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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0
존 맥그리거 지음, 이수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어느 오후, 작은 마을 주택가.
길에 있던 아이가 마주 오는 차에 치이려는 순간 18호에 사는 남자애가 튀어나갔다.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고 내 옆에 있던 여자애는 맥주 캔을 떨어뜨렸다. 세발자전거를 타던 남자아이는 그 광경을 보다가 가로수에 부딪혀 넘어졌고, 세차 중이던 남자는 움직이지 못했다. 마을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광경을 보고 너무 놀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3년이 지나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는 나는 얼마 전 외할머니의 장례식에 갔다가 만난 남자와 보낸 하룻밤으로 아기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직 아기를 낳기엔 이른 나이인데다 남자의 연락처도 몰라 당황스럽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 친구 세라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는 3년 전 18호에 살던 남자애의 동생이라고 했다. 최근 그때의 사건이 종종 생각났던 나는 그 애의 동생 마이클을 만나 여러 대화를 하고, 제법 가까워져 아기에 관한 문제와 어머니와의 갈등 등을 털어놓게 된다. 그리고 마이클은 쌍둥이 형인 그 애의 이야기를 한다.

현재 화자의 일상과 3년 전 새벽부터 사고가 나던 오후까지 마을 사람들의 하루를 번갈아가며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던 시간에 문득 깨어난 사람이 있었고, 젊은이들은 뒤늦게 집에 들어가 떠들었으며 어떤 남녀는 서로의 감정을 나누기도 했다. 모든 것이 일상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이 되어 부모가 식사를 차리면 아이들은 대충 먹고 밖으로 나가 뛰어놀면서 장난을 쳤다. 노부부는 함께 어딘가를 가고, 누군가는 빨래와 청소 등의 일을 했다.
그 사람들 사이에 18호 남자애가 있었다. 그 애는 버려진 것들을 소중하게 여겨 집으로 가져왔고, 가져가지 못하는 것들은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많은 사진들 속에는 이웃에 사는 쌍둥이 남자아이들과 그 여동생,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사진이 있었고, 18호 남자애가 좋아하는 22호 여자애의 사진도 있었다. 스토커로 보이는 그런 사진이 아닌,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들의 순간이 담겨있었기에 그의 사진은 순수했다. 그 애에게는 물건과 사람을 대하는 진심이 있었다.
그렇게 과거가 진행되면서 그 많은 마을 사람들 중 현재에 왜 하필이면 화자가 등장하는지는 중반에 밝혀진다. 그녀가 18호 남자애가 좋아하던 22호 여자애였기 때문이다. 그 애는 마음속 깊은 곳에 감정을 키워나가고 있었지만, 화자는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 애와 만날 약속까지 했었다고 마이클이 상기시켜줬지만, 화자는 전혀 기억에 없었다.
화자에게 그 애의 기억은 교통사고의 순간뿐이었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제일 먼저 튀어나갔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과거의 사건과 현재를 이어주는 존재는 18호 남자애의 쌍둥이 동생 마이클이었다. 그 애라고 착각할 만큼 꼭 닮은 외모를 가진 마이클은 형제에게서 그녀에 대해 정말 많이 들었기 때문인지 금세 친해졌다. 얼마 전에 새로 사귄 친구라고 하기엔 더없이 다정하고 친절했고, 화자 역시 마이클에게 남다른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때 사건에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비밀이 밝혀진다.
그 순간을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당연히 기적이라 부를 수 있지만, 다른 갑작스러운 그것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병이 들었지만 아내에게 차마 알리지 못하는 노인, 화재로 아내를 잃고 손에 화상을 입은 소녀의 아버지, 근처에 사는 많은 학생들 중 단 한 명에게 나타난 침묵의 순간이었다.
기적은 생과 사를 가르는 순간에 전능한 자가 손을 들어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불러야 했다. 전능한 자가 이끈 사람에겐 기적이었고, 아닌 사람에겐 너무나 외롭고도 괴로운 쓸쓸한 순간이었다. 그 갑작스러운 순간에 혼자였다는 게 안타깝고 슬프기만 했다.
이런 과정에 쌍둥이가 세 형제나 됐다는 것이 왠지 특별하게 느껴졌다. 사고를 당한 아이와 구하려던 그 애, 그리고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에게까지 어떤 신비로운 것이, 기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을 언제까지나 기억할 사람에게 남겨진 각인의 흔적이었다.
이 책 역시 재독이다. 이 책은 결말이 가물가물 기억나긴 했지만 확실하진 않았는데, 다시 읽으니 역시나 처음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새롭게 다가왔고(대체 그걸 왜 놓쳤지?), 이름이 등장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평범한 무명 씨들의 일상에도 기적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마이클과 화자인 그녀가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간직하며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 애는 모든 것들이 무시되고 잊히고 버려지는 것이 너무 싫다고 했어. - P190
언제나 네 두 눈으로 보고 네 두 귀로 들어야 해. 세상은 아주 넓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쳐 버리는 것들이 아주아주 많단다. 늘 놀라운 것들이, 바로 우리 앞에 있지만, 우리 눈에 태양을 가리는 구름 같은 게 있어서 그것들을 보지 못하면 삶이 초라하고 지루해진단다. 만일 아무도 놀라운 것들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놀라운 것들이 존재할 수 있겠니?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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