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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으로 가는 길
정형남 지음 / 애플북스 / 2026년 9월
평점 :
어느덧 오십 대 중반, 뒤를
돌아보면 내 삶은 거대한 피난의 역사였다. 세상이 불의로 들끓고 부조리한 뉴스가 화면을 채울 때, 나는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직장이라는 견고한 울타리 안에서 내
밥그릇을 지키는 것이 가장 숭고한 도리라 스스로를 속이면서 말이다. 비겁함을 '성실한 가장의 무게'라는 핑계로 포장해 온 날들. 정형남의 장편소설 <새벽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아온 내 안의 비겁함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었다.
이야기는 군사독재와 속세의 부조리가 남긴 역사의 상흔을 품고 외딴섬
암자로 숨어든 지식인 청년 '우인(愚人)'의 고독에서 출발한다. 그가 세상과의 접촉을 끊은 채 자연 속에
스스로를 유배 보낸 모습은, 직장 내의 온갖 부조리와 사내 정치 속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나의 서글픈 자화상 같았다. 철저한 고립 속에서 멈춰 있던 우인의 삶은, 한겨울 눈보라를 뚫고 찾아온 의문의 여인 '신해'를 구해주면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타인을 향해 기꺼이 곁을 내어주는
이 만남의 사건은, 침묵이 미덕이라 믿어온 내 완고한 일상에 커다란 균열을 일으켰다. 상처받기 싫어서 선택했던 도피가 결국 나 자신을 가두는 가장 깊은 감옥이었음을 우인의 변화를 통해 뼈아프게
깨달은 것이다.
우인과 신해의 만남으로 시작된 치유의 흐름은 섬의 또 다른 인물들을
만나며 더 깊은 연대로 확장된다. 바다를 닮은 침묵으로 삶의 지혜를 건네는 노어부 '도옹'과, 도시에서의
실패를 딛고 묵묵히 흑염소를 치며 살아가는 '유종'의 존재는
이 소설의 핵심 주제인 '비움과 무소유의 미학'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이들이 섬의 계절 순환 속에서 내면의 욕망과 통증을 내려놓는 과정은, 사회적 부조리에 침묵했다는 자책감으로 굳어버린 내 마음에 따스한 손길을 내밀었다. “상처는 흔적을 남기고, 과거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사람은 여전히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와 밥을 함께 먹고, 곁을 내어주며, 침묵을 견디는 순간 삶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말처럼,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거창한 망각이 아닌 타인에 대한
따스한 연대와 삶을 지속해 나가는 생명력 그 자체였다.
우인은 신해와 부부의 연을 맺고 정착하며, 삶의 순리를 받아들인 도옹과 함께 섬 정상에 올라 꽃씨를 뿌린다. “가장
깊은 밤을 지나온 자만이 눈부신 새벽의 문을 열 수 있다”는 소설의 가장 강력한 한 문장과 “정상은 끝이 아니다”라는 울림은 바로 이 클라이맥스의 순간, 비겁하게 숨어 안위만을 꾀하던 내 가슴에 묵직하고도 깊은 울림을 남겼다. 역사와
사회가 개인에게 남긴 깊은 흉터는 결코 혼자만의 도피로 지워지지 않으며, 부조리와 비극이라는 차가운
밤을 연대를 통해 정면으로 통과해 낼 때 비로소 눈부신 새벽의 문을 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오십
중반이라는 나이가 삶의 종착지가 아니며 언제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한 것도 바로 이 새로운 삶의 지평을 마주한 마지막
대목에서였다.
이제 오십 중반의 나이에 세상을 뒤바꿀 거창한 혁명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내일 아침 출근을 걱정하고, 부조리
앞에서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우인이 섬 정상에서 뿌린 그 작은 꽃씨와 작가가 전하는
회복의 메시지처럼, 내 마음에도 '외면하지 않을 용기'라는 작은 씨앗이 심어졌다. 늘 어스름한 새벽녘,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길에 오르던 내가 이제는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비겁했던 지난날을 용서하고, 조금 더 정직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다고 다짐한다.
나처럼 현실과 타협하며 시대의 부조리를 외면해 온 이 시대의 중장년
직장인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지난날의 방관이 남긴 내면의 죄책감을 비워내고,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다시금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갈 참된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이 리뷰는 리앤프리서평단 자격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