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Philos 시리즈 27
사이토 고헤이 지음, 정성진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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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로 보내진 남자가 자신의 편지가 검열당할 것을 알고 친구와 암호를 정해두었다.  파란 잉크로 쓰여졌다면 진실, 빨간 잉크로 쓰여졌다면 가짜. 얼마 후 도착한 편지는 파란 잉크로 쓰여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이곳에서의 생활은 매우 훌륭하다…여기서 살 수 없는 것은 빨간 잉크뿐이다.”


저자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풍요’는 바로 이 파란 잉크로 쓰인 편지의 세계이고 『자본론』은 이 사회의 불합리를 그려낼 수 있는 빨간 잉크라고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왜 출근하기 싫은지?, 직장에서의 내 하루가 왜 아깝다고 생각하는지?, 더 나은 삶을 위한 고민에 왜 직장을 배제하는지? 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잡은 느낌이었다. 


노동은 우선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즉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고 제어하는 한 과정이다.(192/237) P22


노동은 착취의 대상만은 아니다. 노동은 인간의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활동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 노동을 왜곡시킨다.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들려고 하는 자본주의는 필요한 것보다 ‘팔릴 것 같은 것’들은 생산한다. ‘사용가치’가 아닌 상품화가 가능한 ‘가치’를 위해 물건을 만드는 자본주의에서 인간은 물건에 휘둘리고 지배당한다. 즉, 물상화된다. 인간의 노동은 ‘구상’과 ‘실행’이 분리된 분업화를 통해 잘게 쪼개지고 결국 인간은 노동에서 소외되고 만다. 

가성비 사고가 내면화되고 기술의 발전으로 늘어난 개인의 자유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사용가치가 없는 물건들을 소비하고 자신의 노동을 파는 모습으로 소비된다. 자신의 노동에 대한 처분권을 가지지 못한 자본주의의 노동자. 그게 나의 모습이다.


저자는 『자본론』의 ‘절대적잉여가치의 생산’으로 현대사회의 과로사를 풀어내고, ‘상대적잉여가치의 생산’으로 기업가의 혁신이 어떻게 실업과 불싯 잡을 만들어내는지를 설명해낸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5장 「굿바이 레닌!」에서 독일의 복지시스템과 소련의 국가자본주의를 비교하면서 국유가 공유는 아님을, 법과 제도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상품과 화폐가 인간을 지배하는 듯한 힘을 휘두르는 현실임을 분명히 하고 국가권력의 탈취나 정치체제의 변혁이 아니라 경제 영역에서 물상화의 힘을 억제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마르크스의 ‘탈성장코뮤니즘’으로 포스트자본주의 대안을 제시한다. 음식, 의료, 교육, 돌봄 등을 탈상품화하여 사람들이 협동으로 관리하는 사회, 즉 사회적 부가 상품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모두가 공유하고 자치 관리하는 평등하고 지속 가능한 정상형 경제사회인 탈성장코뮤니즘. 이는 자치를 육성하는 상향형 조직인 어소시에이션을 확대하는 것을 통해 구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희망적인 제안이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인터넷이라는 시간과 장소를 넘나드는 시장의 변화를 극복해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대학교에 다닐 때, 『자본론』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읽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만족할 것 같아 읽기 시작했지만 사실상 무모한 도전으로 끝났다. 어려웠다. 그 뒤 한차례 도전이 더 시도되었지만 역시 마무리하지 못했다.책을 읽고 난 지금, 다시 읽을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자본론』으로 가는 훌륭하고 친절한(명쾌하고 쌈박한) 안내자를 만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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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기도였다.”


첫 문장이 강렬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기억 하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내내 붙어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또래보다 성숙하고 강단 있으면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던 멋있는 아이. 어느 날, 자기와 함께 갈 데가 있다며 데려간 곳은 작은 교회였다. 교회라고 하기 전엔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작고 초라한 공간. 예배가 시작되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분위기가 고조되고 여기 저기서 방언이 터지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친구마저 몸을 앞뒤로 흔들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내뱉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이 낯설고 두려웠던 기억.


기억 둘.

졸업을 앞두고 있던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를 같이 하자며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모처럼 얼굴도 볼 겸 찾아간 곳은 다단계 이불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하루종일 강연을 듣게 하고 구호를 외치고 곧 세상을 전복할 것 같은(그들은 다단계 판매의 피라미드를 통해 자본주의 유통망에 구멍을 내고 결국은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했다.) 희망찬 얼굴을 하고는 나를 허름한 자취방으로 데리고 갔다.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공간이었다. 정상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그들은 예전엔 꽤나 알아주던, 논리로 무장된 사람들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작가인 어맨다 몬텔은 유년기를 극단적인 컬트 공동체에서 보내다 탈출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컬트, 특히 컬트 언어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사람들이 컬트 집단에 들어가는 이유, 그곳에 남는 이유, 거칠고 이해할 수 없는 섬뜩한 행동을 하는 이유를 컬트적 언어를 통해 설명한다.


첫째. 사람들이 스스로 특별하고 인정받는다고 느끼게 만든다. 러브바밍. ‘딸깍’하고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을 하고 집단에 가입하게 된다. 


러브바밍: 상대를 깊이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처럼 연기함으로써 친밀감에 대한 환상을 빚어내는 기술. 상대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들려주고 그의 꿈을 이해하는 척하며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둘째, 우리vs 저들 이분법: 이 집단, 이 운동에 참여한 ‘우리’와 그렇지 못한 ‘저들’을 구분해 심리적 분열을 일으키는 기술로 우리와 저들을 구분함으로써 구성원들을 특별한 존재로 느끼게 한다. 


셋째, 사고 차단 클리셰: ‘어쩔 수 없지’ ‘남자애들이 원래 그렇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너무 깊이 생각하지마’처럼 비판적인 사고를 억제해서 논의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만드는 기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잡한 사고를 하지 않음으로써 안정감을 느끼고 안심하게 된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비롯해 인민사원, 사이언톨로지 등의 사이비 종교, 다단계 마케팅 회사, 피트니스 산업 등에서 일어나는 컬티시 언어를 광범위하게 설명한다. 


진정한 해답은 바로 말에 있다. 전달하는 것, 기존 단어를 교묘하게 재정의하는 것(혹은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는 것)부터 강력한 완곡어법, 비밀 암호, 개명, 유행어, 성가와 만트라, ‘방언이 터지는 것’, 강요된 침묵, 심지어 해시태그까지, 컬트는 언어라는 핵심 수단을 통해 다양한 수준으로 영향을 미친다. 착취를 일삼는 영성 구루는 이점을 잘 알고 있다. 피라미드 설계자, 정치인, 스타트업 CEO, 온라인 음모론자, 트레이너, 심지어 SNS 인플루언서들도 마찬가지다. 사실 우리는 매일같이 ‘컬트 언어’를 듣고 거기에 휩쓸린다.p24


‘인간은 외로움 앞에 맥을 못 춘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다. 생존을 위해 긴밀한 집단을 만들어 생활하던 고대 인류 이래로 사람들은 늘 비슷한 생각을 가진 집단에 이끌렸다. 진화 측면의 장점 이외에도, 공동체는 우리가 행복이라는 미스터리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p35


친구가 “유튜브는 내 마음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매일 매 시간 타킷 광고와 맞춤형 피드를 통해 우리를 토끼굴로 내려보내는 알고리즘. 그만큼 강력한 ‘컬트 지도자’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당히 신중한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논리적 사고나 감정적 직감을 포기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고립된 코뮨에서든 억압적인 스타트업 직장에서든 사기꾼 인스타그램 구루 앞에서든 정신을 바짝 차릴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항상 눈을 반짝이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p319


결국 ‘그곳’에 가게 되고, 있게 되고, 자발적인 추종자가 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간은 혼자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적인 존재. 그러니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원하는 것, 그곳에서 안정감과 행복을 느끼는 자연스러운 욕망을 이용하는 극단적인 컬트를 경계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모든 컬트를 부정할 수는 없다. 나의 논리와 기준을 갖고, 한 곳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여러 곳의 컬트에 속함으로써 현실에 발을 딛고 컬티시 생활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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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그 자체의 감각 - 의식의 본질에 관한 과학철학적 탐구 Philos 시리즈 26
크리스토프 코흐 지음, 박제윤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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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꿰뚫었다”

“의식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매우 쉽게 접근하는 오픈 사이언스!”


라는 책 표지의 극찬의 글은 내게 좌절로 다가왔다고 솔직히 밝히고 시작해야겠다. 


엄청난 부를 얻는 대신 주관적 느낌을 포기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겉으로는 멀쩡하겠지만 느낌을 갖지 않는다면 나는 죽은 것과 같을 것이다. 좀비와 다를 바 없다. 저자는 의식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한 상황을 제시한다. 그렇다. 의식은 중요하다. 내가 나라고 느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의식이란 무엇인가?

의식은 경험이다.

그리고 경험은 내가 세계에 대해 아는 유일한 방법이다. 

모든 경험은 의식적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만이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저자는 여러 뇌과학 연구 결과를 통해 아니라고 말한다. 호모사피엔스와 다른 포유류의 행동적, 생리적, 해부학적, 발달적, 유전적 유사성을 고려해 보면 인간만큼 풍부하지는 않지만, 모든 포유류가 소리와 광경, 삶의 고통과 즐거움을 경험한다는 것을 의심할 어떤 이유도 없다고 말한다. 또한 가추추론을 통해 무척추동물 또한 주변 환경을 감지하고, 이전 경험을 통해 학습하고, 온갖 감정을 표현하고, 다른 개체들과 소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꿀벌도 얼굴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안겨준다. 


개인적으로 대단한 감동을 받은  ‘나의 문어선생님’이라는 다큐가 떠올랐다. 놀이를 즐기고, 인간을 환대하고 위로하는 바닷 속 문어. 


그러니 인간이 윤리적 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나머지 자연 세계는 인류의 목적에 부합하는 한에서만 가치를 부여한다는 생각, 즉 서구 문화와 전통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신념을 이제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고 있는 인공지능은 어떠한가?

저자는 컴퓨터는 경험할 수 없고 디지털 코드는 느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인간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존재들에 대한 지식이 증가할수록 법적 보호를 받을 생물의 범위를 확대하는 법률이 필요함을 피력한다. 새로운 인류학, 새로운 도덕규범이 필요한 시점이다.

치밀한 과학적 논증의 방법으로 실천을 이끌어내는 뛰어난 철학서임에 분명하다. 


의식은 관념적 차원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참된 본성을 파악하기 위한 탐구에 일생을 바치는 저자와 같은 학자가 있기에 이론이 정립되고 설명의 근거가 만들어지고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진보한다. 


책은 표지부터 감각을 끌어내는 독특한 질감을 느끼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아르케의 필로스시리즈는 내 지적 수준이 좀더 높여야겠다는 도전의식과 안타까움을 함께 자아낸다. 과학과 결합된 의식 탐구의 매력이 넘치는 이 책을 다시 읽을 때는 좀더 이론에 다가갈 수 있기를,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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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던 존재들 - 경찰관 원도가 현장에서 수집한 생애 사전
원도 지음 / 세미콜론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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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 원도가 현장에서 수집한 생애 사전.


사사롭다, 고개, 단속, 강, 부패, 숙취, 비상, 묻다, 신고, 자리, 극단, 짬밥, 출구, 만원, 부끄럽다, 맞추다


책은 16개 단어를 모티브로 한 16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같은 단어도 사전을 들여다보면 뜻이 제각기 다른 것처럼, 다양한 단어의 의미를 우리네 삶의 모습에 비유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경찰로서 겪은 말도 안되는 일들이 단지 경찰관의 사사로운 일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원도 작가의 글을 처음 만난 것은 한겨레신문에서였다. 종이 신문 한쪽에서 만난 그의 글은 따뜻하고 치열하게 살아 숨쉬고 있었다. 매번 신문을 받아보며 기다려지던 글이었다. 그 글들이 모여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다. 직업인으로서, 더군다나 경찰관으로서 꾸준한 저술작업을 하는 작가의 모습에 독자로서 반갑고 존경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본인이 ‘길게 쓴 사직서’라는 아픈 표현처럼 작가가 마주하는 현실 세계의 처절함이 글이라는 방편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안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직업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거나, 일을 통해 대단한 성취를 해내거나, 그도 아니면 편한 업무 수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경찰을 대입하면 셋 중 그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신고 접수 후, 출동한 경찰차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구석에 세우라는 항의를 받고, 번호를 누르고 들어갈 수 있는 아파트에서 경찰의 출입을 반기지 않는다. 소장의 실적 압박에 시달리던 중, 중앙선의 실선에서 유턴하여 손님을 태우던 택시를 단속하며 듣던 말.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잘 접은 고지서를 주머니에 넣으면서 읊조리는 기사의 한 마디에 스스로 경찰관이라는 직업에 절망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매일 마주하는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의 처절한 삶과 죽음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22년 자살로 처리된 변사자의 수는 1만 2,727명이다. 하루에 34.8명꼴로 자살한다는 말이다. 믿을 수 없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가지각색의 방법으로 죽다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음을 원하다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사회적으로 논의가 부족하다니. 특정 종류의 동물이 집단 폐사할 경우 전국적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하는데, 단일한 종류의 동물이 타의도 아닌 자의로 우후죽순 죽어나가는데 비상사태가 아니라니. 우리나라는전쟁 중인지도 모른다. 매일매일을 사는 게 전쟁이다. 이들을 ‘변사자’ 대신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지 못한 ‘전사자’로 부르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p174


같은 사회를 살면서도 통계자료나 기사로만 접하던 공간이, 작가에게는 현장 수습, 감식, 뒷처리를 하는 현장이다. 내 사전의 단어와 그의 단어가 같은 의미가 아닐 것이다. 글을 통해  다른 삶이 존재함을 아는 것, 그 삶의 주인공인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 것. 거기서부터 사회적 연결의 실마리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 중심에 있는 저자 원도의 존재가 참으로 소중하다. 그래서 그의 글이 사직서가 아니기를, 멀리서나마 응원하는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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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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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생물체는—항복하라.

문어가 말했다.


강사법 제정 이후 대량 해고 사태에 맞선 농성. 그 농성장에서 상주하며 투쟁하던 위원장님이 밤중에 발견한 문어를 삶아 먹었다. 한 마리는 싱싱하지만 질겼고, 한 마리는 상했다…고 한다. 삶아 먹은 거대한 문어가 시작이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조사를 받고, 조사가 이어지고, 불려다니고, 이과대 학장과 총장도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하는 난리를 겪는 통에 학교는 강사노조의 요구 사항을 모두 수용하는 전격 합의를 한다. 이제 노조는 ‘잘못 건드리면 학교 하나 날려 버릴 수 있는 집단’으로 소문이 났다. 

그 와중에 나타난 두 번째 문어가 한 말이다. 


—지구—생물체는—항복하라.


그 역시 술 좋아하는 위원장님의 손에 먹물까지 싹싹 씻겨 냄비에 삶겨지게 된다.


1년 뒤, 후일담. 


—지구—생물체는—항복하라.

우리는 항복하지 않는다. 나와 위원장님은 데모하다 만났고 나는 데모하면서 위원장님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함께 데모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교육 공공성 확보와 비정규직 철폐와 노동 해방과 지구의 평화를 위해 계속 싸울 것이다. 투쟁.



작가 인터뷰를 보니 위원장님이 정보라 작가의 남편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자전적 SF소설이 맞다. 질긴 문어와 맛이 간 문어를 먹는 장면에서 소설을 기획했다고 하니 일상이 작품의 원천인 그야말로 제대로 된 작가의 삶이다.


항복하라고 말하는 문어를 닮은 외계 생물은 위협적이지 않았고, 외계 생물 접촉 관련자를 조사한다며 설쳐대는 검은 양복 사나이 집단은 똑똑하지 않았다. 결국은 위협적이지 않고 똑똑하지 않은 두 집단을 대하면서 머리 굴리지 않고 본질을 놓치지 않은 위원장의 우직한 승리로 마무리 되는 글이었다.


현실을 제대로 풍자하는 똑똑하고 재미난 SF소설 한 편을 잘 만난 느낌이었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미니북의 「문어」 외에 「대게」,「상어」 등 다른 해양생물 소설은 어떤 스토리가 펼쳐질지 매우 궁금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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