 봉사, 교회력의 흐름과 일치하는 것들이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요소들이지만,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기뻐하며, 두려워하며, 그 분을 갈망하는 것보다 앞세울 수 없는 것이다. '1부 예배의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성도들과 함께 그분을 전심으로 기뻐하며 안식하며 교회의 몸을 이루어가는 것은 참된 예배를 통해서다. 동시에  참된 예배는 그 분의 성품과 존재에 반하는 것을 부정하고 포기하게 한다.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려는 사람은 치열한 영적 싸움을 피해갈 수 없다. 

  예배의 참된 의미를 확인하고, 하나님이 뒷전으로 미루는 마음의 태도, 공동체적, 물리적 요소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짚어볼 수 있는 책이기에 크리스챤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하는 사람은 꼭 한 번쯤 읽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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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야곱 DNA - 축복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이중적 욕망
김기현 지음 / 죠이선교회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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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이 책을 손에서 내려 놓았다. 야곱과 그 험악한 세월을 함께 살아온 것 같이 고단하다. 다 읽고 보니 이 책은 창세기 주해서에서 야곱 부분을 떼어놓은 것 같은 내용이다. 창세기 25장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하는 부분부터 35장 야곱이 생을 마감하는 곳까지 성경의 전개와 함께 그 모든 구절 안에서 살펴볼 수 있는 모든 내용을 백과사전처럼 총 망라한 듯한 글이다. 설교를 준비할 때 무궁무진하게 참고 할 수 있겠다. 어느 한 시각도 놓치지 않으려는 저자의 치밀함이 느껴질 정도로 다각적인 분석과 해석이 마른 자리 풀도 나지 않는다는 최씨 고집처럼 조금은 숨막히게 했다. 특히 전반부는 야곱이란 사람을 놓고 예리한 수술용 나이프와 집게로 하나 하나 헤집는 것 같아 글이 흐른다기보다는 형체도 없이 쪼개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제목의 강렬한 의미가 기대감을 잠식하였고, 계속 읽다보니 제목이 전반부 어느 한 부분을 강하게 잡고 있어서 야곱의 생과 함께 점점 무르 익어가는 후반부의 내용을 아우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또한 저자가 학문적 서적과 영어권 서적을 많이 접해서인지 결론을 대 단락마다 미리 밝혀서 학문 서적이나 노트 필기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이 독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서 기대감, 흥미를 빼앗아가고 수동적 독서를 하게 했다. 책에서 시종일관 언급되는 이중성이라는 말을 모두 빼어내고 독자들이 읽어가면서 이런 이중적인 것들이 있구나 캐 낼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 두었더라면 독자들이 더 달려들어 이 책을 읽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에 여러 인물들이 있는데 야곱은 좀 더 특이하다. 성경의 인물들은 뭔가 하나님한테 택함 받을만한 뭔가가 있는데 야곱은 도통 그런 인물이 아니다. 실은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 일생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게 하셨던 것 같다. ‘내 안의 야곱  DNA’라는 제목 안에도 예의 이중성이 들어있다. 첫째, 야곱에 대한 경멸이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둘째, 그런데 그 야곱이 바로 내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외삼촌 라반 밑에서 라반을 겪으면서 야곱이 보게 된 자신의 모습이다. 그 깨달음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버러지 같은 야곱의 인생을 호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기 때문이다. 내가 야곱같은 인생임을 깨달으면서 나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후련함이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우리는 다시 껄끄러운 에서를 만나야 하고 세겜에서의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을 통해 또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은 ‘야곱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듯, 내 하나님이 야곱같은 또 다른 놈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즉 야곱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나를 발견하게 되고, 또 다른 야곱, 또 다른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야곱이란 인물의 힘, 하나님이 야곱을 성경에 기록한 의도이리라. 


이런 일들은 장자 에서대신 장자권의 축복을 받은 자신과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대해 손을 엇갈려 축복한 야곱의 깨달음과 함께 한다. 성경에서 순서가 뒤바뀌는 일의 의미를 저자가 잘 설명해주고 있다. 아버지 이삭이 장자 에서를 축복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나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게 하셨다. 내가 장손 에브라임을 축복하려 할지라도 하나님이 므낫세를 장자로 축복하실지 모르고 또 므낫세를 축복하려해도 에브라임이 축복받을지도 모른다. 축복은 하나님의 뜻과 선택에 달려있고 그것은 한 번 정해져서 변함없이 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은혜를 줄지라도 그 은혜가 먼저 된 자가 나중될 수도 있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될 수도 있으니 어느 누구도 나의 은혜를 받았다고 방심하거나 방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의중이 담겨있는 것이다. 


나는 야곱에게서 이중적 욕망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철저히 육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인생이 서서히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완전히 육적인 야곱의 인생을 휩싸고 돌며 함께 하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리라. 다만 한 가지 야곱은 축복이 필요한 인생임을 알았고, 그 축복을 하나님께 구할 생각을 했던 것이 가장 큰 축복이며 은혜였으리라. 꼭 야곱같다 생각되는 목사님을 보았다. 목사님인데 철저히 야곱같은. 그런데 그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보며 의아하고 호기심이 생겼었다. 철저히 육적인 분이어서 그를 통해 기대를 갖게 되는 사람들의 범주가 넓었다. 그리고 철저히 육적이어서 그 인생을 인도하며 빚어가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나도 어설픈 가식을 하나 둘 벗어버리기 시작했다. 내 안에 야곱 DNA가 있음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 위에 빛나며 세상으로 보냄받은 나의 사명-또 다른 야곱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도 감당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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