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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 농원 술래잡기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25
정기현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10월
평점 :
삶을 살아가는 일은 이야기의 다음 장을 넘기는 행위와 닮아 있다. 아직 쓰이지 않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 그 알 수 없는 가능성이 우리를 내일로 데려가는 것은 아닐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호기심, 무엇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에 대한 기대.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매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일을 반복하더라도 그 안에서 무언가 달라질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사소한 우연 하나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삶을 이끌기도 하고, 무심코 지나친 일이 훗날 돌이켜보면 어떤 이야기의 시작이 되어 있기도 하다. 삶은 그렇게 예측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다른 이야기가 되어간다.
이야기를 읽는 일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서 책장을 넘긴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짐작하고, 때로는 그 짐작이 빗나가는 즐거움을 누린다.
『살구 농원 술래잡기』의 기정은 신문에서 이야깃거리를 찾아 스크랩한다. 주변인의 행동과 말에 관심을 기울이고 관찰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전해주기도 한다. 수많은 사건과 사연 가운데 유독 마음을 붙잡는 이야기가 있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간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소비하고, 잊기도 하고, 도무지 잊히지 않아 마음 한구석에 오래 간직하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이야기가 자신의 삶과 맞닿는 순간을 경험한다.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누군가의 이야기가 어느새 내 이야기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의 삶이 오롯이 그 사람만의 이야기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타인의 이야기를 통과한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생각이 바뀌고, 우연히 만난 사람으로 인해 예정에 없던 길을 걷기도 한다. 어떤 이야기는 이내 사라지지만 어떤 이야기는 깊숙이 스며들어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게 만든다.
나의 이야기는 어디까지 나의 것이고 어디서부터 타인의 것일까. 우리는 저마다 독립된 이야기를 살아가는 동시에 서로의 이야기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인물들이 된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힘이 있다. 자신이 결코 하지 못할 일도, 평생 가보지 못할 곳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누군가의 마음도 이야기 안에서는 경험할 수 있다. 타인의 삶을 잠시 살아보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러니 이야기가 재미없을 도리가 없다. 이야기는 현실을 벗어나게 하면서도 오히려 현실을 더 넓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일에 마음이 움직이고,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의 사연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에는 정해진 크기나 무게가 없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신문 한 귀퉁이의 짧은 기사에 불과할 수 있다. 반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던 일이 한 사람의 생을 완전히 바꾸어놓기도 한다. 무엇이 중요한 이야기인지는 사건의 크기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을 살아낸 사람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야기는 삶과 같아 살아낸 만큼 자라난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 자리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났다고 믿었던 이야기가 뜻밖의 순간에 다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미리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에 궁금하고, 궁금하기에 다음을 기대한다.
오늘까지의 삶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내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한순간의 우연으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렇게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살아가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다음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의 이야기 속으로 유영하면서.
* 이 글은 책의 마지막 물음에 대한 나의 답이다. 저마다의 생각이 이어질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자체로 힘을 갖는 삶의 이야기가 이 책에 있다. 그 이야기들이 어디로 흘러가고 또 어떤 이야기를 불러올지, 기꺼이 다음 장을 기대하게 만드는 책이다.
*도서증정 @munhakdongne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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