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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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생물체는—항복하라.

문어가 말했다.


강사법 제정 이후 대량 해고 사태에 맞선 농성. 그 농성장에서 상주하며 투쟁하던 위원장님이 밤중에 발견한 문어를 삶아 먹었다. 한 마리는 싱싱하지만 질겼고, 한 마리는 상했다…고 한다. 삶아 먹은 거대한 문어가 시작이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조사를 받고, 조사가 이어지고, 불려다니고, 이과대 학장과 총장도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하는 난리를 겪는 통에 학교는 강사노조의 요구 사항을 모두 수용하는 전격 합의를 한다. 이제 노조는 ‘잘못 건드리면 학교 하나 날려 버릴 수 있는 집단’으로 소문이 났다. 

그 와중에 나타난 두 번째 문어가 한 말이다. 


—지구—생물체는—항복하라.


그 역시 술 좋아하는 위원장님의 손에 먹물까지 싹싹 씻겨 냄비에 삶겨지게 된다.


1년 뒤, 후일담. 


—지구—생물체는—항복하라.

우리는 항복하지 않는다. 나와 위원장님은 데모하다 만났고 나는 데모하면서 위원장님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함께 데모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교육 공공성 확보와 비정규직 철폐와 노동 해방과 지구의 평화를 위해 계속 싸울 것이다. 투쟁.



작가 인터뷰를 보니 위원장님이 정보라 작가의 남편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자전적 SF소설이 맞다. 질긴 문어와 맛이 간 문어를 먹는 장면에서 소설을 기획했다고 하니 일상이 작품의 원천인 그야말로 제대로 된 작가의 삶이다.


항복하라고 말하는 문어를 닮은 외계 생물은 위협적이지 않았고, 외계 생물 접촉 관련자를 조사한다며 설쳐대는 검은 양복 사나이 집단은 똑똑하지 않았다. 결국은 위협적이지 않고 똑똑하지 않은 두 집단을 대하면서 머리 굴리지 않고 본질을 놓치지 않은 위원장의 우직한 승리로 마무리 되는 글이었다.


현실을 제대로 풍자하는 똑똑하고 재미난 SF소설 한 편을 잘 만난 느낌이었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미니북의 「문어」 외에 「대게」,「상어」 등 다른 해양생물 소설은 어떤 스토리가 펼쳐질지 매우 궁금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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