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필사북 - 이동진 평론가 추천!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역사, 건
김승옥 지음 / 스타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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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백 번 읽는 것은 손으로 한 번 적는 것보다 못하다

글이란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는 것보다 손으로 직접 한 번 써보는 것이 백배 낫다

 

독서가 타인의 세계를 눈으로 여행하는 일이라면, 필사는 그 세계의 흙을 손으로 직접 만지며 내 안에 정원을 가꾸는 일이다.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는 디지털 시대에 연필을 쥐고 글을 꾹꾹 눌러쓰는 행위는 미련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무진기행 필사북》을 펼치고 첫 문장을 적어 내려가는 순간, 그 미련함은 가장 우아한 정신적 사치이자 깊은 성찰의 도구로 탈바꿈한다. 생애 첫 필사북으로 만난 이 책은 눈으로 읽을 때는 미처 몰랐던 값진 선물을 내게 남겨주었다.

한국어 문장의 정수를 온몸으로 체득하는 감각의 확장이다. <무진기행>은 한국 현대문학에서 현대어의 감각을 깨운 독보적인 명작으로 꼽힌다. 눈으로 흘려 읽을 때는 보이지 않던 거장의 섬세한 단어 선택과 입체적인 비유가 손끝을 거치며 비로소 살아 숨 쉬기 시작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안개다.’로 시작하는 도입부를 쓸 때, 내 방 안에도 눅눅한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시각과 촉각을 자극하는 문장들을 받아 적다 보니, 메말라 있던 나의 감수성과 문장력이 비약적으로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지친 일상에 평온을 선물하는 '문학적 명상'의 시간이다. 필사는 나에게 강제된 느림을 요구했다. 눈은 벌써 저만치 앞선 단어를 좇지만, 손은 이제야 한 문장을 겨우 채워 나간다. 이 기분 좋은 답답함에 익숙해지자 묘한 해방감이 찾아왔다. 스마트폰 알림과 쉴 틈 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오직 종이의 질감과 연필의 서각거리는 소리에만 집중하는 시간은 강력한 뇌 휴식이 되어주었다. 글씨를 쓰는 동안 잡념이 사라지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치유의 경험이었다.

부끄러움을 마주하는 지독한 자기 성찰이다. 소설 속 주인공 윤희중은 성공을 약속하는 서울의 현실과, 순수하지만 어두웠던 과거의 무진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의 번민과 고독,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마주한 지독한 '부끄러움'을 내 손으로 직접 받아 적는 과정은 거울을 보는 것과 같았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가?’, ‘내가 외면하고 있는 삶의 속물성은 무엇인가?’처럼, 소설의 문장들은 끊임없이 나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책'이라는 성취감이 남는다. 내 글씨와 흔적, 시간과 호흡으로 책 한 권을 가득 채웠을 때의 뿌듯함은 큰 감동으로 남는다. 거장의 문장력을 빌려 나를 정리하고 싶은 이들에게, 무진의 안개 속으로 필사의 여행을 추천하고 싶다. 바쁜 일상 속에서 나만의 온전한 속도를 되찾고 깊은 문학적 위로를 경험하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손끝으로 마주하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이 리뷰는 리뷰의숲 서평단 자격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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