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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의 후더닛
아사네 주지 지음, 김은모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6년 8월
평점 :
내 나이 쉰다섯. 남들은
은퇴를 고민하고 삶의 속도를 줄여갈 시기에 나는 바이오 스타트업의 품질관리(QC) 팀장으로 매일 치열한
하루를 보낸다. 마이크로리터 단위의 세포를 다루고, 완벽한
멸균 상태를 확인하며, 단 0.1%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내 직업이자 삶의 전부였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늘 건조하고 정형화되어 있었다. 문학이란 그저 젊은 날의 사치 같았고, 특히나 미스터리 같은 장르
소설은 내 인생의 타임라인에 존재하지 않던 영역이었다. 솔직히 말해 자극적인 살인 사건을 다루는 가벼운
오락거리라고만 치부했던 오만과 편견이 있었다. 그랬던 내가 퇴근 후 거실에서 스마트폰을 집어 던지고
두꺼운 소설책을 붙잡은 채 눈을 빛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천 년의 후더닛>은 완벽한 규격과 수치만을 쫓던 내 메마른 삶에 불시착한 기분 좋은 충격이자, 굳어 있던 뇌세포를 깨운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바이오 분야에 평생 몸담아온 내게,
인류 최초의 냉동수면(콜드슬립) 실험에 참여한 7명의 자원자라는 설정은 시작부터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세포의 대사를
완전히 멈추고 천 년의 시간을 손상 없이 보존한다는 것. 외부 침입이 절대 불가능한 방주이자 가장 이상적인
관리가 이루어져야 할 그 지하 쉘터 안에서, 천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장치가 열린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눈을 뜬 사람은 6명뿐, 미래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실험을 주도했던 ‘시몬’은 냉동수면 장치 안에서 차가운 사체로 발견된다. 모두가 천 년 동안
완벽하게 잠들어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진 상황. 범인은 함께 깨어난 6명의 생존자 중 한 명일 수밖에 없다는 모순된 의심 앞에서 내 안의 조사자 본능이 무섭게 발동했다. 시스템의 어느 프로세스에서 오류가 발생한 것인가? 내가 매일 수행하는
원인 분석(Root Cause Analysis) 과정이 이야기와 겹친다.
사건의 중심에 선 인물들의 면면은 통제되지 않는 변수들이었다. 아내를 잃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방관자처럼 굴던 주인공 ‘쿠란’이 탐정이 되어 사건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은 흥미롭다. 특히 장치의
하드웨어를 설계한 ‘카이’와 시스템 프로그래밍을 담당한 ‘이리야’가 장치 내부 로그를 분석하며 153년 전이라는 범행 시점과 결함을 두고 공방을 벌일 때의 긴장감은 숨을 막히게 한다. 여기에 순수한 열정의 생물학자 ‘시나’와 이타적인 ‘크로에’, 그리고
지원 동기를 끝까지 숨기며 불신을 조장하는 ‘마르코’가 용의선상에서
격돌할 때 쉘터는 거대한 인간성의 시험대로 변한다. 이성적 데이터와 숨겨진 인간의 욕망이 격돌하며 '누가 범인인가(Who done it)'를 넘어 단서가 파묻힌 시간
속에서 기어이 '언제' 살인이 일어났는지 추적해 나가는 논리는
실로 정교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 이토록 격렬하게 매료된 진짜 이유는 화려한
트릭이 아니다. 바로 ‘시간이라는 가혹한 밀실이 주는 고독과
상실감’이라는 주제와 메시지 때문이다. 천 년 뒤 깨어난
이들이 마주한 것은 찬란한 미래가 아니라, 소중한 이들이 모두 먼지가 되어 사라진 거대한 상실의 공간이었다. 이 지독한 밀실을 통해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타인과의 연결을 잃어버린 인간은 어떻게 자신을 증명하는가’라는 심오한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50대 중반을 지나며 사별과 이별, 지나간
세월에 대한 회한을 조금씩 경험하고 알아가는 나이여서일까. 범인을 찾아내려는 처절한 논쟁이 내게는 사라진
과거와 연결되기 위한 인간의 집착으로 읽혔다. ‘어떤 시대든 남겨진 자들은 마음속에 저마다의 후더닛을
품고 살아간다’는 말을 읽었을 때 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이 책은 나에게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인간의 깊은 본성과 논리, 그리고 보편적인 슬픔을 담아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그릇’임을 똑똑히 알려주었다. 언제나 정답이 정해진 데이터만 바라보던 직장인의
가슴에, 이 소설은 기분 좋은 긴장과 설렘을 선물했다. 나는
아마도 이 책에서 경험한 미스터리의 매력에 빠지는 기쁨으로 가득 채워질 것 같다.
이 리뷰는 몽실서평단 자격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