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의 자서전 - 시로 쓴 소설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너무 좋아서 연거푸 세 번 읽은 『빨강의 자서전』.

앤 카슨의 다른 작품들은 사놓고도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 책만 세 번을 읽었다. 그만큼 내게는 강렬하게 매료되는 지점들이 많은 소설이었다.

앤 카슨의 고전과 모더니즘을 절묘하게 융합한 새로운 문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그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이미 너무 많은 정의와 해석이 즐비하니 나까지 그 이야기를 더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오롯이 한 명의 독자로서 『빨강의 자서전』에 쉼 없이 매료된다.

이 로맨스이자 영웅담을 이끌어가는 빨간 괴물 게리온. 내게 그는 전혀 괴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숭고할 만큼 지나치게 특별해서 어디에도 속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기에 자신의 특별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드러내기 어려워 날개를 숨기고 다니는지도 모른다.

게리온에게 운명처럼 시작된 사랑은 좀처럼 그의 애절한 진심에 가닿지 못한다. 헤라클레스는 연인의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닐까. 종잡을 수 없는 가벼움과 자유분방함으로 그는 신화에서는 물리적으로 게리온을 죽이더니, 이 소설에서는 영혼마저 죽이려는 듯하다.

이 소설은 지극히 로맨스적이면서도 에로티시즘적이다. 어둡고 고요한 새벽녘에 읽다 보면 음험한(음란마귀?)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욕망하는 게리온의 순수함과 열망이 화산의 분출처럼 뜨겁게 다가온다.

게리온이 자신의 기분이나 상태, 혹은 어떤 현상들을 계속해서 사진으로 남기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게리온은 카메라를 들고 자신과 타인 사이에 한 발짝 거리를 둔 채, 현상에서 비롯되는 감각에 자신을 내맡기려는 듯 보인다. 동시에 사진 자체가 그의 심리와 삶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에게 사진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시로 쓰인 소설이라는 말처럼 이 작품에는 응축되고 생략된 부분들이 많다. 그렇기에 문맥을 따라 어떤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기보다는 시어를 곱씹듯 여러 번 문장을 되새기며 읽어나갈 때 훨씬 더 아름답고 깊게 다가온다.

게리온의 사랑에 대한 욕망과 대상을 향한 호기심은 너무도 소년적이어서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에게 사랑은 자신을 온화하거나 친절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낯설고, 분노케 하며, 욕망하게 하고, 슬프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의 빨강 게리온은 눈물이 많다.

#앤카슨 #빨강의자서전 #2026노벨문학상 #책추천 #북스타그램

Tip. 이 책을 처음 읽는다면 시작과 끝은 과감히 생략하자. 중간의 ‘빨강의 자서전: 로맨스’ 부분부터 읽기를 추천한다. 책의 앞뒤에 실린 작품의 탄생 배경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본래의 소설을 읽은 뒤에 살펴봐도 충분하다. 오히려 그렇게 읽는 편이 작품에 훨씬 수월하게 다가갈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