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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희정 지음, 반올림 기획 / 아카이브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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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묘한 속임수와 피할 수 없는 덫...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없게 하는 삼성에 치가 떨린다. 노동자여 단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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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시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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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연애박사’ 소크라테스가 히포탈레스에게 연애의 진수를 전수해주고자 두 소년을 만난다.

뤼시스와 메넥세노스를 시종일관 쥐락펴락하며 정신을 쏙 빼놓는 가 했더니, 내 정신도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가야 하니 “필리아에 대해서는 각자 알아서 잘 생각해 보라!”고 한다.

<뤼시스>가 서양 지성사에서 ‘필리아(우정, 사랑)’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라고 하니

꼭 읽어볼 필요가 있겠지만,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필리아’인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터이니

<뤼시스>를 통해 자신의 ‘필리아’ 개념을 새로이 정립할 필요가 있겠다.

 

친구......

내게 친구는 나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들이다.

늘 내 편에 서서 나를 믿어주고 기다려주며 웃어준다.

내 편에 서있지만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해서 ‘자아비판’하여

그 친구가 편한 마음으로 내 편에 서있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친구는 내가 바르고 선한 길에 함께 있기를 좋아한다.

반대로 내 친구들도 나와 같은 것을 나에게 바라고 있다.

내가 사랑하기에 그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행동함으로서 그의 사랑을 받고,

그가 나를 사랑하기에 그를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행동함으로서 나의 사랑을 받으니,

우린 서로 능동적으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랬는데.......

몇 년 전부터 한 친구와 경제적인 것이 격차가 생겼는데,

그가 골프를 치고 아들을 김포외고에 보내려고 갖은 노력을 하는 중이다.

게다가 자기네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기본이 안 되어 있어 데리고 일하기 정말 힘들다며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말을 종종 한다.

음.......그 친구에 대한 실망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경제적인 격차가 친구로 지내기에 힘든 원인일까? 아니다. 분명 아니다.

친구가 부자로 살면 정말 다행스럽고, 안심인데......솔직히 많이 얻어 먹다보면 맘이 편치 않다.

그 친구도 나름대로 조심을 하는데 늘 먼저 지갑을 연다.

벨이 좀 꼴린다.....꼴리나???

아니, 고마운데 내맘이 편하지는 않다......

또 한 친구는 나보다 조금 더 어렵게 생활한다.

그래도 내가 받은 편치 않은 맘을 생각해서 밥은 내가 사고 그 친구에게는 커피 사게 한다.

그래서 우린 편하고 행복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친구.....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자랑스러워하고 자랑스럽게 존재하며,

편하게 생각하고 편한 사람이 되어주고 오래오래 믿고 기다려 주는 사이가 아닐까 싶다.

 

연애.....

내 연애는 현재 서로에 대한 좌절(?)로 존재하고 있다.

실패하고 싶지 않아 피차 노력하려고 하는데, 노력해야 수정될 정도로 악화되어 있다.

지혜로워지자고 다짐하지만 약아져서 자꾸 실패하는 것 같다.

‘바보이반’이 부럽다. 바보가 되어야 할까????

이제는 남녀로서 서로를 구속하는 연애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연애 혹은 우정으로 남자고 몇 번이고 제안을 했는데 그거이 쉽지가 않다.

현재 애로사하이 많은 상태이므로 연애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여간에 플라톤 덕분에 우정(^ ^)과 연애(_ _::)를 다시 한 번 재정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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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인터뷰 특강 시리즈 4
진중권.정재승.정태인.하종강.아노아르 후세인.정희진.박노자.고미숙.서해성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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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의 햇빛 = 자동사의 욕망.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그 경이로움을 체험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존심은 자기 존중감.

고독감까지 사랑하는 자존심.

새롭게 배치하는 꿈.

부채감에서 시작하는 연대.

여성학은 '말'에 대한 학문이다.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언어.

여성주의는 앎의 방식에 관한 사유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알면 믿는 대로 보는 거다.

새롭게 알려면 눈을 감아라.  통찰력은 보지 않는 상태에서 가능하다.(음~정희진님은  멋쪄~)

 

관계를 통해 나를 발견하고 할 일이 생긴다.

나는 명석하지 못하니 명석한 사람에게 나를 연결하면 된다. (고미숙님의 뚫어버리는 통쾌함~)

 

남자들의 글보다 여자들의 글이 훠얼씬 새롭고 신선하며 통쾌하다.

통찰력은 지식에서 꼭 지식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란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2년 후에는 여성학에 몰입해봐야겠다.

나도 살아야겠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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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넥세노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5
플라톤 지음, 이정호 옮김 / 이제이북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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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책을 읽을 때면 본문을 먼저 읽곤 한다.

예전에는 별 문제 없이 읽곤 했는데 《메넥세노스》를 읽으면서는 황당했다.

미사여구로 시민을 현혹시킨다며 연설가들을 실컷 조롱하고는

소크라테스가 과장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아테네인을 추켜세우는 연설문을 들려주는 것이다.

태생이 훌륭하고 신들이 돌봐주는 아테네인들은 그 어느 군대보다 지혜롭고 용맹스러워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게다가 이웃 그리스인을 돕는 데에도 앞장서는 정의의 용사들이다.

국가는 전몰자의 가족을 법률에 의해 부족함이 없이 돌볼 것이며,

자식들은 아버지를 본받아 훌륭한 전사가 되기를 바라는 당부로 본문이 끝난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글이었다.

도대체 플라톤이 왜 이런 글을 쓴 걸까?

고민이 되면서 페리클레스의 추도문을 인터넷으로 검색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부록에 그 글이 실려 있었다.

‘음~ 독자를 배려하는 센스~~’

 

아스파시아가 썼다며 들려준 추도문과 페리클레스의 추도문은 확실히 달랐다.

세계사 시간에 민주정을 꽃피운 위인으로 페리클레스에 대해 들었던 기억 때문에,

그리고 플라톤이 연설가들을 비난하던 기억 때문에 어떻게 해석해야할 지 많이 헷갈렸다.

페리클레스의 추도문은 다분히 선전 선동적이며 정치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뭔가 있을 텐데...... 플라톤인 글을 그냥 내놓을 사람이 아닌데.....’

그 의문은 앞 쪽의 해설을 읽으면서 화아악 풀렸다.

참으로 독자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해설이어서

‘그럼 그렇지~~’하는 생각에 플라톤을 읽은 보람을 듬뿍 안겨 주었다.

어제 아노도스 정모에서 본문만 읽고 토론을 벌이며 들었던 의문들도 싸악 풀렸다.

 

1. 페리클래스의 한계는~

페리클레스의 것은 자신의 세대가 펼치고 있는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를 찬양하고

국가 전체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그들을 추모하며, 

그 후예들 역시 죽은 전몰자들을 본받아  제국의 목표에 헌신하도록 촉구한다.

"제국을 참주정으로 장악하고 있고 그러한 제국을 획득한 것이 부정의한 것으로 생각될지라도

결코 아테네의 패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메넥세노스 44쪽, 투퀴디데스 <역사> 2권에 실린 마지막 연설)

라고 말하며 평화를 전쟁에 예속시킨 것이다.

그것은 정의와 덕의 실천을 중시하는 아테네의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며

페리클레스  자신의 제국이 아무리 위대하고 고귀하다고 해도, 

그리고 용기가 아무리 탁월하다고 해도 부정의 하다는 오점을 지울 수 없게 된 것이다.(메넥세노스 44쪽)

결국 계속된 전쟁으로 그리스는 피폐해졌고 BC338년에 마케도니아의 지배에 들어가고 만다.

 

2. 메넥세노스의 정계 진출을 막은 이유는? 

철학과 교양 공부를 마친 18세 가량의 젊은 정치 지망생이었다(메넥세노스53쪽)

 

숙제가 하나 생기기도 했다.

투퀴디데스의《역사》를 읽어야 소크라테스가 숨기거나 왜곡한 전쟁사를 찾아낼 수 있겠기 때문이다.

크라튈로스에서 ‘이름’을 만들며 장난치더니, 이번에는 역사를 왜곡해서 뒤통수를 친다.

하여간에 알지 않고는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설을 읽고 나서 의문도 풀리고 독서한 보람도 느끼는 가운데 본문을 다시 읽었다.

소크라테스 아니 플라톤과 비밀스런 눈웃음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었다.

“모든 지식조차 정의와 그 밖의 덕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되면 지혜가 아니라 간사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연설 기술이 시민의 눈에 콩깍지를 씌우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욕망을 정의와 선에 일치되도록 바꾸기 위한 기술,

그들을 보다 좋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기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고르기아스 51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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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튀데모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6
플라톤 지음, 김주일 옮김 / 이제이북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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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 보물찾기 같은 책이었다.

맨 처음 읽었을 땐 헛웃음이 나왔다. 에우튀데모스와 디오니소도로스의 광대 같은 말장난에

주위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이 너무 황당했다.

도대체 아테네 사람들은 생각이라고는 없는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연대가 비슷한 시기의 고조선과 삼한 시대를 떠올리며

아직 논리가 발달하지 않은 시대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해설을 읽기 보다는 본문을 통해서 플라톤이 하고 싶어

플라톤이 하고 싶어 한 이야기를 찾아내고자 맘을 먹고 다시 한 번 읽기로 했다.

두 번째 읽으면서 소크라테스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생각해보느라

두 주가 지나도록 본문 내용을 다 읽을 수가 없었다.

 ‘지혜가 과연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일까?’

에우튀데모스는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빠르게 전수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땅땅 친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갖다 대기에 소크라테스의 마음을 읽어내려 집중력을 발휘해 보았다.

지식을 전수해 줄 수 있지만 지혜는 찰나에 터득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지혜로운 사람이 가까이에 있다면 없는 것 보다는 낫겠지만

지혜는 결코 가르쳐지는 것은 아니란 것으로 생각이 모아졌다.

소크라테스가 클레이니아스와 대화를 나누며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지혜를 가르쳐서라도 알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혜를 가진 것에서 만족한다면 아무 쓸모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어떤 사물이든 옳게 사용하는 것이 그 행동을 이끌고 옳게 바로 잡는 ‘앎’이며,

그 ‘앎’은 모든 획득과 행동의 경우에 행운뿐만 아니라 잘함도 인간에게 제공한다는 동의를 얻어낸다.

지혜만이 사람을 행복하고 운 좋게 만드는 것이므로 지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지혜롭기만 하면 다 이룬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것을 사용해야

참으로 지혜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옳거니!” 하고 감탄을 했는데,

이야기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만족하지 않고 또 한 발을 내디딘다.

모든 사람을 모든 점에서 좋게 하는 앎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앎을 어떻게 전수할 것인지에 관해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그 사이에 에우튀데모스가 끼어들어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소크라테스가 모든 것을 언제나 알 수 있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해댄다.

그리고는 신들 조차 팔거나 원하는 곳에 사용할 수 있다는 말장난같은 논변을 펼친다.

주위 사람들이 그 두 사람에게 감탄과 박수를 보내자

드디어 소크라테스가 그들에게 진정한 논리의 진수를 보여준다.

아주 짧은 시간에 배워 흉내 낼 수 있는 연설의 기술은 상대를 넘어뜨리면서

자신도 넘어지는 언어의 애매성을 이용한 말장난 일뿐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러면서 그런 종류의 것은 그들 무리끼리만 나눌 이야기이지

사람들 앞에서 대화를 나누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못 박는다.

그들의 대화가 끝나고 무리들이 흩어지는 중에 어떤 이에게서

‘헛소리나 하고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것에 공을 들이는 사람들’이라고

비웃는 말을 들은 크리톤이 그 말을 소크라테스에게 전해준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들과 정치가들의 중간 지대에 있는 사람들인 프로디코스는

그 둘 중에서 각각 좋은 것만 받아들여 모든 사람들에게 지혜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철학과 정치적 활동이 좋은 것이긴 하되 각각이 서로 다른 것에 대해서

좋은 것으로 적용되지 않으므로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배제하지 않고 분별에 관련된 정의를 내리기 위한 용감한 대화자로서 상대로 인정해 준다.

내가 소크라테스를 존경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으면 등을 돌리고 두 번 다시 그들과 말을 섞으려 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험담까지 만들어내곤 하지 않는가.

진리를 찾기 위해 두 소피스테스의 말장난조차도 진지하게 듣고,

그를 비웃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옳음과 옳지 않음을 구별해 내려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참으로 존경스럽다.

마지막으로 아들의 교육에 관해 조언을 구하는 크리톤에게 사물 자체를 훌륭하게 잘 검토해서

그것이 옳지 않으면 돌아서게 하고, 옳은 것이면 크리톤 자신이 자식들과 함께 용감하게 탐구하고 연마하라고 권한다.

아들만 교육할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부자가 함께 연마할 것을 권하고 있다.

역시나 소크라테스다운 조언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일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평생을 연마해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한 번 더 읽고, 발췌요약을 하고, 그 글을 다시 읽어보면서

소크라테스의 진지하게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를 돋보이게 하기

그 시대의 유명한 지식인인 데우튀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를 풍자의 대상으로 등장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짧은 이야기에 많은 주제를 담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이 하나씩 더 보이는 보물찾기 같은 책이었다.

무엇보다도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흠모하는 플라톤의 마음이 진하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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