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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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라고 하면 갖게 되는 기대가 있다.

한국에서는 특히나 더 인기가 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의 영향도 클 것이다. 이를테면 무라카미 하루키와 『상실의 시대』 같은 조합이다. 무언가를 읽는다는 행위가 그 자체로 적극적인 제스처의 형태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있어 보인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는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삼성의 갤럭시를 사용하거나 애플의 아이폰을 손에 쥐는 것이 그럴싸한 선택이 될 수 있는 것과도 비슷하다.

독서인들의 욕망을 한데 모은 듯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네임밸류는 (어떻게 이름도 하루키일까……) 그의 저서 제목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 『1Q84』 같은 제목들을 보라. 그 안에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이번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에 기대하지 않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3년 만에, 하루키에 더해 『가호』라는 제목으로 돌아온 그다.

가호.

그것이 이름이든 지명이든, 단 두 글자만으로도 문학적으로 압축된 의미가 클 것임을 시사하고도 남지 않는가. 글쎄, 모르겠다. 일본에서는 익숙한 이름이라 한국의 철수나 영희처럼 가벼운 제목이었을지도. 그러나 한국인에게 문학작품의 제목으로서 『가호』는 기대를 품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렇다. 나는 기대가 컸다.)

그렇기에 크게 실망한 이 책은 제목부터 문제라고 본다. 제목이 『이상한 나라의 가호』이거나 『개미핥기 부인과 가호』, 혹은 『모터사이클남과 가호』 정도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이 『가호』라는 제목의 의미는 하등 특별할 것이 없으며, 주인공의 이름이 가호라서 『가호』인 것뿐이다. (자, 그럴 수도 있지. 제목 정도야.) 그렇다면 스토리는 어떤가. 심지어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라며 띠지까지 둘러놓았다. (반드시 좋은 이야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심호흡)

정확히 184페이지. 가호가 믿을 구석은 개미핥기 부인밖에 없다고 말하는 부분부터 이 동화적 세계 속 관계에 항마력이 딸리기 시작한다. (하루키 소설을 읽으며 항마력이 딸려 보기는 처음이다. 이렇게 클리셰가 난무하는 작품 또한 처음이다. 이것을 더 읽어야 할 것인가 순간 고민했다.) 심지어 나는 번역가의 노고까지 걱정했다. 반복적인 문장이 많아서 지루한 작업이었을 것 같았다. (사실은 알 수 없지만 내 느낌은 그렇다.) 그래도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말하듯 써 내려가는 매끄러운 문장들은 역시나 술술 읽히기에 끝까지 가보기로 한다. (까도 다 읽고 까야지.) 그렇게 마지막 페이지까지 도달하고 나니 허탈감은 더욱 커진다.

하루키는 무얼 말하고 싶었을까?

그게 무엇이든 이토록 친절하고 상세하고 반복적으로 독자에게 낱낱이 일러줄 필요가 있었을까. 하루키는 원래도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지만, 그것이 차라리 전작들처럼 모호하게 그려졌다면 어땠을까. 소설 속에서 누차 이것은 명백한 현실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았더라도 독자들은 충분히 하루키의 초현실을 진실처럼 마주했을 텐데.

진실을 진실이라고 반복하여 말하니 거짓 같다.

이 친절한 동화적 세계는 친애하는 어린이들에게 읽혀도 자못 지루할 법하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 실린, 한 팬이 하루키에게 보낸 편지의 구절을 그대로 하루키에게 전하고 싶다.

“이번 작품은 실망입니다. 하지만 다음 작품도 읽을 것입니다. 그러니 분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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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의 자서전 - 시로 쓴 소설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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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아서 연거푸 세 번 읽은 『빨강의 자서전』.

앤 카슨의 다른 작품들은 사놓고도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 책만 세 번을 읽었다. 그만큼 내게는 강렬하게 매료되는 지점들이 많은 소설이었다.

앤 카슨의 고전과 모더니즘을 절묘하게 융합한 새로운 문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그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이미 너무 많은 정의와 해석이 즐비하니 나까지 그 이야기를 더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오롯이 한 명의 독자로서 『빨강의 자서전』에 쉼 없이 매료된다.

이 로맨스이자 영웅담을 이끌어가는 빨간 괴물 게리온. 내게 그는 전혀 괴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숭고할 만큼 지나치게 특별해서 어디에도 속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기에 자신의 특별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드러내기 어려워 날개를 숨기고 다니는지도 모른다.

게리온에게 운명처럼 시작된 사랑은 좀처럼 그의 애절한 진심에 가닿지 못한다. 헤라클레스는 연인의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닐까. 종잡을 수 없는 가벼움과 자유분방함으로 그는 신화에서는 물리적으로 게리온을 죽이더니, 이 소설에서는 영혼마저 죽이려는 듯하다.

이 소설은 지극히 로맨스적이면서도 에로티시즘적이다. 어둡고 고요한 새벽녘에 읽다 보면 음험한(음란마귀?)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욕망하는 게리온의 순수함과 열망이 화산의 분출처럼 뜨겁게 다가온다.

게리온이 자신의 기분이나 상태, 혹은 어떤 현상들을 계속해서 사진으로 남기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게리온은 카메라를 들고 자신과 타인 사이에 한 발짝 거리를 둔 채, 현상에서 비롯되는 감각에 자신을 내맡기려는 듯 보인다. 동시에 사진 자체가 그의 심리와 삶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에게 사진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시로 쓰인 소설이라는 말처럼 이 작품에는 응축되고 생략된 부분들이 많다. 그렇기에 문맥을 따라 어떤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기보다는 시어를 곱씹듯 여러 번 문장을 되새기며 읽어나갈 때 훨씬 더 아름답고 깊게 다가온다.

게리온의 사랑에 대한 욕망과 대상을 향한 호기심은 너무도 소년적이어서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에게 사랑은 자신을 온화하거나 친절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낯설고, 분노케 하며, 욕망하게 하고, 슬프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의 빨강 게리온은 눈물이 많다.

#앤카슨 #빨강의자서전 #2026노벨문학상 #책추천 #북스타그램

Tip. 이 책을 처음 읽는다면 시작과 끝은 과감히 생략하자. 중간의 ‘빨강의 자서전: 로맨스’ 부분부터 읽기를 추천한다. 책의 앞뒤에 실린 작품의 탄생 배경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본래의 소설을 읽은 뒤에 살펴봐도 충분하다. 오히려 그렇게 읽는 편이 작품에 훨씬 수월하게 다가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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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 농원 술래잡기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25
정기현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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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살아가는 일은 이야기의 다음 장을 넘기는 행위와 닮아 있다. 아직 쓰이지 않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 그 알 수 없는 가능성이 우리를 내일로 데려가는 것은 아닐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호기심, 무엇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에 대한 기대.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매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일을 반복하더라도 그 안에서 무언가 달라질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사소한 우연 하나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삶을 이끌기도 하고, 무심코 지나친 일이 훗날 돌이켜보면 어떤 이야기의 시작이 되어 있기도 하다. 삶은 그렇게 예측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다른 이야기가 되어간다.

이야기를 읽는 일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서 책장을 넘긴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짐작하고, 때로는 그 짐작이 빗나가는 즐거움을 누린다.

『살구 농원 술래잡기』의 기정은 신문에서 이야깃거리를 찾아 스크랩한다. 주변인의 행동과 말에 관심을 기울이고 관찰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전해주기도 한다. 수많은 사건과 사연 가운데 유독 마음을 붙잡는 이야기가 있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간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소비하고, 잊기도 하고, 도무지 잊히지 않아 마음 한구석에 오래 간직하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이야기가 자신의 삶과 맞닿는 순간을 경험한다.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누군가의 이야기가 어느새 내 이야기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의 삶이 오롯이 그 사람만의 이야기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타인의 이야기를 통과한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생각이 바뀌고, 우연히 만난 사람으로 인해 예정에 없던 길을 걷기도 한다. 어떤 이야기는 이내 사라지지만 어떤 이야기는 깊숙이 스며들어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게 만든다.

나의 이야기는 어디까지 나의 것이고 어디서부터 타인의 것일까. 우리는 저마다 독립된 이야기를 살아가는 동시에 서로의 이야기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인물들이 된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힘이 있다. 자신이 결코 하지 못할 일도, 평생 가보지 못할 곳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누군가의 마음도 이야기 안에서는 경험할 수 있다. 타인의 삶을 잠시 살아보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러니 이야기가 재미없을 도리가 없다. 이야기는 현실을 벗어나게 하면서도 오히려 현실을 더 넓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일에 마음이 움직이고,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의 사연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에는 정해진 크기나 무게가 없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신문 한 귀퉁이의 짧은 기사에 불과할 수 있다. 반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던 일이 한 사람의 생을 완전히 바꾸어놓기도 한다. 무엇이 중요한 이야기인지는 사건의 크기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을 살아낸 사람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야기는 삶과 같아 살아낸 만큼 자라난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 자리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났다고 믿었던 이야기가 뜻밖의 순간에 다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미리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에 궁금하고, 궁금하기에 다음을 기대한다.

오늘까지의 삶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내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한순간의 우연으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렇게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살아가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다음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의 이야기 속으로 유영하면서.

* 이 글은 책의 마지막 물음에 대한 나의 답이다. 저마다의 생각이 이어질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자체로 힘을 갖는 삶의 이야기가 이 책에 있다. 그 이야기들이 어디로 흘러가고 또 어떤 이야기를 불러올지, 기꺼이 다음 장을 기대하게 만드는 책이다.

*도서증정 @munhakdongne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살구농원술래잡기 #정기현 #시리즈n #소설추천 #도서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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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눈, 손, 마음 - 그림이 만들어지는 신비로운 여정에 관하여
마틴 게이퍼드 지음, 조주연 옮김 / 에포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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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화가의 작업 방식이나 작품에 담긴 의미를 다룬 책은 많았다. 그러나 마틴 게이퍼드의 『화가의 눈, 손, 마음』처럼 한 점의 회화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이토록 구체적이고 친밀하게 들여다본 책은 드물었던 것 같다.

이 책은 화가가 어떤 시대를 살았고, 무엇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어떤 경험과 환경 속에서 특정한 표현 방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다룬다. 화가의 의도와 판단뿐 아니라 우연히 일어난 일, 재료의 성질, 작업 도중의 변화, 때로는 화가 자신조차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한 감각까지 살핀다. 그림은 어느 한순간의 영감이나 하나의 분명한 의도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수많은 조건과 선택이 얽히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모습을 갖추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회화를 대하는 저자의 태도가 무척 인상적이다. 마틴 게이퍼드가 얼마나 예술을 사랑하고, 화가들의 작업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는지가 책 전반에 드러난다. 그는 비평가로서 자신의 해석을 작품에 앞세우기보다 화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남긴 말과 작업의 흔적을 세심하게 연결한다. 오랜 시간 축적된 대화와 관찰은 정보의 나열을 넘어 한 예술가의 사고와 감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화가들의 작업이 뜻밖의 지점에서 만나는 순간들도 흥미롭다. 한 화가가 발견한 표현의 가능성이 오랜 세월을 건너 다른 화가의 작업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비슷한 문제 앞에서 고민하기도 한다. 회화의 역사는 수많은 화가가 서로 다른 시대와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응답해온 역사처럼 느껴진다.

화가로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았다. 작업에는 작가마다 고유한 방식과 감각이 존재하지만, 그 안에는 서로 공유하는 경험 또한 있다. 처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림이 전개되기도 하고, 손이 먼저 움직인 뒤에야 눈과 마음이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도 있다. 무엇을 그릴 것인지 결정하는 일만큼이나 이미 그려진 것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판단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그대로 옮기는 행위가 아니라, 작업하는 동안 끊임없이 보고, 반응하고, 선택하며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가능성을 발견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화가가 어떤 영감을 받아 무엇을 그렸다는 설명이나 특정한 기법으로 어떠한 효과를 얻었다는 해설만으로는 회화의 실체에 충분히 다가갈 수 없다. 한 점의 그림에는 화가가 살아온 시간과 축적된 경험, 당대의 문화와 사상, 개인의 기질과 취향, 재료를 다루는 신체적 감각까지 무수한 요소들이 개입한다. 게이퍼드는 이 복잡한 관계를 섣불리 하나의 의미로 환원하지 않고, 가능한 한 많은 맥락을 드러냄으로써 그림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이끈다.

책에 수록된 작품들을 함께 살펴보는 경험도 각별하다. 이 책에는 작품 전체가 아닌 세부를 보여주는 도판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이전에는 그저 지나쳤을 법한 색채와 붓질, 화면의 작은 변화들이 새롭게 보인다.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이 그 그림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보이지 않는 시간과 선택을 상상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실제 전시장에서 그림을 마주할 때도 이전보다 더 많은 질문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좋은 미술 비평은 작품의 의미를 대신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작품 앞에서 더 오래 머물고 더 깊이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일일 것이다. 그림에서 새로운 의문을 발견하게 하고, 익숙한 표현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가능성을 보게 하는 것.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회화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림을 바라보는 눈 자체를 확장시킨다.

한 점의 그림은 완성되는 순간 화가의 손을 떠나지만, 그 안에는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수많은 시간과 판단, 우연과 망설임이 남아 있다. 우리는 그 모든 과정을 온전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림이 무엇을 말하는지 묻는 것에서 나아가, 어떻게 이 그림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묻게 된다. 그것이 이 책이 독자에게 열어주는 가장 깊고도 흥미로운 감상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화가의눈손마음 #마틴게이퍼드 #예술 #howpaintinghappens
#도서추천

*도서증정 @epoch.books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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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 꽃도 필요 없다
아사쿠라 가스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도서출판)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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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의 삶은 과연 평범한 이야기일까.

아사쿠라 가스미의 『관도 꽃도 필요 없다』는 다섯 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등장인물들은 일자리를 구하고, 생활비를 걱정하고, 오래된 관계를 돌아보고, 지나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작가는 이들의 일상에서 놀라운 사건을 찾아내기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감정의 낯선 표정을 발견한다.

작가는 특유의 표현 방식으로 지루할 틈 없이 새로운 문장들을 선보인다. 문체는 평이하고 문장의 리듬 역시 단순하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표현들은 놀라울 정도로 독특하다. 익숙한 감정이 예상하지 못한 언어와 만나 뜻밖의 해학으로 이어진다. 독특한 것은 감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포착하는 방식이다. 누구나 한 번쯤 느꼈을 법한 마음인데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작가는 보편적인 감정을 낯선 언어로 번역함으로써 오히려 더 선명한 공감을 이끌어 낸다.

글의 구성 역시 흥미롭다. 도입부를 읽으며 앞으로 펼쳐질 내용을 짐작해 보지만 이야기는 어느새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인물의 관계와 감정이 끊임없이 새로운 방향으로 뻗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전개를 바꿔 놓는다. 한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변화무쌍한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실제 우리의 생각도 그렇지 않은가. 하나의 기억이 다른 기억을 불러오고, 사소한 말 한마디가 오래된 감정을 건드리며, 별것 아닌 일에서 뜻밖의 깨달음에 이르기도 한다.

이러한 구성은 인물들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인간은 하나의 성격이나 감정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체념하는 듯하다가도 희망을 품고, 슬픔 속에서도 우스운 생각을 하며, 분노하면서도 연민을 품는다. 인간의 마음이란 본래 그렇게 모순적이고 유동적인 것이다. 작가는 그저 사람이란 본래 그런 존재라는 듯, 사소하고 기묘한 마음의 움직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따라간다.

다섯 편의 이야기에는 팬데믹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노동, 빈곤, 노년, 가족, 관계의 변화 같은 사회적 현실이 담겨 있다. 작가는 개인의 구체적인 일상을 통해 사회의 모습을 드러낸다. 한 사람의 사소한 고민이 그가 속한 시대와 환경을 비추고,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 어느 순간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로 확장된다.

이 소설집에 흐르는 해학은 작가의 연륜이 묻어나는 깊은 통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느껴진다. 그 해학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생생하다. 삶이 고단하다고 해서 모든 순간이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스운 생각을 하고, 심각한 순간에도 엉뚱한 말을 떠올린다. 아사쿠라 가스미는 그런 인간의 표정을 자신만의 새로운 표현들로 채운다. 고통을 가볍게 만드는 농담, 고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생생함!

좋은 소설은 반드시 특별한 사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때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아사쿠라 가스미는 평범한 삶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무수한 표정들을 발견하고 새로운 옷을 입힌다.

어쩌면 평범한 삶이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아직 충분히 들여다보지 않은 삶이 있을 뿐이다.

#관도꽃도필요없다 #나오키상수상작 #소설추천 #북스타그램 #서평

*도서증정 @yolimwon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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