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보이지 않는 균과의 전쟁을 치른다. 바이오 스타트업의 품질관리(QC) 팀장으로 살아온 지 수년째, 나의 일과는 철저한 데이터 확인과 프로토콜 준수로 시작해 완벽한 오염 통제로 끝난다.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냉철하고 엄격한 이성, 그것이 내가
믿어온 유일한 진리였다. ‘중세’는 과학이 지워진 야만의
암흑기이자 십자군의 광기, 거친 기사들의 시대일 뿐이었다.
<최소한의 중세
수업>은 내 선입견을 보기 좋게 무너뜨렸다. ‘중세는
암흑기도, 정체기도 아니며 현대 유럽 문명의 기초를 다진 역동적인 시대’라는 말로 나의 오만을 지적했다. 지루한 연도 나열 대신 시간과 공간, 기사와 귀족, 종교적 심성, 이단과
십자군이라는 네 가지 주제로 중세인의 생생한 세계관을 보여주었다. 복잡한 바이오 데이터의 원인을 추적하듯, 저자는 당시 사람들의 심리를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게 분석해 나간다.
가장 신선했던 충격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해석이었다. 초 단위로 쪼개진 효율성의 시간을
살며 성과를 쥐어짜 내는 현대와 달리, 중세의 시간은 ‘신의
계획’ 속에 있었다. 시계도 없이 교회의 종소리에 맞춰 흐르던
그들의 삶,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공간 개념을 보며, 효율에
매몰되어 삶의 본질을 잃어버린 우리 시대의 민 낯이 드러났다. 통제와 규격화만이 정답이라 믿었던 내
오만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전사로만 치부했던 기사들을 ‘말을
탄 아이돌’로 재해석한 부분이다. 거친 무력 집단이 엄격한
기사도라는 규율을 장착하고 역사적 무대의 전면으로 올라서는 과정은 흥미롭다. 대중의 환호를 받는 선망의
대상이 된 그들이 예법(프로토콜)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업그레이드'를 이뤄내는 모습은, 거친 미생물 샘플을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통해 안전한 바이오 제품으로 탄생시키는 나의 업무와 묘하게 겹쳐지는
듯하다.
그렇게 정제된 기사들의 명예 규율과 '종교적 심성'이라는 렌즈로 바라본 중세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광기와 야만이라 치부했던 '이단과 십자군'의 역사는 단순한 폭력이 아닌, 사후 세계에 대한 공포와 천국을 향한
열망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중세인들에게 구원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가장 구체적인
실체였다’는 중요 말처럼, 신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과 종교재판은
역설적이게도 사회의 순도를 유지하기 위해 오염을 걸러내려 했던 그들 나름의 엄격한 ‘생존 프로토콜’이었던 셈이다.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은
결국 현재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을 보는 일’이라는 말은 큰 파동으로 일으켰다. 중세인들이 치열하게 고민했던 인간의 조건과 삶의 궤적은, 과학기술의
정점을 달리는 21세기 현대인들이 마주한 고뇌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완벽한 규격만을 쫓으며 숨 가쁘게 달려온 지금, 이 문장들은 내게
깊은 위로와 함께 시야의 넓혀주었다.
품질관리의 기본은 편견 없이 샘플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야만의 시대라는 중세에 대한 오랜 편견을 깨고 당대인들의 생동감 넘치는 심성과 역동적인 세계관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현대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로서 인간의 본질과 내 삶의 궤적을 차분히 되돌아보는
안목을 얻었다.
이 리뷰는 리앤프리서평단 자격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