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고, 친애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1
백수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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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살 대학생인 "나"는 전공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학사경고를 받고 진로를 바꿔야겠다 싶어서 휴학을 해버리곤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지내고 있다. 그 시기에 엄마가 전화해 나에게 할 일이 없으니 혼자 계시는 할머니께 가서 얼마간 돌봐드리라고 한다. 엄마가 나를 유배 보내는 것 같아 괜히 발끈했지만, 할머니를 사랑하고 함께 있는 게 좋았기 때문에 서울에서 멀지 않은 할머니네 집에 가서 지내게 된다.

 

하지만 엄마가 나에게 말하지 않은 한 가지 사실은 할머니의 폐가 암에 점령당해 수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모두에게 숨기길 바랐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여름인데도 기침이 잦은 할머니를 걱정할 뿐이었다.

 

할머니네 집에서 지내는 하루하루는 평온하고 좋았는데, 때로 주말이면 엄마도 와서 함께 자고 가곤 했다. 딸인 자신뿐만 아니라 엄마인 할머니에게도 살갑지 않았던 나의 엄마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제는 엄마가 된 "나" 인아가 딸이기만 했을 때의 과거를 회상하며 진행되는 소설이었다. 아직 어린 22살의 인아가 일에만 매달리느라 살림은 물론 자신에게도 다정하지 않았던 엄마를 되돌아보고, 엄마 대신 키워준 할머니에 대한 애정과 그녀의 굴곡진 삶에 대해 말했다.

 

엄마는 딸을 낳자마자 유학을 가버렸을 정도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확실했던 사람이었다. 유학 생활 중에도 떼어놓고 온 딸에 대한 그리움보다 동양 여자로 차별당했던 것을 먼저 떠올렸다. 지금은 대학교수로 일하면서 주 중에는 학교 근처 오피스텔에서 생활할 만큼 엄마에겐 가정보다 일이 더 중요한 듯 보였다.

처음엔 인아의 시점으로 그런 엄마를 보여줬을 때, 조금 너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할머니의 사정이 등장하면서는 엄마가 왜 그렇게 살아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황해도 부잣집에서 8남매 중 유일한 딸로 태어난 할머니는 가난한 집 맏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할아버지는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 말에 따라 원하지도 않았던 교사가 됐다. 여자가 공부를 할 수 있던 때가 아닌 시기에 교사 남편과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란 엄마였기에 어떻게든 공부를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인아는 잘난 엄마에 비해 뭐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위축되어 엄마와의 관계가 서먹했고,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 역시 소원했다. 인아의 엄마는 아버지에게 맞는 엄마를 보고 자랐고, 다른 엄마들처럼 많이 배우지 못했던 엄마가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 사실들보다 결정적인 이유처럼 보이던 한 마디의 말이 내게도 비수가 되었기에 엄마는 할머니에게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마치 존재를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그 상처에 할머니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는 의지가 더해져 많이 공부하고 멀리 유학까지 가지만, 어쩐 일인지 모녀의 삶의 한구석은 겹치는 지점이 있었고 그때서야 엄마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어색함의 골이 깊어졌어도 엄마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엄마를 위해서 노력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인아와 엄마 사이의 거리감 역시 오랜 시간이 된 지금에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딸이 엄마가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굳이 엄마가 되지 않아도 지금 내 나이쯤에 엄마는 어떻게 살고 나를 키웠는지를 생각해보면 자연스레 안타까움과 슬픔이 밀려온다.

그런데 이제는 관계가 바뀌어 내가 엄마를 챙겨야 할 부분이 많아졌다는 것을 떠올리면 가끔 느끼게 되는 답답한 이 낯선 감정이 참 묘하다. 언제 이렇게 바뀌어버렸을까 싶은 생각에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든다.

 

나는 아기 때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소설 속 인아처럼 사랑을 듬뿍 받은 기억은 없지만, 외할머니가 예뻐했다고 엄마가 들려줬던 이야기와 갓난쟁이인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책을 읽는 동안 떠올랐다. 그리고 자연스레 엄마가 가지고 있을 할머니에 대한 감정도 그려보게 됐다.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는 같은 여자로, 가족으로 살지만 때로는 타인보다 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날들이 있기 마련인 모녀 관계를 보여줬다. 그럼에도 결국엔 이해하고 말하지 않아도 깊이 사랑하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너무나 잘 표현한 소설이었다.

엄마가 웃고 있어서, 어쩌면 엄마 역시 나와 함께 식탁맡에 앉아 있는 이 시간을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엄마 나름의 다정함을 표현하는 서툰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엄마 역시 나와 이렇게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지도.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랐다. - P73.74

"엄마, 엄마도요, 내가 생겼을 때, 이런 마음이었어요?"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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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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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주호프 백작의 사생아 피에르는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아버지 쪽 친척 관계인 바실리 공작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 그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안나 파블로브나가 운영하는 귀족 살롱의 야회에 처음으로 참석하게 된다. 유학 생활을 오래 한 피에르는 귀족 사회에 대해 잘 모르는 탓인지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그가 하는 말은 때로 폭탄이 되기도 한다. 거기다 사생아라는 소문이 파다했기에 그를 제대로 대접해주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러다 베주호프 노백작이 임종에 가까워지면서 마지막으로 작성한 유언장에 피에르에게 유산을 몽땅 물려준다고 적혀있다는 걸 알게 된 바실리 공작과 피에르의 사촌인 카티시가 유언장을 빼돌리려고 한다. 마침 그 사실을 눈치챈 안나 미하일로브나 공작 부인의 재빠른 행동으로 그 일은 무마되고 피에르는 사생아에서 정식 아들로 인정받아 모든 유산을 상속받는다.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은 친구 피에르와 단둘이 있을 때 절대로 결혼하지 말라는 말을 한다. 그리곤 안드레이는 임신한 아내를 아버지와 여동생이 사는 시골집에 맡겨두고 몇 번째인지 모를 전쟁터로 떠난다.

바실리 공작에게 아들을 근위대에 넣어달라고 부탁한 어머니 안나 미하일로브나 덕분에 보리스 역시 전쟁터로 떠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니콜라이 로스토프 백작 역시 참전하게 된다.

 

 

 

읽겠다고 메모해놓은 <전쟁과 평화>를 드디어 읽기 시작했다.

한국 소설보다는 외국 소설을 더 많이 읽는 편이고, 가끔씩 고전도 읽긴 하지만 러시아 문학과는 정말 안 친하다. 책에 관심을 갖고 독서를 취미로 삼은지 15년은 된 것 같은데 단 두 권의 러시아 문학만 읽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 <지하로부터의 수기>이다.

 

왜 러시아 문학을 가까이할 수 없었는지는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새삼 알 수 있었다. 이름에서 오는 어마어마한 장벽 탓이었다. 이름이 길고 발음하기 어려운데 부칭과 서너 가지 정도 되는 애칭까지 있어서 한 사람을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이고, 등장인물의 이름이 겹치다 보니 헷갈려서 소설 앞에 등장인물 소개 페이지를 뒤적이며 읽어야 했다. 거기다 이름은 두 글자인데 애칭이 네 글자까지 되어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줄여 부르는 게 애칭일 텐데 당최 왜 네 글자나...

아무튼 소설 초반을 읽으면서 이놈의 이름 때문에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10번은 넘었는데 읽다 보니 적응하게 됐다. 그리고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 집착하는 경향을 좀 내려놓으니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1권일 뿐인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등장해 저마다의 시점으로 상황을 보여주곤 했지만, 주요 인물은 피에르와 안드레이, 니콜라이, 보리스 정도인 것 같다. 안드레이를 제외하고 비슷한 연령대인 20살 안팎의, 각각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자들이었다.

 

피에르는 사생아라는 태생의 결함이 있으나 오랜 유학 생활 탓에 다소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와 한창 전쟁 중인 와중에 그를 칭송하는 말을 했으니 말이다.

귀족들은 이런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비웃기도 했으면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젊은 백작이 된 이후에는 180도 다른 행동을 보였다. 지위와 돈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게 현실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비굴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 바실리 공작이 자기 딸과 결혼시키려고 안달을 하는 모습이 어이없었다.

이런 와중에 아무것도 모르는 피에르는 찜찜한 것 같으면서도 바실리의 딸 엘렌의 아름다움에 반해 등 떠미는 대로 가게 된다. 이 젊은 백작이 얼마나 휘둘릴지 벌써부터 암울했다.

 

피에르에게 결혼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전쟁터로 향한 안드레이는 아내를 대하는 태도와는 다르게 전쟁터에서 자신이 맡은 의무에 충실했다. 성격상 결혼보다는 일에 더 잘 맞는 것 같았다. 1800년대 초를 배경으로 있고, 어느 정도 가부장적인 공작의 아들이기 때문에 안드레이는 결혼을 피할 수 없었을 터였다. 그래서 잘 안 맞는 결혼생활을 피하기 위해 국가에 충성한다는 대의를 내세워 전쟁터로 계속 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재미있던 것은 안드레이의 아버지 볼콘스키 노공작이 딸 마리야의 결혼에 대해서는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정해진 시각에 딸을 공부시키고 억압하는 모습을 보였던 그는 아버지 바실리에게 떠밀려 마리야에게 청혼을 하겠다고 찾아온, 놀고먹으며 여자를 좋아하는 아나톨을 싫어했는데, 딸에게 여자는 스스로 남편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시각이 만연한 시대에 의외의 인물이 보여준 의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좀 놀라웠다.

 

공작이지만 가난했던 보리스는 어머니가 비굴하게 청하여 근위대로 들어간 후, 출세에 대한 욕망을 드러냈다. 높은 사람의 곁에서 조금 더 중요한 일을 하기를 바랐던 보리스는 안드레이 덕분에 장군을 만나긴 하지만, 상황이 급변하여 아직까진 있던 자리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로스토프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않았다. 보리스와 친구라는 점과 안드레이가 로스토프를 싫어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리고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행동은 재빠르지 않은 걸 보면 약간 우유부단한 것 같으면서 또 어떤 사건을 보면 성격이 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의 인생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는 출세를 하기 위해, 누구는 국가를 위해, 또 다른 누구는 도망을 쳐서 전쟁터로 나갔다. 그리고 전쟁에 나가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하루아침에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어 모든 이들이 우러러보게 됐다. 인생이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

 

마지막에 안드레이가 프랑스 포로로 잡혔고, 피에르는 엘렌과 결혼을 했기 때문에 이후 두 사람이 어떻게 될지 가장 궁금하다.

 

미지와 공포라는 무시무시한 선이, 마치 산 자와 죽은 자를 나누는 듯한 선이 그들을 가르며 놓여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선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선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떻게 넘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그들을 동요하게 만들었다. - P445.446

이 결혼에는 추악하고 부자연스러운, 자신이 보기에 불순해 보이는 무언가가 있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 P491

"절대로, 절대로 결혼하지 마, 친구, 이것이 자네에게 주는 나의 충고야.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결혼하지 마. 자네가 고른 여성에 대한 사랑이 식을 때까지, 그 여자를 분명히 알게 될 때까지 결혼하지 마. 그러지 않으면 끔찍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될 거야." - P74

안드레이 공작은 위대함의 보잘것없음에 대해, 아무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던 생의 보잘것없음에 대해, 산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었던 죽음의 한층 더 보잘것없음에 대해 생각했다. - P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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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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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7년째 됐을 때, 앨리샤는 남편 가브리엘을 총으로 쏴 죽였다. 총성을 들은 이웃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현장에서 본 것은 거실 의자에 손목과 발목이 묶인 채 얼굴에 여러 발의 총을 맞아 엉망이 된 가브리엘이었다. 그리고 앨리샤는 양 손목에 난 깊은 상처로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그녀를 살리려는 경찰에게 격한 저항을 했지만 살아남았고, 그 후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정신질환 범죄자 감호 병원 그로브에서 지내게 된 앨리샤는 6년의 시간이 흘러도 입을 열지 않는다.

 

앨리샤의 사건에 처음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범죄 심리상담가 테오는 그로브에 공석이 나서 지원을 하고 그곳으로 옮겨 일을 시작한다. 책임자 디오메디스의 동의하에 앨리샤와 상담을 시작한 그는 말은 물론 반응도 전혀 없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며 어떻게든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애를 쓴다.

 

 

 

 

 

 

 

남편을 죽인 게 분명한 사건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나 그 어떤 자기변명도 하지 않고 입을 닫아버린 앨리샤였다. 대신 그녀는 화가답게 그림을 하나 그렸는데 제목이 그리스 신화의 "알케스티스"였다. 남편 아드메토스 대신 죽은 알케스티스를 헤라클레스가 살려냈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인용되어 있었다. 이야기는 들어봤으나 이름을 몰랐었는데, 알케스티스가 앨리샤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결말에 밝혀졌다.

 

몇 년이 지나도 입을 열지 않는 앨리샤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꺼졌지만, 테오는 그녀와 상담을 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로브로 옮기게 된 후에 상담을 시작하지만, 앨리샤는 약 기운 때문에 멍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담당 의사 크리스티안에게 약을 줄여달라 부탁을 했고, 그 후의 상담에서 앨리샤는 테오의 목을 졸랐다. 그래도 테오는 앨리샤를 포기하지 않으며 그녀의 변호사이자 남편 가브리엘의 형 맥스, 그림 관련 대리인이자 친구인 장 펠릭스, 사촌 폴 등을 만나며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편으로는 테오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상당 부분 등장했다. 아내 캐시와 관련된 것과 심리상담가임에도 마리화나를 몰래 피운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에게 학대당한 어린 시절에 대한 내용이었다.

 

사건과 깊이 관련 있는 앨리샤가 말을 하지 않아서 사건 발생 전에 쓴 그녀의 일기가 중간중간 등장했다. 앨리샤가 부모와 관련하여 겪은 끔찍한 사건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때가 있었고, 사건 직전에는 누가 집을 염탐하고 있다는 말 때문에 정신과 의사를 만나게 되기도 해서 앨리샤의 경험이나 생각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앨리샤는 그렇다 쳐도 테오조차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리화나를 피운 테오가 목격하거나 행동하는 것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지 아니면 환각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내용에는 당연히 반전이 있었는데, 사실 어느 정도 눈치는 챘었다. 소설이 중반을 넘어간 후, 어떤 부분에서 저 사람이 앨리샤의 사건과 관련된 인물이 아닐까 싶었는데 적중했다. 특정 소재에 집중하면 금세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긴 했다.

그래도 입을 닫았었던 앨리샤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바뀌어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다 읽고서 생각해보니 앨리샤가 참 안타깝고 가여웠다. 부모부터 시작해서 남편과 남편의 형에다가 친척, 친구, 이웃까지 모두 그녀를 힘들게 했으니 말이다. 시점에 따라 앨리샤에 대한 평가도 각양각색이라 그녀를 나쁜 년이라고 부른 사람도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앨리샤를 가엽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인복이 참 없었다.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이 책은 역시나 영화화가 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것도 브래드 피트의 제작사인 "플랜 B"에서 말이다. 왠지 영화로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은 소설이라 기대가 된다.

 

 

 

 

우리는 스스로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이런 직업에 끌렸다. 스스로를 치료하기 위해서 심리학을 공부한다. 이런 점을 인정할 준비가 되었느냐 여부는 또 다른 문제다. - P29

그렇게 오래 약물을 복용했는데, 그렇게 많은 짓을 저지르고 참아낸 앨리샤의 파란 눈은 여름날처럼 맑고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거지? 그녀 눈에 보이는 표정은 뭐지? 뭐라고 설명해야 옳은 걸까?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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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세트 - 전3권
스티븐 킹 지음, 정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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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57년 가을.

메인 주 데리에 엄청난 비가 쏟아져 홍수가 난 어느 시기, 6살 조지는 4살 많은 형 빌이 만들어준 종이배를 가지고 밖에서 놀다 들어오기로 했다. 빌은 며칠째 앓고 있는 독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에 남아있어야 했기에 조지는 혼자 밖으로 나간다. 비가 내리는 골목에 종이배를 띄워 따라다니던 조지는 배가 갑자기 배수구로 들어가 버려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런데 배수구에서 노란 눈의 광대가 종이배를 들어 보이며 조지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얼마 후, 조지는 그것에게 한쪽 팔이 뜯겨져 사망하고 만다.

 

1985년.

데리에 다시금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폭행치사 사건으로 체포된 가해자들과 목격자는 광대를 봤다는 진술을 하지만, 경찰들은 그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가해자들의 형량이 가벼워질 것을 우려한 탓이었다.

데리에 남아 사서로 일하며 아주 오랫동안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조사하던 마이클은 고향을 떠난 친구들에게 연락해 그것이 나타났으니 다시 모일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잊고 지냈던 빌, 비벌리, 리처드, 벤, 에디, 스탠리는 전화를 받은 후 조금씩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마이클의 연락을 받고 손목을 그어 자살한 스탠리 외에 다른 친구들은 곧바로 데리로 향한다.

 

1958년 여름.

친구가 없는 벤은 동네 양아치인 헨리 일당에게 쫓겨 도망치다가 빌과 에디를 만난다. 셋의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리처드, 스탠리, 비벌리, 마이클이 차례로 모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것을 무찌르려고 한다.

 

 

 

아역과 성인을 주인공으로 한 두 편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선 뒤늦게 소설을 읽었다. 그래서인지 어떤 캐릭터가 등장할 때마다 자연스레 배우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읽었는데, 소설에 묘사된 성인은 배우들의 이미지와 달라 그러지 못했다.(빌이 대머리라니...)

 

조지의 사건 1년 후, 모두 일곱 명의 아이들이 저마다 끔찍하지만 믿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들이 이렇게 필연적으로 모이게 된 이유를 깨닫는다. 광대를 비롯해 늑대인간, 기이한 새 등 온갖 것으로 외형을 바꿀 수 있는 "그것"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11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시대적 배경이 1958년이었으니 정보를 얻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이 아이들의 중대한 임무에 훼방을 놓는 미친 자 헨리도 있었다. "그것"보다 더 끔찍했던 게 바로 헨리였다. 미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미친 종자였다. 아버지가 그 모양이었으니 약 먹은 망아지를 통제할 길이 없었고, 나중엔 그것에 씌어 제대로 된 돌은 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어릴 때부터 성인까지 말이다.

 

아이들을 방해하는 건 그것과 그것의 조종을 받아 움직이는 헨리의 비중이 제일 높았는데, 때로는 아이들의 부모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병균이나 몸이 아픈 것에 질색하는 엄마의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온갖 약을 먹고 천식 때문에 호흡기를 늘 소지해야 했던 에디는 사실 천식이 없었다. 조지가 죽은 뒤, 빌의 집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라앉아 부모는 하나 남은 자식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빌이 분위기를 띄워보려 해도 침묵은 온 집안을 점령했다. 그리고 비벌리의 아빠는 은근슬쩍 딸을 압박하고 때로는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벗어나고 싶은 환경이었다.

무관심과 지나친 관심, 그리고 딸아이를 더러운 시선으로 보는 등 가정에서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왕따 클럽 아이들은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그들이 잊어버린 기억을 하나씩 떠올려가며 그것에 다시 맞서 이번에는 완전히 끝내기 위해 움직이지만, 그것 역시 칼을 갈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변수였다. 정신병원에 수감된 헨리를 바깥으로 나오게 하고, 비벌리의 미친 남편 톰과 빌의 아내 오드라까지 데리로 끌어들여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28년 전에 큰 피해를 입히긴 했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던 그것을 이번에야말로 물리칠 수 있었던 건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만 깊이 새겨진 우정과 간절함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트라우마로 스스로 생을 끊어낸 스탠리와 그것에게 제일 먼저 당해 병원에 실려간 마이클을 위해 남아서 힘을 합친 우정이었다. 평범한 우정을 뛰어넘는, 서로에 대한 사랑도 있었고 현재의 그들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간절함도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것의 끝없는 공격에도 포기하지 않으며 이겨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난 뒤, 다시금 망각의 길에 접어드는 게 너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서로를 향한 기억의 조각이 모두의 마음속에 조금은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 세 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각 권당 600페이지가 넘는 줄은 몰랐기 때문에 읽다가 좀 지쳐서 일부러 천천히 읽기도 했다. 뭘 보거나 읽을 때 몰입을 잘하는 편인데 푹 빠져 일주일 내내 공포소설만 읽으며 영화 속 페니와이즈를 떠올리다 보니 정신이 피폐해졌다. 앞으론 두 권 이상의 책은 좀 나눠서 읽어야겠다.

물론 소설은 재미있게 읽었다. 정교하게 설계된 공포소설이라 매력적이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외딴 숲에서 괴물을 만나 붙잡히면 잡아먹힌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다. 그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과연 괴물들이 인간을 잡아먹으며 사는 걸까? 3권 - P223

"비벌리, 친구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함께 떠다니자. 이곳에선 모두 떠다닌단다. 빌에게 조지가 안부 전해 달라고, 너무 보고 싶어 곧 찾아갈 거라고 전해 주렴. 조지가 피아노 줄을 가지고 벽장에 있다가 빌의 눈을 찔러 버리겠다고 전해 주렴……." 2권 - P26

그 아이들을 보기 위해 뒤돌아볼 필요는 없다. 이미 마음 한편으로 그들을 영원히 볼 수 있으며, 그들과 함께 영원히 살며 사랑할 수 있으니까. 그들을 위해 마음속에 가장 좋은 자리를 애써 마련할 필요도 없다. 이미 그들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얘들아, 너희를 사랑한다. 진심으로 사랑한다. 3권 - P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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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하드커버 에디션)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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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 헤이즐은 갑상선암이 폐에 전이되어 숨을 쉬기 위해서는 늘 산소 탱크를 끌고 다녀야 한다. 밖에 좀처럼 나가지 않는 헤이즐을 걱정하는 엄마가 주치의 선생님께 데려가는 바람에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 지하실에서 열리는 서포트 그룹 집회에 참석하게 된다.

주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하던 어느 날, 안암에 걸린 아이작의 친구 어거스터스가 나타난다. 누가 봐도 멋진 어거스터스는 처음 본 순간부터 노골적으로 헤이즐을 쳐다본다. 집회가 끝난 뒤, 헤이즐은 잘생긴 데다 총명하고 말도 잘하는 어거스터스에게 관심이 생기고 둘은 이내 친구가 된다.

 

헤이즐은 어거스터스의 도움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 피터 반 호텐의 메일 답장을 처음으로 받고, 그가 사는 네덜란드에 초대를 받게 된다. 아픈 아이들을 위한 소원을 쓰지 않았던 어거스터스 덕분에 헤이즐은 엄마, 그와 함께 네덜란드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더이상 어거스터스를 향한 마음을 감출 수 없게 된다.

 

 

 

헤이즐은 3년 전에 학교를 그만둔 후, 친구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지고 집에서만 있는 시간이 너무나 길어졌다. 밖에 나가려면 산소 탱크를 끌고 나가야 하는 게 번거롭기도 했고, 사람들의 시선 때문인 것도 같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룹 집회에 참석한 후로는 매주 꼬박꼬박 출석하게 됐고 덕분에 어거스터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골육종 판정을 받아 한쪽 다리를 잘라낸 뒤 의족을 끼고 다녔다. 하지만 그건 어거스터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반짝반짝 빛나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존재였다.

 

아직 10대지만 병 때문에 마음만큼은 어른이 되어버린 헤이즐과 어거스터스, 아이작이 안타까웠다.

헤이즐은 짧은 생을 사는 동안 암 때문에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게 어려워졌다. 그리고 아픈 자신의 곁에 계속 붙어있으려고 하는 엄마의 인생을 걱정하기도 했다. 혹시 자신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엄마에겐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힘이 남아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있지만 아이들이 이 정도까지 아파야 하나 싶었다.

어거스터스와 아이작은 사랑에 푹 빠져 있었다. 어거스터스는 좋아하는 헤이즐을 위해 답장을 해주지 않는 작가에게 답을 받아내 함께 여행을 갔고, 안암으로 양쪽 시력을 모두 잃게 된 아이작은 자신을 차버린 여자친구가 밉긴 해도 아직까지 사랑하는 듯했다.

 

어거스터스가 처음부터 헤이즐에게 마음이 있었는데 그녀는 은근히 피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로선 많은 생각을 하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싹둑 잘라낼 수는 없었다.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을 위해 아껴둔 소원까지 쓰며 네덜란드로 데려가 줬고, 진지한 얼굴로 마음을 담은 고백을 했다. 덕분에 둘은 연인이 되지만 비극은 느닷없이 닥쳐왔다.

 

보지는 않았지만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의 정보를 읽은 적이 있어서 대강 무슨 내용인지는 알고 있었는데, 후반의 전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 깜짝 놀랐다. 소설의 결말이 해피엔딩은 아닐 거라고,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버릴 줄은 몰랐다. 암이라는 게 얼마나 갑작스러운지, 얼마나 무서운 건지 느낄 수 있었다.

 

삶을 누리고 사랑하는 일조차 아픈 그들에겐 쉽지 않았기 때문에 안타깝고 슬펐다. 그리고 이런 마지막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테지만, 어느새 받아들이고 덤덤하게 끝을 맺는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가늠할 수도 없다.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삶이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

 

함께 있을 때 더없이 생기발랄했던 헤이즐과 어거스터스의 반짝이던 행복이 한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난 진정한 사랑을 믿는다고, 알지? 모든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자기 눈을 갖고 있을 거라든지 한 번도 아프지 않을 거라든지 그런 건 믿지 않지만,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사랑을 갖게 될 거라는 거, 그리고 최소한 그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유지될 거라는 건 믿어." - P83

사람들은 암환자들의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도 그런 용기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몇 년이나 바늘로 찔리고 칼로 찢기고 약물을 투여당하면서 어떻게든 버텨 왔으니까.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그런 순간마다 나는 매우, 대단히 기쁘게 죽어버리고 싶었다. - P114

내가 죽어도 그가 괜찮을지 알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 끔찍한 타격을 주는 수류탄이 되고 싶지 않았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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