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쇼 가족 변주곡 민음사 모던 클래식 47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음♪이탈, 그리고 영원한 타인들과 살아가기

바흐의 음악관처럼 악보에 충실하게 제대로 쳐진 건반으로,  제대로 된 음이 발생되면 연주는 악기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바흐의 음악관을 해석한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대로 이미 확립된 원칙속에서 독창성을 찾을 수 있다는 건가?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온전한 음악으로 빚어지는 건가?


결국 나의 삶은 진정한 내가 될때,




나만의 본질적인 '음'




즉, 내가 갖고 태어난 나의 '음'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아름다운 선율 같은 하나의 온전한 노래로 온전한 나의

삶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우리는

여기에 필연적으로 덧붙여... 협주곡이 되어야 한다.




하나의 음만으로는 온전한 음악이 될 수 없으니.





 




인생이라는 악보위에서 우리는 갖가지 음표들의 본연의 음들과 어우러져야 한다. 그들과 음을 잇고 박자를 맞추고 정해진 강약과 템포에 맞추어 충실히 하나의 노래로 이루어 가야한다..







안타깝게도 인생이라는 악보에서는 그 아름다운 협주곡을 이루기란 너무나 어렵다. 왜냐 우리는 그 강박적인 질서를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게 모두의 행복을 위한 정해진 자리일지라도말이다. 끊임없는 불협화음과 음이탈로 우리의 삶은 늘 나와 타인간의 삐걱댐으로 상처와 진물로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심지어 한 지붕아래 살 냄새를 섞고 사는 가족들 간에도 그 불협화음은 존재한다. 완전히 타인이라고 부르기엔 때론 꺼림칙하도록 밀접한 관계의 '가족'이란 그 이름 때문에 더 괴로운 그 불협화음. 차라리 남이라면 좋으련만 내 가족이기 때문에, 지리하도록 얽혀있는 내 가족이기 때문에 ..


이 소설에는 많은 부부들이 등장한다. 토머스와 토니, 하워드와 클로디어, 레오와 수지, 브래드쇼 부부까지. 이 부부들 사이에선 공통적으로 불협화음이 발생하고 있다. 더 슬픈건 그 불협화음속에 익숙해져버렸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상대방에 대한 기대나 소망을 품지 않는다.




두 사람사이의 공기가 떨리는 듯 하고, 그 분위기는 이제 막 꽃을 피우려는 어두운 씨앗 같다. 그는 무언가가, 사랑이든 폭력이든, 주어지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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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내의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는다. 끔찍한 공허감이, 성큼성큼 다가와, 차갑게 그를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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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틀어져버렸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 비스킷의 달콤함은 더 이상 느낄수없다. 그는 차가 식게 내버려둔다. 해가 진후에 집으로 들어와 그대로 싱크대에 부어 버리고, 비스킷은 깡통 안에 다시 넣는다.


 

내게는 이 소설 속에서 브래드쇼 부부들의 바로 이 모습이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비극적인 장면으로 다가왔다. 좋아하던 비스킷의 달콤함이 무뎌지듯 상대에 대해 차갑게 식어버린 그 애정. 인생의 황혼의 끝에선 부부. 오랜 세월 함께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며 모진 풍파의 세월을 견뎌온 이 부부의 삶의 막바지 모습이 결국 이런 것이라니. 아무리 부부지만 결코 한 몸이 될 수없는 영원한 타인에 대한 요원한 거리감, 소외감.


 

우리는 사실 타인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감을 찾는다. 나의 존재감은 상대방에 의해 자극 되고 발견된다. 그러나 그 상대가 익숙해지면 즉 상대가 나의 모든 것에 충실히 반응하는 백지 상태가 아니라면 점점 내 속의 나와 상대방의 자아가 충돌을 빚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서로에 대한 지루함과 체념을 낳는다. 우리 모두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완 부인은 자신의 모든 말에 순진하게 반응하는 손녀에게 애정을 쏟고 토마스는 클라라의 엄마.. 비올라를 켜는 그녀에게 끌리고.. 토니는 적극적인 젊은 교수의 유혹에.. 흔들린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아직은 알고 싶고 맞추어가고 싶은 여지가 많은 다른 이에게.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애정일까? 브래드쇼씨의 말대로 익숙해진 물건을 다른 새것으로 바꾸고 싶은 그 욕망이 과연 맞는걸까?




이 소설의 중심을 이끌어 가는 부부는 토머스와 토니이다. 토머스는 회사 일을 접고 한 대학에서 학장을 맡은 교수 아내 토니 대신 딸을 돌보며 살아간다. 그는 종종 날짜를 잊을 정도로 집안에서의 무료한 생활, 별 의미 없는 하루에 무뎌진 남자다. 그는 그 무의미한 삶의 공허함과 결핍을 예술적 에너지로 채우고 싶지만 늘 그 예술이라는 것은 왠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아내의 성공이 확실해져갈 수록 정작 자신의 입지는 불안하게 느껴지고 인생이라는 무대 위의 주인공으로서가 아닌 늘 연극 관객의 입장으로 살아간다. 그는 삶이 무료하다, 힘들다 하면서도 어쩌면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삶에 직면한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가 뭘까? 그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도 자신이 누군지 여전히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예술을 하는 이들을 늘 동경해온것이다. 하나의 대상에 혹은 하나의 목적에 예술혼을 불태우고 자신의 삶과 예술이라는 가치를 하나로 모으고 살아가는 그들을, 그들의 몰입의 순간을, 그들의 열정을 흠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런 삶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토니 역시 동료에 의하면 바이러스 같다는 문학을 전공한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은 문학의 예술성과는 동떨어져있고 반복되는 일상의 피로와 지위에 부응해야한다는 의무감으로 인해 지쳐있다. 삶에 대한 절실함과 생명력을 잃어버린 주인공들의 삶과 그들의 지루한 가정사의 세세함을 작가는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어 때론 그 모든 묘사와 말들 속에서 독자도 함께 지쳐간다.




사실 내게 이 소설이 버거웠던 것은 소설에서 주로 그들의 삶은 아직 이십대 대학생인 내가 살아보지 않은 인생의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사실적이라도 느낄 수 있는 건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아직 겪어보지 않은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미리본것이  조금은 괴로웠다.




모두가 이렇게 살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일상과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런 삶의 시점을 맞이하기전 나는 어떤 삶을 계획하고 어떤 삶을 그려야할까? 내안에 무엇으로 어떤것을 채워가야 할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토머스부부는 딸아이의 아픔으로 인해 다시 서로를 돌아보게 되고 서로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된다. 결혼 전 달콤함, 설렘 영원할 것 같은 그 로맨스 후, 함께 살아가게 된 타인들은 결국 이렇게 지루한 싸움 끝에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이해하므로 진정한 사랑을 빚어가게 되는 걸까?




영원한 타인의 벽은 결국 닮아감과 이해함으로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걸까...

협주곡이 아닌 변주곡으로?

 

당신과 나의 음이 만들어내는 ,예기치 못한 충돌들이 빚어낸 새로운 음악..

협주곡이 아닌 변주곡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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