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넥세노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5
플라톤 지음, 이정호 옮김 / 이제이북스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플라톤의 책을 읽을 때면 본문을 먼저 읽곤 한다.

예전에는 별 문제 없이 읽곤 했는데 《메넥세노스》를 읽으면서는 황당했다.

미사여구로 시민을 현혹시킨다며 연설가들을 실컷 조롱하고는

소크라테스가 과장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아테네인을 추켜세우는 연설문을 들려주는 것이다.

태생이 훌륭하고 신들이 돌봐주는 아테네인들은 그 어느 군대보다 지혜롭고 용맹스러워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게다가 이웃 그리스인을 돕는 데에도 앞장서는 정의의 용사들이다.

국가는 전몰자의 가족을 법률에 의해 부족함이 없이 돌볼 것이며,

자식들은 아버지를 본받아 훌륭한 전사가 되기를 바라는 당부로 본문이 끝난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글이었다.

도대체 플라톤이 왜 이런 글을 쓴 걸까?

고민이 되면서 페리클레스의 추도문을 인터넷으로 검색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부록에 그 글이 실려 있었다.

‘음~ 독자를 배려하는 센스~~’

 

아스파시아가 썼다며 들려준 추도문과 페리클레스의 추도문은 확실히 달랐다.

세계사 시간에 민주정을 꽃피운 위인으로 페리클레스에 대해 들었던 기억 때문에,

그리고 플라톤이 연설가들을 비난하던 기억 때문에 어떻게 해석해야할 지 많이 헷갈렸다.

페리클레스의 추도문은 다분히 선전 선동적이며 정치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뭔가 있을 텐데...... 플라톤인 글을 그냥 내놓을 사람이 아닌데.....’

그 의문은 앞 쪽의 해설을 읽으면서 화아악 풀렸다.

참으로 독자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해설이어서

‘그럼 그렇지~~’하는 생각에 플라톤을 읽은 보람을 듬뿍 안겨 주었다.

어제 아노도스 정모에서 본문만 읽고 토론을 벌이며 들었던 의문들도 싸악 풀렸다.

 

1. 페리클래스의 한계는~

페리클레스의 것은 자신의 세대가 펼치고 있는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를 찬양하고

국가 전체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그들을 추모하며, 

그 후예들 역시 죽은 전몰자들을 본받아  제국의 목표에 헌신하도록 촉구한다.

"제국을 참주정으로 장악하고 있고 그러한 제국을 획득한 것이 부정의한 것으로 생각될지라도

결코 아테네의 패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메넥세노스 44쪽, 투퀴디데스 <역사> 2권에 실린 마지막 연설)

라고 말하며 평화를 전쟁에 예속시킨 것이다.

그것은 정의와 덕의 실천을 중시하는 아테네의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며

페리클레스  자신의 제국이 아무리 위대하고 고귀하다고 해도, 

그리고 용기가 아무리 탁월하다고 해도 부정의 하다는 오점을 지울 수 없게 된 것이다.(메넥세노스 44쪽)

결국 계속된 전쟁으로 그리스는 피폐해졌고 BC338년에 마케도니아의 지배에 들어가고 만다.

 

2. 메넥세노스의 정계 진출을 막은 이유는? 

철학과 교양 공부를 마친 18세 가량의 젊은 정치 지망생이었다(메넥세노스53쪽)

 

숙제가 하나 생기기도 했다.

투퀴디데스의《역사》를 읽어야 소크라테스가 숨기거나 왜곡한 전쟁사를 찾아낼 수 있겠기 때문이다.

크라튈로스에서 ‘이름’을 만들며 장난치더니, 이번에는 역사를 왜곡해서 뒤통수를 친다.

하여간에 알지 않고는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설을 읽고 나서 의문도 풀리고 독서한 보람도 느끼는 가운데 본문을 다시 읽었다.

소크라테스 아니 플라톤과 비밀스런 눈웃음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었다.

“모든 지식조차 정의와 그 밖의 덕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되면 지혜가 아니라 간사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연설 기술이 시민의 눈에 콩깍지를 씌우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욕망을 정의와 선에 일치되도록 바꾸기 위한 기술,

그들을 보다 좋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기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고르기아스 51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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