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집중적으로 읽었던 세계화 관련 생각 몇 가지. 사실 세계화에 대한 해결책은 이미 나와 있다. 소위 서구 선진 강대국들이 욕심을 줄이는 것이다. 그들이 고기를 덜 먹으면 소, 돼지가 먹는 곡물만으로도 충분히 최빈국의 굶주림이 해결될 수 있고, 그들이 자동차를 덜 타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줄어 교토 의정서를 준수할 수 있으며, 그들이 최신 전자 제품에 대한 욕망을 줄이면 대기업이 아프리카의 내전을 틈타 그 곳의 지하자원을 헐값에 사들여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는 없을 테니까. 세계화의 본질은 선진 강대국들이 그동안 누려온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습관을 포기하지 못하고 개발도상국의 희생을 발판 삼아서라도 영원히 자신들만의 안락함을 누리겠다는 이기적 발상에 불과한 것이다. 과연 그들이 고기를 덜 먹고, 자동차를 덜 타며, 최신 전자제품 소유를 포기하겠는가? 과연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는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자신들의 안락함을 포기하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인종적 오만함과 기술적 우위, 정치적 안정 따위의 자기 기만적인 사고방식으로 지금까지 군림해 온 그들이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고 진정으로 지구의 안전과 후진국의 발전을 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오산이다. 그들은 절대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명분을 내세워서 라도 타국을 침략하여 기름을 확보할 것이고, 최빈국에서 내전을 유발하여 무기를 팔 것이며, 값싸게 지하자원을 확보하여 그것으로 전자제품을 만들어 비싼 값에 팔아먹을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이 지향하는 바도 선진 자본주의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가? 한국도 이미 제국주의 국가가 아닌가? 한국보다 못살고 발전이 더딘 지역을 무시하고 오만하게 굴고 있지는 않은가? 한국은 얼마나 가난한 나라를 돕고 있는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세계화는 무엇인가? 미국 흉내 내기? 아니면 미국 추종하기? 선진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최빈국의 자원 및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 한국에서 생산되는 자동차가 세계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늘이고 있는데 언제까지 쾌적한 라이프 스타일만을 강조하며 진실을 가릴 것인가? 얼마 전 끝난 핵안보 정상회의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등의 핵강국들이 그 많은 핵무기를 폐기할 생각이 없는데 무슨 핵 테러를 걱정하는가? 과연 맨주먹뿐인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핵무기를 소유하여 그것을 운영할 막대한 자본을 소유하고 있거나, 플루토늄을 확보하여 그것을 핵무기로 만들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미국과 러시아가 소유한 핵무기 자체가 지구의 평화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 아니냐? 왜 본질은 건드리지 않고 진실을 호도하는가? 한국의 언론은 그저 미국으로 대표되는 선진 강대국들의 대변인일 뿐이다. 자주적으로 사고할 수도 없고 종속적인 상황에서는 그저 강대국들의 논리를 앵무새처럼 따라 하면 되는 것이다, 세계화는 좋은 것이라고. 그러나 지금과 같은 형식으로 세계화가 계속되면 부유한 국가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국가는 더욱 가난해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하루에 한 권의 책을 읽어라. 책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하루 한 권 책읽기도 부족하다. 책이 도처에 있는데, 읽지 않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직무유기다. 어떤 분야에 종사하든,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공간만은 확보하라. 기술의 속도에는 뒤쳐져도 지성의 연마는 게을리 하지 말라. 기술도, 아이디어도 결국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두뇌의 힘을 기르는데 독서만한 것은 또 없다. 나는 오늘도 책을 읽는다. 그렇게 나와 세상과의 관계를 풀고 헤치며 삶과 죽음 너머 그 아득한 시공간에 닿기를 꿈꾼다. 해서 이번 달 내 독서 주제는 <히틀러와 나치 시대>로 정했다. 그동안 사 두고 읽지 못했던 관련서들과 최근에 알라딘에서 구매한 책들을 서재에서 꺼내 보았다. 꺼내 놓고 보니 꽤 많은 편이다. 우선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부터 <대학살의 전주곡 크리스탈 나흐트>, <나치시대의 일상사>, <나치스 민족공동체와 노동계급>,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 <파시즘>, <히틀러가 바꾼 세계>, <게슈타포>, <히틀러 국가>,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 <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독일 제 3제국의 비극>, 그리고 히틀러가 직접 썼다고 하는 <나의 투쟁>까지 모두 15권이다. 이중 <집단 애국의 탄생, 히틀러>는  이미 읽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차례대로 읽어 나갈 것이다. 오래 전(1997년쯤?) 읽었던 홍사중 선생의 <히틀러>로 촉발된 히틀러와 나치 시대에 대한 관심이 오래도록 내 정신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는데, 이번 독서를 계기로 철저한 이론적 정립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런데 위의 책들은 분량도 상당하여 한 달 내에 다 읽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 읽어 나가자. 어떤 현상에 대한 철저한 이해만이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나를 똑바로 세우는 가장 견고한 방법임은 이미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에서 실천했다. 나도 그렇게 해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미술관 옆 인문학 책상 위 교양 21
박홍순 지음 / 서해문집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참 독특한 성격의 인문학서다. <미술관 옆 인문학> 이라는 제목의 책. 약력에 따르면 저자인 박홍순은 민주화 운동에 몸담아 온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그림을 통해 사회적, 정치적 해석을 해나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예를 들어 <진리가 여성을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글에서는 프랑스의 화가 Jean-Baptiste-Camille Corot(1796~1875)가 그린 <책 읽는 여인>에 대해 해설을 하고 난 후 Simone de Beauvoir의 <제 2의 성>을 소개하면서 여성이 자아를 발견해 가는 방법으로 독서의 힘을 강조하는 식이다. 모든 페이지가 동일한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이 책을 읽는 것은 동서양의 명화와 함께 관련 인문학의 명저까지 접해 볼 수 있는 일석이조의 지적 경험을 하는 것이다. 요즘들어 명화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해석하고 관련이 적은 분야와의 통합을 지향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그림이 단순히 화가의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그림이 반영하고 있는 당대 현실에 대한 사회학적  

인식에 까지 넓어진 결과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림 속 음악 산책 생각나무 ART 19
박혜원 지음 / 생각의나무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그림 속 음악 산책>은 서양회화 중에서도 음악을 소재로 한 그림만을 모아 해설한 책이다. 음악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려면 화가는 회화적 정교함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책에 등장하는 화가들은 이러한 면에서 현대화가보다 훨씬 멀리 나가 있다. 특히 놀라운 그림은 15세기 Flandre 지역에서 활동했던 Hubert & Jan Van Eyck 형제의 <양에 대한 경배>에 묘사된 노래하는 천사들의 얼굴 모습이다. 중세 다성음악(polyphony)의 4음성과 정확히 일치하는 천사들의 표정을 보노라면, 그 치밀한 표현력에 감탄하게 되고 천상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착각에 빠진다. 음악과 그림의 만남은 예술적 경험의 극치에 도달한 쾌락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그동안 꽤 많은 미술 관련서를 읽어 왔지만, 음악과 관련된 명화만을 따로 다룬 책은 이번이 처음인데, 간결하고도 정감어린 해설은 새삼 어떤 대상에 대한 적확한 해석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데 얼마나 간절한 것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저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도 중고서점에 들러 <그리스 미술>과 <로마 미술> 2권의 책을 구입했다. 왜 자꾸 책을 사는 걸까? 이미 가지고 있는 책도 많고 아직 읽지 못한 책도 산더미 같은데. 아무리 책 욕심을 줄이려 해도, 이미 어떤 주제의 책을 1~2권 읽은 상태라 해도, 우선은 사두는 습관 때문일까? 나중에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당위성? 이유가 무엇이든, 책이란 것도 일단 수납의 한계점에 도달하는 순간 공간과의 사투가 벌어진다.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조그만 아파트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갈수록 더 늘어나고 있는 책책책... 그나마 다른 물건과는 달리 지성에 도움을 주고 삶과 죽음도 극복할 수 있도록 영감도 주며 현명한 마무리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는 것만으로는 책이 쌓여가는 현실에 변명이 될 수 없다. 게다가 내가 죽으면 이 책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중고서점에서 가끔 목격하곤 하는 서글픈 사건이 있는데, 사망한 사람의 서재에서 쏟아져 나온 유품으로써의 책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경우다. 아마 유족들이 고인을 빨리 잊고 싶어서, 또는 고인의 생전 그 책들 때문에 금전적, 공간적 문제로 인해 골치 아팠던 기억으로 서둘러 처분했음이 명백한데, 고인의 손때가 묻고 밑줄이 그어져 있거나 여백에 적혀 있는 독서중의 단상들을 보노라면, 내 책들의 말년이 보이는 듯하다. 해서 나는 그렇게 한꺼번에 매물로 나온 책들은 절대 사지 않는다. 그 책들 주인의 꿈과 희망이 그의 죽음과 함께 한낱 종이뭉치로 전락했다는 그 물질성의 잔인함 앞에서, 나는 정신이 아득해 진다. 나는 한 번도 책을 물건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다. 돈주고 구매한다는 면에서는 책도 틀림없이 상품이지만,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는 책이 과연 8000원(내가 이 책을 구매했을 당시의 가격) 가치밖에 없는 인쇄 뭉치에 불과할까? 그 책속에 담겨 있는 선생의 삶과 지성과 애민사상을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내가 한 권 한 권의 책에 부여하는 '의미'는 단순한 물질성을 뛰어 넘어 신성성을 가진 神格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생인 아들 녀석에게 다짐을 받았다. 아버지의 책들을 잘 보관하고 최소한 3대까지는 대물림하라고. 아들 녀석이 그러마고 약속해 주었다. 그런데 며느리가 좋아 할까? 집도 좁은데 책이 무슨 소용이냐고 아들과 갈등을 겪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하긴 내가 지금까지 내 책들 한 권 한 권에 부여했던 정신적 가치들을 나 아닌 그 누가 알아 줄 것인가? 부지런히 읽고 내 뇌에 흔적을 남기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래야 내가 죽을 때 최소한 <장자>의 한 구절 정도는 외우며 삶을 마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