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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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소설은 그가 즐겨 사용한 상징인 미로와 같이 독자들을 혼란 속에 몰아넣습니다. 『픽션들』은 그 어떤 철학서적보다 난해하고 어렵죠. 보르헤스는 오이디푸스에게 수수께끼를 던지는 스핑크스처럼, 자신의 독자에게 알쏭달쏭한 말로 질문을 던집니다. 보르헤스는 원래 은유와 상징, 암시를 이용해 죽은 은유와 같은 일상 언어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말이 수수께끼와 같은 이유는 그가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단편소설 속에도 수많은 상징과 은유, 낯선 조합으로 이루어진 개념들을 삽입했기 때문이죠. 사실 보르헤스의 소설은 그의 말자체가 어렵다기보다는, 독자가 그의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만나는 독자 스스로를 향한 낯선 질문 때문에 난해하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저는 픽션들에 수록 된 단편중 「바빌로니아 복권」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서평을 올려 봅니다.

 

 

「바빌로니아 복권」의 배경인 ‘바빌로니아’는 성서에 등장하는 바벨탑이 세워진 도시로 바벨의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시뮬라르크가 지배하는 세계이죠.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총독과 노예, 감옥생활까지 전능함과 치욕을 경험하며, 인생의 바닥부터 윗세계의 온갖 경험들을 하며 살아온 한 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펼쳐집니다. 현자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자신의 몸에 주홍빛으로 새겨진 두 번째 글자‘베트’의 두가지 속성에 대한 설명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요... 주홍색 문신은 19세기 미국 작가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소설 『주홍글자(The Scarlet Letter)』를 연상하게 합니다! (맞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전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헤스터는 간통죄로 평생 달고 다녔던 간통(adultery)을 뜻하는 주홍글자 ‘A'를 평생 가슴에 달고 다니는데 이후,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진실함과 선한 성품에 점차 마음을 움직여 이 글자의 의미를 천사(angel)를 뜻하는 ’A'로 인식하게 됩니다.

 

 

 

찢어진 내 망토사이로 배에 새겨진 주홍빛 문신이 보인다. 이것은 두 번째 글자인 ‘베트’이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이 글자는 내게 기멜을 새기고 다니는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지만, 알레프를 새긴 사람들에게는 나를 종속시킨다.

 

 

 

이처럼 이 현자의 몸에 새겨진 주홍 글자 ‘베트’역시 두 가지 속성을 가진 글자입니다. 이 글자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의미와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죠. 이와 같이 그는 합리성을 믿는 그리스인들은 모르고 있는 ‘불확실성’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헤라클레이데스가 말한 피타고라스의 환생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이 순환하는 잔인한 운명의 원인인 복권제도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냅니다. 바빌로니아에서 시작된 복권은 원래 ‘ 그 어떤 도덕적 가치도 없었고 단지 인간의 희망만을 겨냥한’ 시시한 복권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누군가가 복권의 속성에 ‘불운’의 요소, 두려움의 속성을 더하자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이 복권에 열광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이 모험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겁쟁이로 간주되기 시작했죠. 이 복권을 발급하는 ‘회사’는 인간이 가진 공포와 희망을 이용하는데 능한 종교처럼 바빌로니아 시민들의 운명까지 휘두르는 거의 신의 능력과 가까운 막강한 힘을 갖게 됩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논리와 심지어는 대칭까지도 매우 좋아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행운의 숫자들은 돈으로 계산되고, 불운의 숫자들은 구금 날짜로 계산된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좋아한 탓에 ‘행복’이나 ‘불행’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조차도 수치화 시켜버렸습니다. 이는 그들의 논리성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한 낱 복권이 그들의 인생의 형태와 방향을 결정짓게 된 것이죠.

 

 

대부분의 경우, 어떤 행복들을 단지 우연의 소산일 따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결과들을 과소평가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 ‘회사’의 요원들은 암시와 마술을 사용하곤 했다. 그들이 어떤 길을 밟았는지, 그리고 어떤 음모를 짰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다…그들은 우연의 지시를 따르고…복권의 미로와 같은 법칙을 연구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것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는 회전하는 천체에 대하여 연구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바빌로니아 시민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복권의 추첨 결과는 단순한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회사’의 요원들에 의해 치밀하게 ‘조작된’ 우연의 결과입니다. ‘깊이 생각할 줄 모르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희망과 공포, 목숨까지 바친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그 동일성의 원리에 아무런 ‘합리적’기반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복권제도가 가진 이면적 속성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죠.

 

 

‘회사’의 자애로운 영향 아래서 우리들의 관습은 이제 우연으로 가득하다.…혹자는 ‘회사’가 수백 년 전부터 존재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 삶 속의 신성한 혼돈은 단순히 물려 내려온 것이며 전통에 따른 것이라고 무례하게 강조한다.

 

 

 

‘우연’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 닿을 수 없는,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회사’가 ‘바빌로니아’라는 세계에 주입한 우연적 사고방식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행운과 불행, 예기치 못한 사건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서와 제도를 저항할 수 없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죠. 마찬가지로, ‘회사’의 지배체제 또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데 유용했습니다. 그들의 복권제도는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그의 저서 『시뮬라시옹(Simulation)』에서 말한 미국의 디즈니랜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있다…디즈니랜드는 다른 세상을 사실이라고 믿게 하기 위하여 상상적 세계로 제시된다.…디즈니랜드의 상상 세계는 참도 거짓도 아니고, 실재의 허구를 미리 역으로 재생하기 위하여 설치된 저지기계이다…즉 <실제의> 세상이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진정한 유치함이 도처에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하여…….(Baudrillard, 44)

 

 

 

바빌로니아의 복권 제도는 ‘회사’라는 한 지배체제가 통치를 위해 고안한 질서의 ‘임의성’을 숨기기 위한 ‘조작된 우연’ 즉, 하나의 교묘한 장치입니다. 신과 같은 ‘회사’가 세상에 도입시킨 혼돈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진실을 볼 수 없도록 방해합니다. 더 혼란스러운 것은 소설의 말미에서 제기된 문제로, 이 질서를 만든 ‘회사’의 존재 여부와 그 기원조차 모호하다는 것이죠. 사실상 이 가공의 질서는 근원조차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대상인 것입니다.

 

 

 

제목부터 그 유사성을 암시하고 있는 픽션들 중 수록된 가장 유명한 작품「바벨의 도서관」과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동일하게 디스토피아(dystopia)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실존의 의미와 우주의 질서를 파악하고자 하지만 우리 눈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조작된, 혹은 가정된 허구의 세계일뿐이라는 거죠. 인간이 고안한 이 허구의 세계는 단순히 진리를 가리는 어둠일 뿐 아니라「바빌로니아의 복권」에서 나타난 것처럼 인간의 생명과 운명까지 위협하는 것이죠. (으아, 쓰다보니 너무 회의적인 리뷰가 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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