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 민음사 모던 클래식 30
존 맥그리거 지음, 이수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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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느 오후, 작은 마을 주택가.

길에 있던 아이가 마주 오는 차에 치이려는 순간 18호에 사는 남자애가 튀어나갔다.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고 내 옆에 있던 여자애는 맥주 캔을 떨어뜨렸다. 세발자전거를 타던 남자아이는 그 광경을 보다가 가로수에 부딪혀 넘어졌고, 세차 중이던 남자는 움직이지 못했다. 마을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광경을 보고 너무 놀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3년이 지나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는 나는 얼마 전 외할머니의 장례식에 갔다가 만난 남자와 보낸 하룻밤으로 아기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직 아기를 낳기엔 이른 나이인데다 남자의 연락처도 몰라 당황스럽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 친구 세라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는 3년 전 18호에 살던 남자애의 동생이라고 했다. 최근 그때의 사건이 종종 생각났던 나는 그 애의 동생 마이클을 만나 여러 대화를 하고, 제법 가까워져 아기에 관한 문제와 어머니와의 갈등 등을 털어놓게 된다. 그리고 마이클은 쌍둥이 형인 그 애의 이야기를 한다.

 

 

 

 

 

 

현재 화자의 일상과 3년 전 새벽부터 사고가 나던 오후까지 마을 사람들의 하루를 번갈아가며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던 시간에 문득 깨어난 사람이 있었고, 젊은이들은 뒤늦게 집에 들어가 떠들었으며 어떤 남녀는 서로의 감정을 나누기도 했다. 모든 것이 일상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이 되어 부모가 식사를 차리면 아이들은 대충 먹고 밖으로 나가 뛰어놀면서 장난을 쳤다. 노부부는 함께 어딘가를 가고, 누군가는 빨래와 청소 등의 일을 했다.

그 사람들 사이에 18호 남자애가 있었다. 그 애는 버려진 것들을 소중하게 여겨 집으로 가져왔고, 가져가지 못하는 것들은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많은 사진들 속에는 이웃에 사는 쌍둥이 남자아이들과 그 여동생,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사진이 있었고, 18호 남자애가 좋아하는 22호 여자애의 사진도 있었다. 스토커로 보이는 그런 사진이 아닌,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들의 순간이 담겨있었기에 그의 사진은 순수했다. 그 애에게는 물건과 사람을 대하는 진심이 있었다.

 

그렇게 과거가 진행되면서 그 많은 마을 사람들 중 현재에 왜 하필이면 화자가 등장하는지는 중반에 밝혀진다. 그녀가 18호 남자애가 좋아하던 22호 여자애였기 때문이다. 그 애는 마음속 깊은 곳에 감정을 키워나가고 있었지만, 화자는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 애와 만날 약속까지 했었다고 마이클이 상기시켜줬지만, 화자는 전혀 기억에 없었다.

화자에게 그 애의 기억은 교통사고의 순간뿐이었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제일 먼저 튀어나갔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과거의 사건과 현재를 이어주는 존재는 18호 남자애의 쌍둥이 동생 마이클이었다. 그 애라고 착각할 만큼 꼭 닮은 외모를 가진 마이클은 형제에게서 그녀에 대해 정말 많이 들었기 때문인지 금세 친해졌다. 얼마 전에 새로 사귄 친구라고 하기엔 더없이 다정하고 친절했고, 화자 역시 마이클에게 남다른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때 사건에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비밀이 밝혀진다.

 

그 순간을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당연히 기적이라 부를 수 있지만, 다른 갑작스러운 그것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병이 들었지만 아내에게 차마 알리지 못하는 노인, 화재로 아내를 잃고 손에 화상을 입은 소녀의 아버지, 근처에 사는 많은 학생들 중 단 한 명에게 나타난 침묵의 순간이었다.

기적은 생과 사를 가르는 순간에 전능한 자가 손을 들어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불러야 했다. 전능한 자가 이끈 사람에겐 기적이었고, 아닌 사람에겐 너무나 외롭고도 괴로운 쓸쓸한 순간이었다. 그 갑작스러운 순간에 혼자였다는 게 안타깝고 슬프기만 했다.

이런 과정에 쌍둥이가 세 형제나 됐다는 것이 왠지 특별하게 느껴졌다. 사고를 당한 아이와 구하려던 그 애, 그리고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에게까지 어떤 신비로운 것이, 기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을 언제까지나 기억할 사람에게 남겨진 각인의 흔적이었다.

 

이 책 역시 재독이다. 이 책은 결말이 가물가물 기억나긴 했지만 확실하진 않았는데, 다시 읽으니 역시나 처음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새롭게 다가왔고(대체 그걸 왜 놓쳤지?), 이름이 등장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평범한 무명 씨들의 일상에도 기적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마이클과 화자인 그녀가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간직하며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 애는 모든 것들이 무시되고 잊히고 버려지는 것이 너무 싫다고 했어. - P190

언제나 네 두 눈으로 보고 네 두 귀로 들어야 해. 세상은 아주 넓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쳐 버리는 것들이 아주아주 많단다. 늘 놀라운 것들이, 바로 우리 앞에 있지만, 우리 눈에 태양을 가리는 구름 같은 게 있어서 그것들을 보지 못하면 삶이 초라하고 지루해진단다.
만일 아무도 놀라운 것들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놀라운 것들이 존재할 수 있겠니?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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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프렌즈, 그건 사랑한단 뜻이야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흔글·조성용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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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을 시작으로 카카오프렌즈 주인공들이 한 명씩 등장한 에세이의 마지막 편이 나왔다. 귀여운 캐릭터와 짧은 글 속에 촌철살인으로 공감하게 만든 시리즈였는데 마지막이라니 조금 아쉽기도 한 마음이 든다.

 

 

 

 

 

나 혼자만 혼자인 건 아니야

 

 

가끔은 싫은 소리를 듣게 되는 날도 있다. 아는 사람에게서 듣는 소리가 아닌, 나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을 들으면 정말이지 기분이 더럽다. 최근에 잘 모르는 사람에게서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다행히도 나는 남의 말, 특히 모르는 사람의 말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성격이라 그냥 욕만 하고 말았다. 알지도 못하면서 오지랖 부리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반사!"라고 외치고 싶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은 그냥 이해하지 않는 것, 너무나 공감이 된다. 어릴 땐 그런 사람들을 아득바득 싫어했었는데 이제는 그러려니, 댁은 계속 그렇게 사시오, 라는 포기 상태가 된다. 어차피 평생 볼 사람 아니니까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다.

 

 

모든 사람에겐 저마다의 장르가 있다는 글에 내 인생은 어떤 장르라면 좋을까 생각해봤다. 라이언은 코미디라고 하는데, 나는 그냥 드라마였으면 좋겠다. 평범하고 재미없을 수도 있지만 그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는 그런 드라마가 좋을 것 같다.

 

누가 있어야만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니고, 누가 없어서 외로운 것도 아닌.

내가 워낙 혼자 잘 놀아서 그런지 외로움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혼자여도 괜찮고, 둘이서도 좋고, 여럿도 가끔은 좋은. 적당히가 좋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을 토닥여주는 시간. 괜찮아질 거라고 나 자신을 다독이는 말.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위로다.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세요

 

 

근엄한 얼굴로 나 자신을 아끼라고 말하는 어피치. 이 말 너무나 공감이다! 내가 나를 아껴줘야 남도 나를 아껴주지 않을까?

 

유연한 사람이 되자. 내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는 건 정말 몹쓸 짓이다.

그리고 그건 혼자가 되는 지름길인지도 모르겠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자신의 기준에 남을 맞추지 말고, 남의 기준에 나를 맞추지도 말자.

어차피 맞는 사람과는 절친이 되겠지만, 안 맞는 사람은 안 보면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낯선 관계의 시작은 삐걱거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간을 들이고 기다린다면 어느샌가 맞게 될지도 모른다. 숙성되어 맛있게 구워진 빵이라는 관계에 대한 비유가 딱 적당한 표현이라는 느낌이 든다.

 

 

 

 

 

왜 너랑 있으면 웃음이 날까

 

 

이 글을 읽고 잡은 물고기에게 밥을 안 준다는 말이 떠올랐다. 너무 싫은 말이다!

꾸준한 사랑과 관심을 줘야지, 왜 시간이 흐르면 애정이 반값 세일이 되는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꾸준한 애정을 주는 건 정말정말 당연한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워진다.

 

 

관계에서 경고를 준다는 말이 너무 공감된다. 딱 내 얘기라서 그런가 보다. 누가 잘못을 하면 고치도록 말을 해주는데, 그게 반복되면 고칠 수 없는 사람이란 생각에 딱 끊어낸다. 일례로 지각을 반복하는 사람에게 그랬었다. 분 단위의 지각이 아닌 시간 단위로 지각하는 과거의 어떤 직원, 아직도 이가 갈린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는 좋은 사람, 좋은 관계.

 

 

 

 

 

이제, 내 마음을 읽어줘

 

 

괜찮다는 말로 나의 힘듦을 숨기기만 할 필요는 없다. 남들에겐 괜찮다고 말할 수 있어도 정작 괜찮지 않은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정말 괜찮은지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겁쟁이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사람과의 관계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상처를 받고 때로는 끊어지게 되면서 새로운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지레 겁을 먹게 된다. 내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겁쟁이가 되는 선택은 왠지 쓰라린 상처와 같다.

 

 

이건 사회생활하면서 꼭 필요한 부분이다. 내 기분이 별로라고 남에게도 그런 기분을 팍팍 티 내는 거, 진짜 못할 짓이다.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건 혼자 있을 때나 해야 된다.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들은 옆에 사람들이 더 힘들다.

근데 생각해보면 기분이 나쁜데 생글생글 웃는 것도 왠지 무서운 느낌인데...

 

 

순간을 위해 마음을 쓰자는 말이 참 좋다. 영원이라는 말도 좋지만 그건 가늠할 수 없는 미래의 어떤 시간인 반면, 순간은 바로 지금 현재를 의미하니 말이다. 이 순간을 위해 마음을 쓰는 것,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하다.

 

 

 

 

 

행복은 절대 미룰 수 없어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

좋아하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큰 사이즈 마시기. 날씨 좋은 날 산책하기. 맛있는 거 먹기.

사소한 행복이 참 많은데 요즘 상황 때문에 스스로 절제하려고 하는 중이라 이래저래 아쉬운 나날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 올해는 정말 아쉽기만 한 봄이다.

 

나만의 템포로 인생이라는 길을 오늘도 걸어가고 있다. 때로는 지름길이 나오기도 하고 어쩔 땐 진흙 구덩이에 빠질 때도 있지만, 내 인생 앞에 놓인 길은 나만 걸어갈 수 있다. 끈기 있게 걷다 보면 꽃밭이 가득한 길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음이 지친 나에게 소소한 위로가 되어준 카카오프렌즈 에세이였다. 어찌나 공감되는 부분이 많던지, 책을 통째로 옮겨오고 싶은 마음이었다. 짧은 글 속에 담긴 마음을 귀여운 카카오프렌즈 캐릭터들과 함께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제목도 딱 마음에 든다.

 

라이언부터 시작해 모두 함께 모인 이 책까지 그동안 카카오프렌즈 에세이로 공감과 위로를 받아 정말 좋았다.

 

 

 

* 이 리뷰는 아르테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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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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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지배하는 독재시대의 루마니아.

대학을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하는 "나"와 같은 방을 쓰는 롤라가 벽장 안에서 자살했다. 롤라는 나의 허리띠를 사용해 목을 맸고, 내 트렁크에는 롤라의 공책이 숨겨져 있었다. 몰래 읽은 공책 안에 담긴 글에서 롤라의 억울함을 느낀 나는 그것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숨겨뒀지만, 사흘 후 공책은 사라졌고 롤라는 당에서 제명되었다.

 

그 후 나는 롤라와 같은 방을 쓰던 여학생을 찾는 남학생 세 명을 만난다. 에드가, 쿠르트, 게오르크와 정치적인 대화를 비밀스럽게 나누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글을 쓰며 자신들만 아는 비밀 장소에 그 흔적들을 숨겨놓는다.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비밀경찰의 타깃이 될 수 있는 시대였다. 길거리에서는 물론 같은 기숙사, 직장,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집에서도 도청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사람들은 말을 아끼고 속으로 곱씹었다. 마음속에서 자라난 말은 어느새 그 크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렸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마음이 담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말이 입안에 고여 닳고 닳아버리면 마음 안에 짐승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제정신을 유지하며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기보다 화자의 할머니처럼 무의미한 말을 하는 짐승처럼 사는 듯했다. 마음속에 생겨난 짐승은 억눌린 자유를 뜻하는 게 아니었나 싶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자유, 쓰고 싶은 글을 쓸 자유,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을 그런 자유 말이다.

 

누군가는 자유롭게 원하는 말을 하며 살기 위해 도망을 치기도 했지만, 국경을 넘는 걸 성공하는 사람보다 실패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혹여 무사히 빠져나가 독일에 도착하더라도 자살로 보이는 살인을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나라 밖에서도 목숨을 지킬 수 없다는 것에 사람들은 좌절해 겉으로는 당에 충성하는 당원들과 같은 행동을 했다. 당에서 지시받은 곳에서 일하며 서로를 감시하는 사람들과 점점 동화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갑갑하게 목을 조여왔다.

당에서는 손톱만큼의 틈도 허용하지 않아 평범한 단어 속에 자기들만의 비밀스러운 의미를 담은 편지를 써서 보내면 어김없이 경감 프옐레의 호출을 받았다. 편지는 검열당하고 가깝다고 생각했던 친구는 화자를 배신하기도 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화자와 세 이성친구들의 연대는 더욱 끈끈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화자인 "나"는 롤라의 죽음과 공책이 관련되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에 충성을 하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당원이라고 할 수는 없는 롤라를 직접적으로 고발하지는 않았지만, 못 본 척하며 조금은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르다는 것에서 오는 괴리감은 증오라는 감정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게 아니었지만, 독재시대의 억눌린 자유는 사람들의 마음을 망가뜨리고 감정을 뒤틀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화자는 롤라의 공책을 통해 만나게 된 에드가, 쿠르트, 게오르크와의 인연으로 자유를 갈망한다.

 

독재시대라는 배경을 통해 우리나라의 1970~80년대를 떠오르게 했고, 입 밖으로 낼 수 없어 속으로만 자유롭게 노래하며 시를 읊었던 부분에서는 일제강점기를 생각나게 했다. 비슷한 역사의 흔적을 지나왔기 때문인지 머나먼 동유럽 국가에 동질감을 느꼈다. 자유를 빼앗기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겉으로 냉정을 유지하지만, 마음속에 담긴 염원은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었다.

 

10여 년 전에 읽은 소설인데, 당시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아 다시 읽었다.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대략 인지하고 다시 읽으니 처음 읽었을 때보다는 문장에 담긴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미친 사람들만이 대강당에서 손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두려움과 광기를 맞바꿨다.
그러나 나는 거리에서 사람들 수를 더 셀 수 있었다. 나는 내게 말할 수 있었다. 거기 아무개. 혹은 거기 천(千). 도저히 미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 제정신이었다. - P57

모든 도주는 죽음을 향한 프러포즈였다. 그래서 소곤거림은 매혹적이었다. 도주의 절반은 감시원의 개에게 들키거나 총탄에 맞아 좌절되었다. - P82

그들은 상점에 늘어선 줄 같았다. 누가 계산대에서 돈을 치르고 죽음을 들고 나가면 뒤에 선 사람들은 앞으로 움직였다. - P171

우리를 끝내 구해준 것은 인내였다. 그것만큼은 우리를 놓아버려선 안 되었다. 찢기더라도 곧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줘야 했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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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6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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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콜라이는 출장을 갔다가 현 지사의 파티에 초대를 받는다. 그곳에서 니콜라이는 마리야의 외가 친척 부인을 만나게 되고, 현 지사의 부인은 니콜라이와 마리야의 혼담을 진행한다. 니콜라이는 어릴 때부터 소냐와의 미래를 그려왔기 때문인지 마리야와 결혼 생활이 어떨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마리야에게 깊은 호감을 가지고 있고, 그녀 또한 니콜라이와 같은 마음이다.

 

방화 혐의로 체포된 피에르는 다른 수감자들과 재판을 받는 자리에서 자신의 지위나 이름을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피에르는 플라톤이라는 남자와 가까워지고, 인생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다.

 

마리야는 오빠 안드레이가 로스토프 가족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조카 니콜루시카와 함께 그곳으로 향한다. 한때 안드레이와 약혼한 사이였던 나타샤는 그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있었지만, 오빠의 얼굴을 본 마리야는 그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안드레이가 세상을 떠난 후, 같은 슬픔을 느끼는 마리야와 나타샤는 언제 사이가 나빴냐는 듯 가까운 친구가 된다.

 

 

 

드디어 <전쟁과 평화>를 완독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등장인물들의 이름, 애칭 때문에 난감했었는데, 이내 익숙해서 생각보다 재미있게 읽었었다. 2권까지도 즐겁게 읽다가 3권부터는 이전보다 재미가 조금 떨어지더니, 급기야 4권에서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보다 작가의 사설이 훨씬 길어져 소설을 읽는 건지 전문 서적을 읽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웬만하면 직접적으로 재미없다는 얘기를 잘 안 하는 편인데 4권은 진짜 재미없었다. 여태까지 읽은 게 있으니 끝은 봐야 할 것 같아서 "에필로그 2부"까지 읽었는데, 사실 그 부분은 소설과 전혀 관련 없는 내용의 글이라 읽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안드레이가 세상을 떠난 뒤 마리야와 나타샤가 가까워졌고, 군대에 간 로프토프 가문의 막내아들 페챠가 갑자기 죽었다. 페챠의 죽음 이후 로스토프 노백작의 죽음이 이어졌고, 아버지가 남긴 어마어마한 빚을 니콜라이가 떠안게 되어 오빠의 죽음 이후 볼콘스키 가문의 유산을 상속받은 마리야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수감됐을 때 엘렌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풀려나서야 알게 된 피에르는 나타샤에게 청혼을 하고 둘은 당연히 결혼을 한다.

"전쟁과 죽음과 결혼"이었다. 시작부터 엘렌이 죽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줄줄이 초상이 나서 살았다면 잘 됐을지도 모를 관계가 뚝 끊어졌다. 니콜라이는 돈 때문에 소냐와의 결혼을 없던 일로 치게 됐고, 뚱뚱했던 피에르가 수감생활로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자 나타샤는 그를 새삼 다르게 봤다. 아무래도 작가가 이어주고 싶은 인물들이 따로 있었는지 억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이게 대부분이고, "에필로그 1부"에 결혼 후의 부부와 아이들의 모습이 조금 있었지만 별 내용은 없었다.

 

후기에 보니 작가가 더 길게 기획한 소설이라던데 뭔가 좀 애매한 데서 끝난 것 같긴 하다. 사돈지간이 된 니콜라이와 피에르의 언쟁 이후 안드레이의 아들 니콜루시카의 모습으로 끝났으니 말이다.

 

1권을 읽었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느낌을 받은 4권이었다. 재미 면에서는 1권이 제일이었고, 갈수록 좀 흥미가 떨어졌다. 그래서인지 4권을 일주일 내내 붙잡고 있었다.

어쨌든 다 읽긴 했으니 보람은 있다.

"우리는 일단 익숙한 길에서 밀려나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직 그곳에서 새로운 좋은 것이 시작되지요.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행복도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많은 것이, 많은 것이 있어요. 그것이 내가 당신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 P442

"친구, 우리의 불행은 그물 속의 물 같아서 당기면 부풀지만 끌어내면 아무것도 없답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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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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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직에 있던 조부가 부하의 죄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 가세가 기울어진 시기에 내가 태어났다. 나는 태어난 지 1년쯤 됐을 때 계단에서 굴러 이마가 찢어졌고, 5살에는 붉은 커피 같은 것을 토했다. 그 후, 나는 자가중독이라는 고질병을 안고 살았다. 어릴 때부터 병치레가 잦았기 때문인지 할머니는 나를 애지중지하여 또래 남자아이들은 거칠다고 놀지 못하게 했다. 그 대신 하녀나 간호사, 그리고 할머니가 골라준 이웃 여자아이 셋과 어울렸다.

 

어릴 때부터 동성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인지,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남성을 향한 알 수 없는 욕망을 느낀다. 다섯 살 때 분뇨 수거인을 향해 처음 느낀 감정은 중학생이 되어 같은 반 학생에게,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후배에게로 옮겨갔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나는 남성성을 향한 갈구와 욕망을 절대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가면을 쓰고 평생을 살아간다.

 

 

 

 

 

 

처음엔 병약한 신체로 인해 거친 남자아이들과 어울릴 수 없어서 동성을 향한 일종의 동경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주인공은 확실히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남성을 향한 첫 동경은 보통 예상할 수 있는 외형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된 게 아닌, 거칠고 더러운 분뇨 수거인을 보고 느끼게 된다.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지만 귀한 집 도련님, 그것도 병치레로 연약한 자신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사람이었다는 게 돋보였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가질 수 없는 것을 향한 열망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모된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주인공은 무려 100여 년 전인 1925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동성을 향한 욕망을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동급생들은 여자 얘기만 나오면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것과는 달리 자신은 그 어떤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난 뒤에는 그 사실을 숨겨야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게 됐을 것이다.

그때부터 주인공은 감정을 숨기며 거짓된 가면을 쓰고 살게 됐다. 남성을 향한 열망뿐만이 아니라 여자에 대해 다 안다는 거짓된 언행을 보이며 동급생들에게 으스대기도 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어 전쟁 중에는 학도병으로 지내며 죽음을 갈망하기까지에 이른다. 죽고 싶긴 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못해서 자연스러운 죽음을 바라지만, 사이렌이 울리면 제일 먼저 방공호로 숨어드는 모순된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평생 동안 자신의 진심과 열망을 부정하고 도망치며 살았다고 볼 수 있었다. 끝끝내 숨긴 감정 외에 그의 삶에 진실된 무언가가 있기는 할까 싶을 정도였다.

성인이 된 그의 행동을 보며 남성을 향한 시선이 성애적인 것은 아니지만 맞다고 하기에도 좀 애매하다고 느꼈다. 예술품을 감상했을 때 받을 수 있는 스탕달 신드롬과 같은 것이라 느껴졌지만, 보수적인 시대에는 그것조차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신 여자를 좋아하는 척, 친구 누나나 여동생에게 마음이 있는 척 거짓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성을 향한 인정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인해 거짓된 감정을 밖으로 내보이게 되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감정조차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보였다. 평생을 도망만 치던 그가 소노코와의 관계에 확답을 요구받자 이전처럼 달아나버렸지만, 뒤늦게 감정을 깨닫고 후회를 한다. 그때가 되니 가면을 쓴 자신과 본래의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생을 연기하며 꾸며낸 모습으로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기 때문에 확고한 자아는 없고 혼동된 자아만 남아있었다. 부정하던 감정으로 인해 부정된 삶을 살게 된 것이었다.

 

자신의 것이 없는 삶이었다. 감정조차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었다. 섞여서 혼동되고 진짜가 뭔지 알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가면을 쓴 자의 애처로운 고백처럼 느껴졌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작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일생과 똑 닮았다는 점이 후기에 여러 번 언급되었기에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진짜인지 아닌지 모를 작가의 속내가 담겨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본연의 것을 거짓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무의식적인 꺼림칙함이 그렇듯 집요하게 나의 의식적인 연기를 북돋워주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 생각하면, 인간은 과연 그토록 완벽하게 자신의 천성을 배반할 수 있는 존재일까? 가령 한순간이라도. - P111

내가 인생에 맞서는 태도는 그즈음부터 이러했다. 너무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것, 너무도 사전의 공상으로 지나치게 꾸며진 것에서는 결국 도망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 P37

예의 ‘연기‘가 나를 이루는 조직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이미 연기가 아니었다. 나 자신을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위장하는 의식이 내 안에 있는 본연의 정상성까지도 잠식해서, 그것이 위장된 정상성일 뿐이라고 일일이 일러주지 않으면 속이 개운하지 않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나는 거짓밖에는 믿지 않는 인간이 된 것이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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