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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을 읽은 척할 수 있는 책
사라시나 이사오 지음, 이진원 옮김 / 까치 / 2026년 8월
평점 :
모두가 잠든 깊은 밤, 붉은
응급실 불빛 아래서 숨을 헐떡이는 반려견과 반려묘들의 눈을 바라보며 사투를 벌인다. 주말 야간당직 수의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가장 치열한 생명의 전선을 지키는 일이다. 긴박한 응급 처치가
끝나고 잠시 숨을 돌리는 새벽녘, 동물의 생로병사를 돌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생물학의 뿌리라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궁금하지만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 외웠던 ‘자연선택’이나 ‘핀치새 부리’ 같은
파편적인 기억으로만 남았고, 600페이지가 넘는 벽돌 책을 읽어볼 엄두는 내지 못했던 것이다. <종의 기원을 읽은 척할 수 있는 책>은 <종의 기원>에 대한 명쾌한 답으로 최고였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쓴 진짜 목적은 생물학의 모든 복잡한 수수께끼를 단 하나의 단순한 이론으로 설명하는 통일 이론을 구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윈이 책의 전반부에서 사육 동물과 품종
개량 이야기를 지루할 정도로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인간이 목적을 갖고 형질을 솎아내는 ‘인위선택’을 징검다리 삼아, 대자연 역시 환경에 적응한 개체만을 남기는 단
하나의 원리인 ‘자연선택’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주말 야간당직을 서며 조우하는 수많은 품종견들의 유전적 다양성과 특이 질환들이 다윈의 품종 개량 논리와 겹쳐
보이며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과연 <종의 기원>은 종교를 부정하는 차가운 ‘과학’인가, 아니면 새로운 신의 섭리를 증명하는 ‘신학’인가? 저자가 요약해
준 다윈의 진짜 속내는 흥미롭게도 그 중간 어디쯤에 있었다. 다윈은 신이 지구상의 수백만 종을 일일이
빚어냈다는 문자 그대로의 신학을 반박했지만, 신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능한 창조주라면 생명체 하나하나를 번거롭게 직접 만들기보다, ‘자연선택’이라는 단 하나의 위대한 법칙을 세워 생물이 환경에 맞춰 스스로 변형되도록 설계했을 것이라 주장했다. 즉, 다윈에게 진화론은 신의 설계를 정교한 과학의 언어로 번역해
낸 일종의 ‘새로운 신학’이었던 셈이다.
저자는 이 거대한 과학적, 신학적
가설을 현대 멘델 유전학과 게놈(DNA) 데이터로 완벽하게 보완하며,
고전이 어떻게 현재진행형으로 살아 숨 쉬는 지성이 되었는지 보여준다. ‘이 행성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도는 동안, 생명은 그토록 단순한 시작으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운 형태로 끝없이 진화해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종의 기원>의 이 최고의 한 문장이 주는 전율은 대단했다. 인간보다 수만
배 뛰어난 개나 고양이의 감각은 누군가 급조해 낸 열등하거나 우월한 피조물이 아니다.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 출발해, 대자연이 허락한 법칙 안에서 스스로 아름답게 적응해 낸 경이로운 진화의 증거들이다.
<종의 기원>이라는 고전 읽기에 도전할 용기와 시간을 내지 못했던 바쁜 현대인들과 생명의 가치를 깊이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단시간에 진화론의 핵심 논리를 완벽히 마스터하는 지적 교양을 얻을 수 있고, 현대 과학으로 살아 숨 쉬는 고전의 가치와 생명을 향한 깊은 경외감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다윈이 꿈꾸었던 위대한 법칙 속에서 내 손을 거쳐 가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향한 깊은 겸손함을 다시금 배울
수 있었다.
이 리뷰는 리앤프리서평단 자격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