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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다라 세상 모든 소리를 적는 문자 - 한글 580년, 팍스 코리아나로 가는 길
이현준 지음 / 해향 / 2026년 10월
평점 :
수의사로 살아온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은 ‘말 없는 세계’와의 부단한 대화의 연속이었다. 병원을 찾는 동물들은 자신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인간의 언어로 똑부러지게 표현하지 못한다. 그저 고통에 겨워 “끙끙” 앓는
소리, 고양이들이 안정을 취할 때 내는 낮게 깔린 “골골” 소리, 혹은 폐가 상해 거칠어진
“쌕쌕”거림으로 자신의 가냘픈 상태를 호소할 뿐이다. 매일
아침 청진기를 귀에 대고 그 미세한 소리들의 결을 읽어내는 것이 내 평생의 가치이자 업이었다. 하지만
그 생생하고 입체적인 ‘생명의 신호’들을 진료 차트에 온전하게
기록하기란 늘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기존의 현대 한글 표기법으로는 눈앞의 소중한 생명이 내는
원초적인 소리마저 몇 가지 제한된 틀 안에 억지로 가두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가나다라>는 내 마음속에 웅크려 있던 오랜 의문들을 따스하게 감싸 안으며 명쾌하게 풀어내 주었다. 저자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이 단순히 우리말만을 겨우 적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세상 모든 소리를 받아 적기 위해 설계된 거대한 ‘음성학적 체계’였음을 명쾌하게 증명해 낸다. 책 속에 인용된 ‘어디를 가더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 닭
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적을 수 있다’라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문장을 마주한 순간, 내 진료실을 거쳐 간 수많은 동물들의 날카로운 파열음과 탁한 공명음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세상에서 소외된 자연의 작은 소리마저 따뜻하게 품어내고자 했던 훈민정음의 본래 창제 목적이, 바로 내가 청진기를 대고 생명의 숨소리 하나조차 놓치지 않으려 애썼던 치열한 마음과 완벽하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글자들이 자취를
감춘 것은 문자 자체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쓰기를 멈췄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내가 누려온 언어적 특권을 되돌아보게 하며 지적 호기심과 민족적 자긍심을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사라진 네 글자의 원리를 다시금 깨우는 순간, 진료실 동물의 거친
숨소리뿐만 아니라 평소 영어의 [f]와 [p], [v]와 [b]처럼 우리 현대인들이 늘 구별하기 어려워하던 외국어의 미세한 음성적 장벽까지 명쾌하게 분별할 수 있는 거대한
언어적 무기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우리 손에 쥐여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자의 친절한
안내를 따라 한글이 본래 지니고 있던 무한한 확장성과 포용력을 알아갈수록, 온몸에 기분 좋은 소름이
돋는 듯한 전율과 함께 고유한 문자를 가진 민족으로서 깊은 자긍심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겁게 차 올랐다.
오십 대 중반을 넘어서며 지나온 삶을 가만히 돌아볼 때, 내가 이 아름다운 땅에 태어나 우리 문자를 마음껏 쓰고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거대하고 위대한
축복인지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한글은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를 넘어,
인간과 자연이 상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소리의 한계를 무한대로 넓혀주는 세상 최고의 과학적 유산임이 틀림없다. 세계적인 K-콘텐츠의 폭발적인 확산 속에서 한글이 이제 서양의 'Alphabet'처럼, 세계인에게 'Ganadara'라는 고유한 독립 문자 체계의 이름으로 당당히 우뚝 설 것이라는 저자의 담대한 비전은 한글의
위대함을 다시금 인지하게 만들며, 매일 마주하던 언어의 풍경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은 경이로운 깨달음이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 했던 세종대왕의 따뜻한 애민 정신과,
이를 현대적 외국어 교육과 언어 확장성으로 치열하게 고증해 낸 저자의 학문적 통찰에 진심 어린 깊은 감사를 보낸다.
오늘도 나는 청진기를 챙겨 들고 생명들이 기다리는 진료실로 향한다. 이제 내 차트에는 과거의 박제된 글자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우주의
모든 소리가 한글의 위대한 날개를 달고 더욱 생생하고 정확하게 기록될 것이다. 이 책은 한글의 역사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싶은 대중은 물론, 글로벌 시대에 완벽한 외국어 발음법을 터득하고자 하는 학습자들에게
추천한다. 사라진 옛글자의 표기 원리를 통해 한글 무한한 확장성을 배우는 동시에, 우리 문자가 세계 무대의 중심에 당당히 설 수 있다는 문화적 자긍심과 주권 의식을 확고하게 얻게 될 것이다.
이 리뷰는 리앤프리서평단 자격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