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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고, 친애하는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1
백수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2월
평점 :
22살 대학생인 "나"는 전공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학사경고를 받고 진로를 바꿔야겠다 싶어서 휴학을 해버리곤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지내고 있다. 그 시기에 엄마가 전화해 나에게 할 일이 없으니 혼자 계시는 할머니께 가서 얼마간 돌봐드리라고 한다. 엄마가 나를 유배 보내는 것 같아 괜히 발끈했지만, 할머니를 사랑하고 함께 있는 게 좋았기 때문에 서울에서 멀지 않은 할머니네 집에 가서 지내게 된다.
하지만 엄마가 나에게 말하지 않은 한 가지 사실은 할머니의 폐가 암에 점령당해 수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모두에게 숨기길 바랐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여름인데도 기침이 잦은 할머니를 걱정할 뿐이었다.
할머니네 집에서 지내는 하루하루는 평온하고 좋았는데, 때로 주말이면 엄마도 와서 함께 자고 가곤 했다. 딸인 자신뿐만 아니라 엄마인 할머니에게도 살갑지 않았던 나의 엄마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제는 엄마가 된 "나" 인아가 딸이기만 했을 때의 과거를 회상하며 진행되는 소설이었다. 아직 어린 22살의 인아가 일에만 매달리느라 살림은 물론 자신에게도 다정하지 않았던 엄마를 되돌아보고, 엄마 대신 키워준 할머니에 대한 애정과 그녀의 굴곡진 삶에 대해 말했다.
엄마는 딸을 낳자마자 유학을 가버렸을 정도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확실했던 사람이었다. 유학 생활 중에도 떼어놓고 온 딸에 대한 그리움보다 동양 여자로 차별당했던 것을 먼저 떠올렸다. 지금은 대학교수로 일하면서 주 중에는 학교 근처 오피스텔에서 생활할 만큼 엄마에겐 가정보다 일이 더 중요한 듯 보였다.
처음엔 인아의 시점으로 그런 엄마를 보여줬을 때, 조금 너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할머니의 사정이 등장하면서는 엄마가 왜 그렇게 살아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황해도 부잣집에서 8남매 중 유일한 딸로 태어난 할머니는 가난한 집 맏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할아버지는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 말에 따라 원하지도 않았던 교사가 됐다. 여자가 공부를 할 수 있던 때가 아닌 시기에 교사 남편과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란 엄마였기에 어떻게든 공부를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인아는 잘난 엄마에 비해 뭐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위축되어 엄마와의 관계가 서먹했고,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 역시 소원했다. 인아의 엄마는 아버지에게 맞는 엄마를 보고 자랐고, 다른 엄마들처럼 많이 배우지 못했던 엄마가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 사실들보다 결정적인 이유처럼 보이던 한 마디의 말이 내게도 비수가 되었기에 엄마는 할머니에게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마치 존재를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그 상처에 할머니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는 의지가 더해져 많이 공부하고 멀리 유학까지 가지만, 어쩐 일인지 모녀의 삶의 한구석은 겹치는 지점이 있었고 그때서야 엄마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어색함의 골이 깊어졌어도 엄마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엄마를 위해서 노력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인아와 엄마 사이의 거리감 역시 오랜 시간이 된 지금에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딸이 엄마가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굳이 엄마가 되지 않아도 지금 내 나이쯤에 엄마는 어떻게 살고 나를 키웠는지를 생각해보면 자연스레 안타까움과 슬픔이 밀려온다.
그런데 이제는 관계가 바뀌어 내가 엄마를 챙겨야 할 부분이 많아졌다는 것을 떠올리면 가끔 느끼게 되는 답답한 이 낯선 감정이 참 묘하다. 언제 이렇게 바뀌어버렸을까 싶은 생각에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든다.
나는 아기 때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소설 속 인아처럼 사랑을 듬뿍 받은 기억은 없지만, 외할머니가 예뻐했다고 엄마가 들려줬던 이야기와 갓난쟁이인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책을 읽는 동안 떠올랐다. 그리고 자연스레 엄마가 가지고 있을 할머니에 대한 감정도 그려보게 됐다.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는 같은 여자로, 가족으로 살지만 때로는 타인보다 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날들이 있기 마련인 모녀 관계를 보여줬다. 그럼에도 결국엔 이해하고 말하지 않아도 깊이 사랑하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너무나 잘 표현한 소설이었다.
엄마가 웃고 있어서, 어쩌면 엄마 역시 나와 함께 식탁맡에 앉아 있는 이 시간을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엄마 나름의 다정함을 표현하는 서툰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엄마 역시 나와 이렇게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지도.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랐다. - P73.74
"엄마, 엄마도요, 내가 생겼을 때, 이런 마음이었어요?"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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