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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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직에 있던 조부가 부하의 죄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 가세가 기울어진 시기에 내가 태어났다. 나는 태어난 지 1년쯤 됐을 때 계단에서 굴러 이마가 찢어졌고, 5살에는 붉은 커피 같은 것을 토했다. 그 후, 나는 자가중독이라는 고질병을 안고 살았다. 어릴 때부터 병치레가 잦았기 때문인지 할머니는 나를 애지중지하여 또래 남자아이들은 거칠다고 놀지 못하게 했다. 그 대신 하녀나 간호사, 그리고 할머니가 골라준 이웃 여자아이 셋과 어울렸다.

 

어릴 때부터 동성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인지,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남성을 향한 알 수 없는 욕망을 느낀다. 다섯 살 때 분뇨 수거인을 향해 처음 느낀 감정은 중학생이 되어 같은 반 학생에게,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후배에게로 옮겨갔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나는 남성성을 향한 갈구와 욕망을 절대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가면을 쓰고 평생을 살아간다.

 

 

 

 

 

 

처음엔 병약한 신체로 인해 거친 남자아이들과 어울릴 수 없어서 동성을 향한 일종의 동경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주인공은 확실히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남성을 향한 첫 동경은 보통 예상할 수 있는 외형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된 게 아닌, 거칠고 더러운 분뇨 수거인을 보고 느끼게 된다.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지만 귀한 집 도련님, 그것도 병치레로 연약한 자신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사람이었다는 게 돋보였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가질 수 없는 것을 향한 열망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모된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주인공은 무려 100여 년 전인 1925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동성을 향한 욕망을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동급생들은 여자 얘기만 나오면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것과는 달리 자신은 그 어떤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난 뒤에는 그 사실을 숨겨야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게 됐을 것이다.

그때부터 주인공은 감정을 숨기며 거짓된 가면을 쓰고 살게 됐다. 남성을 향한 열망뿐만이 아니라 여자에 대해 다 안다는 거짓된 언행을 보이며 동급생들에게 으스대기도 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어 전쟁 중에는 학도병으로 지내며 죽음을 갈망하기까지에 이른다. 죽고 싶긴 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못해서 자연스러운 죽음을 바라지만, 사이렌이 울리면 제일 먼저 방공호로 숨어드는 모순된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평생 동안 자신의 진심과 열망을 부정하고 도망치며 살았다고 볼 수 있었다. 끝끝내 숨긴 감정 외에 그의 삶에 진실된 무언가가 있기는 할까 싶을 정도였다.

성인이 된 그의 행동을 보며 남성을 향한 시선이 성애적인 것은 아니지만 맞다고 하기에도 좀 애매하다고 느꼈다. 예술품을 감상했을 때 받을 수 있는 스탕달 신드롬과 같은 것이라 느껴졌지만, 보수적인 시대에는 그것조차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신 여자를 좋아하는 척, 친구 누나나 여동생에게 마음이 있는 척 거짓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성을 향한 인정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인해 거짓된 감정을 밖으로 내보이게 되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감정조차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보였다. 평생을 도망만 치던 그가 소노코와의 관계에 확답을 요구받자 이전처럼 달아나버렸지만, 뒤늦게 감정을 깨닫고 후회를 한다. 그때가 되니 가면을 쓴 자신과 본래의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생을 연기하며 꾸며낸 모습으로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기 때문에 확고한 자아는 없고 혼동된 자아만 남아있었다. 부정하던 감정으로 인해 부정된 삶을 살게 된 것이었다.

 

자신의 것이 없는 삶이었다. 감정조차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었다. 섞여서 혼동되고 진짜가 뭔지 알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가면을 쓴 자의 애처로운 고백처럼 느껴졌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작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일생과 똑 닮았다는 점이 후기에 여러 번 언급되었기에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진짜인지 아닌지 모를 작가의 속내가 담겨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본연의 것을 거짓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무의식적인 꺼림칙함이 그렇듯 집요하게 나의 의식적인 연기를 북돋워주었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 생각하면, 인간은 과연 그토록 완벽하게 자신의 천성을 배반할 수 있는 존재일까? 가령 한순간이라도. - P111

내가 인생에 맞서는 태도는 그즈음부터 이러했다. 너무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것, 너무도 사전의 공상으로 지나치게 꾸며진 것에서는 결국 도망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 P37

예의 ‘연기‘가 나를 이루는 조직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이미 연기가 아니었다. 나 자신을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위장하는 의식이 내 안에 있는 본연의 정상성까지도 잠식해서, 그것이 위장된 정상성일 뿐이라고 일일이 일러주지 않으면 속이 개운하지 않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나는 거짓밖에는 믿지 않는 인간이 된 것이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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