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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의 즐거움 - 인문학자 김경집의 중년수업, 개정판
김경집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3월
평점 :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중년이 되고 난 후 가장 달라진 점?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나의 죽음을 긍정하게 된 것. 그래서 별 변화는 없지만 일상사 하나하나가 깊은 의미를 담고 있고 그만큼 소중하며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궁극의 기쁨임을 깨닫게 된 것. 비록 단속(斷續)없는 계절의 순환이 곧 내 육체의 쇠락이라는 어김없는 조짐으로 나타나 양손 위에 피어난 검버섯이 아주 조금 신경 쓰이고 양 무릎에 찾아드는 통증이 계단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었지만, 그만큼 내 정신은 세상 모든 것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 육체의 필연적 소멸이 종국엔 정신의 확산임을 깨닫게 되는 인생의 절정기가 중년이 아닌가 싶다. 소년기의 유치한 장난, 청년기의 무모한 열정, 장년기의 어정쩡한 욕망이 모두 사라진 그 자리에 통합적이고 너그러운 마음이 가득 들어차 내면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모든 중년이 다 이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나는 욕망은 절제하고 지혜는 늘려나가는 생활을 지속적으로 실천할 것이다. 더 이상의 편견과 왜곡된 사유는 내 뇌 속에 자리 잡지 못할 것이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대중지성은 경박해도, 나는 올바르게 판단하고 유연하게 행동하며 폭넓게 사유하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인문학자 김경집 선생이 마흔여덟에 쓴 『나이듦의 즐거움』을 내 나이 마흔아홉이 된 올 해 읽게 되었다. 비슷한 연령대의 경험이어서 일까, 꼭 내 마음을 들킨 듯, 한 편 한 편의 에세이가 바로 내 삶의 에피소드인 냥 그렇게 정겹고 맑을 수가 없다. 아마 이 책을 읽어 본 내 나이 또래 중년 남성들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노안(老眼)이 가져다 준 심안(心眼), 배우자의 갑작스러운 암 발병과 그 고통의 공유 및 죽음에 대한 성찰, 못 이룬 꿈에 대한 아쉬움, 아버지라는 자리, 여행을 향한 소박한 바람, 끝없는 공부에 대한 도전, 어린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추억들, 우표 수집의 행복, 친구의 죽음으로 촉발된 내 삶의 성찰, 편지로 대표되는 아날로그 찬양과 느림의 미학 고찰, 산과 자연이 베풀어주는 무조건의 휴식 찬양, 독서의 즐거움, 친구의 소중함, 노부모에 대한 흠모의 정과 그리움 등, 마흔의 끝자락에 선 한 사내가 담담하고 정갈한 언어로 써내려간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인생론이, 평범해서 오히려 깊은 울림으로 남았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생활 속의 소박하고 별로 극적이지 않은 나날의 체험이 이토록 깊은 성찰로 거듭날 수 있음은 김경집 선생의 섬세한 촉수 덕분이리라. 글을 통해 느낀 것이지만 중년 남자의 사유와 행동이 이토록 순수할 수도 있다는 것에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상처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잔잔하게 슬픔을 달래주고 낮은 목소리로 삶의 작은 기쁨들을 일깨워주는 그 목소리에서 나는 또 한 번의 희망을 보았다. 남자의 삶이 꼭 많은 돈과 권력, 야심과 출세만으로 점철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거나 회복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느니 차라리 내면으로 침잠해 고요히 맑게 살리라. 나는 중년의 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