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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의 별, 서쪽의 불꽃 - 검 손잡이에 새겨진 단어
Dr. 보라짱 지음 / 보민출판사 / 2026년 9월
평점 :
반백 년을 살아가다 보니 문득 내가 걸어온 길은 어땠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치열했던 젊은 날의 열정은 어느새 희끗해진 머리칼 사이로 숨어들었고, 남들보다 앞서가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기억들은 빛바랜 사진처럼 아련하다.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을 들여다보는 것을 오랜 취미로 삼아온 나에게, 시간은 늘 냉정하고 준엄한 심판관이었다. 그 거대한 연대기 속에서 평범한 개인의 삶이란 그저 한 줌의 모래알에 불과해 보였다. Dr.보라짱의 장편 소설 <동쪽의 별, 서쪽의 불꽃>은 역사라는 단단한 대지 위에 상상력이라는 숨결을
불어넣으며 나의 고정관념을 흔들어 놓았다.
이야기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마주했을 법한 유물, 바로 '경주 계림로 황금보검'에서
출발한다. 신라 무덤에서 출토되었으나 확연히 서역의 양식을 띠고 있는 이 이국적인 단검과, 페르시아 왕자의 동방 망명기를 담은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가 더해지면서 소설은 1,500년 전 서역과 신라를 잇는 거대한
대서사로 태어난다. 이야기는 이슬람 세력의 침공으로 고국이 멸망하는 비극적 사건에서 촉발된다. 나라를 잃고 머나먼 신라로 망명해 온 페르시아의 왕자와 저마다의 결핍과 상처를 지닌 채 이방인을 맞이한 신라의
젊은 전사들이 이 대여정의 주인공들이다.
소설은 이들의 만남을 시작으로 촘촘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서역의 세공 기술과 신라의 정신이 결합하여 황금보검이 탄생하는 사건은 국경을 초월한 인물들의 운명적 연대이자
뜨거운 약속의 증표였다. 특히 검 손잡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1,500년간 아무도 읽지 못했다는 서역 문자의 ‘비밀스러운 한 단어’를 추적하는 미스터리 구조는 이야기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인물들은
사막의 거친 전쟁과 험난한 모험 속에서 다양한 사건들과 마주하며 두려움과 배신, 깊은 죄책감을 겪는다. 영웅적 승리에 집착하기보다 시련 속에서 상처 입은 인물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치유해 나가는 구원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된다.
인물들이 저마다 '돌아온
자리를 찾아가는 결말'의 순간이 감동적이다. 왕좌를 둘러싼
음모와 전쟁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뒤 인물들의 내면적 귀착지를 조명한다. 고국을 잃고 영원한 이방인으로
방황하던 페르시아의 왕자는 복수와 재건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신을 품어준 신라 땅과 동료들의 신의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영혼의 고향을 발견한다. 신라의 전사들 역시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거치며 스스로의
나약함과 상처를 마주하지만, 단검에 새겨진 약속을 지켜내는 과정을 통해 파괴된 일상을 회복하고 본연의
자리를 되찾는다. 이들의 '돌아옴'은 단순한 공간적 복귀가 아니라, 깊은 방황 끝에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삶의 의미를 재확립하는 정신적 구원이다. 특히 가슴 깊이 남은 ‘늦게 출발한 사람도 결국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는 말은 청춘의
불꽃을 지나 은은한 황혼의 초입에 들어선 50대의 가슴을 뜨겁게 적셨다. 세상은 늘 빠른 것에만 가치를 부여하지만, 역사는 거대한 물줄기도
결국 수많은 굽이를 돌고 돌아서야 바다에 이른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금 늦었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끝내 자신만의 소중한 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격려는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이 서사는 나처럼 인생의 깊이를 관조하는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사막을 건너며 방황하는 젊은 세대 모두에게 따스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역사 소설이라는 픽션의 창을 통해 딱딱한 유물 뒤에 숨겨진 인간의 뜨거운 숨결과 시대적 고뇌를 생생하게 배우며, 나아가 시공간을 초월한 인간적 이해와 공감, 그리고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갈 단단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리뷰는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자격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