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과 전쟁 - 무기화된 화학 이야기
앨리스 러브조이 지음, 윤종은 옮김 / 소소의책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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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넘어선 나에게 '코닥(Kodak)'은 단순한 브랜드 그 이상이다. 청춘 시절, 월급을 모아 처음 샀던 손때 묻은 필름 카메라는 인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들을 인화해 준 삶의 동반자였다. 필름 한 롤을 아껴 가며 셔터를 누르던 그때 그 필름 카메라의 향수는 지금도 가슴 한구석을 따뜻하게 덥혀준다. 최근 주말이면 노란색 로고의 코닥 의류를 가족들과 패밀리 룩으로 맞춰 입고 외출하곤 하는데, 나의 추억이 요즘 세대에게도 '힙한 문화'로 소비되는 것 같아 묘한 뿌듯함도 느꼈다. 하지만 앨리스 러브조이의 <필름과 전쟁>을 읽고 난 지금, 내가 평생 품어온 그 노란 상자의 낭만 뒤에 얼마나 어두운 그림자가 숨겨져 있었는지 직시하게 되었다. 추억의 대명사가 사실상 국가 권력과 결탁해 전쟁을 지원한 거대 군수, 화학 기업이었다는 사실은 가치관을 흔들 만큼 지독한 배신감을 안겼다.

바이오 의약품 스타트업에서 평생 물질의 정제 과정을 모니터링하고 가이드라인에 따른 엄격한 품질관리를 책임져온 나에게, 저자의 시선은 대단히 큰 충격이었다. 이 책은 코닥 필름을 아름다운 추억의 기록 매체가 아니라, 독가스나 폭약과 완벽히 호환되는 '화학 물질'로 철저히 환원하여 분석한다. 필름의 주원료인 나이트로셀룰로스가 전황에 따라 언제든 살상용 군수물자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일 실험실에서 화합물의 독성과 순도를 추적하는 내 직업적 감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기업이 가진 기술과 원재료가 시대의 광기와 결합했을 때, 인류를 향한 칼날로 얼마나 쉽게 돌변할 수 있는지 목격했기 때문이다. "약과 독의 차이는 물질의 차이가 아니라 그 양의 차이이다"라는 독성학의 명언처럼, 평화로운 일상의 도구가 순식간에 살상 무기로 전용될 수 있다는 '이중용도성(Dual-Use)'의 위험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특히 코닥이 인류 최악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심 파트너였다는 대목에서는 온몸에 전기가 감전된 듯한 전율이 일었다. 코닥은 필름 에멀션을 제조하며 쌓아온 독보적인 화합물 분리 및 정제 노하우를 활용해 군사용 우라늄을 추출하는 공정을 도왔다. 그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바이오 업계에서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불순물을 1ppm 단위까지 걸러내던 바로 그 고도의 '정제 기술', 인류를 파멸로 이끌 핵연료를 가장 순도 높게 뽑아내는 데 쓰인 것이다. '내가 평생 다루던 정제 기술이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잔인한 아이러니였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처럼 차라리 몰랐다면 편했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고 나니, 살상 무기로 전환이 가능한 물질과 기술에 대해 국가 간 엄격한 조약을 맺고 철저히 감시, 관리, 감독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책임감을 절실히 인지하게 되었다. 물질과 기술의 선함은 결코 자율성에만 맡겨둘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품질관리 책임자로서 가장 크게 분노한 내용은 '노란 상자의 은폐' 사건이다. 1951년 미국 정부의 핵실험 직후 대기 중 방사능 낙진이 쏟아졌을 때, 민감한 감광 재료를 다루던 코닥은 필름의 검은 반점을 통해 오염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챘지만, 그들은 침묵을 택했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 정부와 결탁하여 치명적인 데이터를 은폐한 것이다. 나아가 1988년 유해 화학 용매를 유출하고도 우리는 화학 기업이 아니라 노란 필름 상자를 만들 뿐이라던 대변인의 기만은, 감성 브랜딩 뒤에 숨은 기업들의 도덕적 해이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다.

코닥이 '노란 상자'라는 감성적인 포장 뒤로 방사능 낙진과 데이터 은폐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숨겼던 과오는, 오늘날 우리 바이오 벤처가 데이터 무결성(Data Integrity)을 잃었을 때 마주할 파멸의 미래를 강력하게 경고한다. 숫자를 조작하고 데이터를 숨기는 순간, 기업은 코닥이 걸었던 위선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필름과 전쟁>은 이윤보다 생명과 정직함을 담보하는 품질관리가 왜 기업의 가장 강력한 브레이크이자 존재 이유여야 하는지, 나에게 가장 무겁고도 엄중한 숙제를 남겼다. 기술은 투명해야 하고, 데이터는 결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 리뷰는 리앤프리서평단 자격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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