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천천히 자라도 괜찮아 - 너는 느리게 걷는 아이, 나는 발맞춰 걷는 엄마
구하라 지음 / 모티브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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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사로 살아온 지난 수십 년 동안, 내가 마주한 생명들은 단 한 번도 인간이 정한 시계에 맞춰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강아지는 첫날부터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지만, 어떤 녀석은 구석에서 몇 달을 보낸 뒤에야 겨우 손길을 허락한다. 자연의 섭리 속에서 '틀린 속도'란 없다. 오직 '저마다의 속도'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세 아이의 아빠이자 50대 중반의 가장으로서 고개를 돌려 우리 사회를 바라볼 때면, 나는 서글픔을 넘어 밀려오는 분노를 감추기 어렵다. 구하라 작가의 에세이 <조금 천천히 자라도 괜찮아>는 이 굳어버린 세상의 잣대에 잔잔하지만 묵직한 돌멩이를 던지는 책이다.

이 책은 또래보다 말도 걸음마도 조금 느린 둘째 아이를 키우며, 병원과 발달센터의 차가운 복도에서 불안을 견뎌낸 한 어머니의 기록이다. ‘느린 아이’라는 말을 마주했을 부모의 심정이 어땠을지 감히 짐작해 본다. 그것은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이었을 것이며, 죄책감의 터널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그 조급함과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유모차도 장난감도 없이 아이를 데리고 낯선 코타키나발루로 떠난다. 세상의 기준이 숨 막히게 조여올 때, 아예 그 기준의 밖으로 걸어 나가 아이만의 걸음에 보조를 맞추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단단한 용기에 세 아이를 키워낸 아비로서 깊은 경의를 표하게 된다.

그러나 책을 덮으며 밀려오는 감정은 비단 감동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과연 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느리다'는 말을 낙인처럼 찍어버리는 이 사회의 효율 만능주의에 안타까움을 넘어 화가 난다. 학교는 여전히 똑같은 출발선에 아이들을 세워두고 일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운다. 남들보다 한 걸음만 뒤처져도 패배자로 낙인찍히는 시스템 속에서, 느린 아이를 둔 부모들은 치료실을 찾아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고립된 전쟁을 치러야 한다. 제도가 메워주지 못하는 공백을 오롯이 부모의 눈물과 경제적 부담으로 때우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 공동체의 민낯이다. 사회적 안전망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제도가 성숙하지 못하다면, 아이들이 자라나 마주할 미래의 삶은 얼마나 더 외로울 것인가.

아픈 동물을 치료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독촉이 아니라 기다림과 적절한 환경 조성이다. 인간 사회 역시 발달이 조금 늦은 아이들을 교정 대상이 아닌, 그들이 안전하게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이 되어주어야 한다. 국가와 지역사회가 이들의 치료와 교육을 제도적으로 책임지고, 성인이 되어서도 자립할 수 있는 일터와 문화를 마련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공동체를 유지하는 진짜 이유여야 한다.

‘너는 느리게 걷는 아이, 나는 발맞춰 걷는 엄마’라는 부제처럼, 이제는 엄마 혼자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그 걸음에 발을 맞춰야 한다. 이 책은 느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는 눈물겨운 위로를 건네고, 나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부끄러운 성찰을 촉구한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저마다 피어나는 계절이 다르다. 조급증에 걸린 대한민국이 이 따뜻한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이제라도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진정한 책임을 고민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리뷰는 리뷰의숲 서평단 자격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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