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생애 에버그린북스 10
로맹 롤랑 지음, 이휘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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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반 베토벤(1770.12.16∼1827.3.26)에 관한 나의 인상은 전적으로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로맹 롤랑(Romain Rolland, 1866∼1944)의 『베토벤의 생애』라는 짧은 책 한 권에 의한 것이다. 나는 이 책을 고등학생 때 삼중당 문고로 읽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문예출판사 문예교양선서의 54번째로 나온 46판으로 두 번째 읽었으며, 이번에 같은 문예출판사의 신판(국판)을 구하게 되어 또 한 번 읽었다. 길지 않은 삶을 살면서 한 번 읽기도 힘든 책을 세 번씩이나 읽는 것을 두고 시간과 지력의 낭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시기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으로 삶에 흔적을 남기는 책도 몇 권은 있게 마련 아닌가. 고등학생 때 읽었던 『베토벤의 생애』는 음악 시간에 배웠던 전기적 사실을 확인해보고자 그냥 한 번 읽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악성이라 불리는 그가 어떻게 살았고 어떤 작품을 남겼는가 정도의 관심에 그쳤다는 뜻이다. 책을 읽고 나서 당시에 끝까지 들어 보았던 베토벤의 음악은 교향곡 9번「합창」이었고, 그 때의 영향인지 지금도 내게 베토벤의 최고 작품은 단연「합창」이다. 각설하고, 『베토벤의 생애』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때는 물론 대학생 시절이었다. 고등학생 시절보다 조금 머리가 굵어졌다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름 고민하면서 학교 뒷산에 수시로 올라 이 책 저 책을 닥치는 대로 읽던 그 시절, 서울역 앞에 즐비하던 헌책방 중 한 곳에서 구한 문예출판사판 『베토벤의 생애』를 펼쳐 한 장씩 읽어가면서 나는 고등학생 시절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베토벤의 영웅적 삶에 동화되어 갔다. 개인적 고뇌를 예술로 승화시키고 하루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으며 온전한 삶을 살았던 한 작곡가의 생애가 진정한 거인의 모습으로 내 대학생 시절을 온통 지배했다. 당시에 샀던 대형 베토벤 흑백 초상화 브로마이드는 지금도 안방 벽에 걸려 있는데, 그 형형한 눈빛과 단호하게 꾹 다문 입술, 꿈틀거리는 머리카락은 그대로 치열했던 그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시절 용돈을 아껴 9곡의 교향곡과 5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LP로 한 장씩 구해 차례대로 들으면서 고뇌가 산출한 위대한 예술 작품 앞에서 절대로 도덕적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많은 일들을 겪고 나니 어느새 마흔 끝자락에 선 중년이 되었다. 노안도 함께 찾아 와 더 이상 작은 글씨를 선명하게 볼 수 없게 됐을 때 내 앞에 나타난 큰 글씨의 『베토벤의 생애』. 또 읽었다. 돋보기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는 행복. 중년이 되어 구입한 「베토벤 전집」CD 박스 셋 2종으로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바가텔, 현악사중주,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베토벤의 전 작품을 한 곡씩 들으며 상실의 슬픔과 고독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었다. 특히 후기현악사중주는 대학생 시절에 몇 번 들으려 시도했다가 그 난해함에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었는데, 중년이 되어 한 곡씩 천천히 들어 보니 단순한 선율 이상의 깊이와 정신적 심오함이 이제야 제대로 이해되는 경험을 했다. 후기현악사중주는 적어도 중년을 통과해야 이해할 수 있는 베토벤 음악의 정점이다. 나는 한국의 중년 사내들이 베토벤 후기현악사중주를 들으며 돈이나 권력, 성욕의 무한하고 허무한 유혹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기를 바란다. 후기현악사중주를 들으면서 나는 인간의 삶이란 것이 태어나서 죽기 전까지 온통 고뇌로 점철되어 있다 해도 그 고뇌가 인간을 얼마나 성장시키고 내면의 욕망을 절제하도록 힘이 되며 외면적 겉치레를 무시하도록 하는지를 절실히 깨닫는다. 후기현악사중주를 이해하고 그 미학에 공감하게 되기까지 내 삶은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고비와 굴곡을 거쳐 마침내 통합적 사유에 도달하게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에 처음 읽었던 『베토벤의 생애』는 어느 살아있는 스승보다도 내게 진정한 삶을 가르쳐준 한 권의 책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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