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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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및 간략한 내용

 

그 여름 이경과 수이는 열여덟 살 여름에 처음 만났다. 수이가 찬 공에 맞아 이경의 안경이 부러지고 코피가 난 이후, 수이는 매일같이 이경의 반에 찾아왔다. 둘은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됐고,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게 됐다. 성인이 되어 각자 다른 길을 선택했어도 둘 사이는 변하지 않을 줄 알았지만, 마음이라는 건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달라지고 만다.

601, 602 "나"의 가족은 다섯 살 때 광명의 주공아파트로 이사했다. 옆집에 살던 효진은 나와 동갑에 생일도 이틀 차이라 가까운 단짝이 되었다. 서로의 집에 자주 놀러 가기도 했었는데, 어느 날 효진의 오빠 기준이 동생을 죽도록 때리고 있는 걸 목격했다. 그때 거실에는 효진의 부모가 있었지만 누구도 기준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효진이 잘못해서 맞고 있는 거라고 하며 폭력을 용인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밤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윤희는 면접을 보기 위해 오랜만에 한국에 왔다. 윤희가 귀국했다는 사실을 안 동생 주희는 자신의 집에 머무르라고 말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는 그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 같은 자매 사이였지만, 주희가 나이 많은 남자의 아기를 임신해 결혼생활을 시작하자 윤희는 그 꼴을 도무지 보고 싶지 않아졌다.

모래로 지은 집 "나"와 공무, 모래는 천리안 동호회에서 만난 같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서로를 몰랐지만 통신을 통해 알게 됐고, 동호회가 폐쇄된다는 공지에 정모를 하기로 했다. 그 자리에 나온 사람은 세 사람은 이내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된다. 시간이 될 때마다 만나고 함께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서로에게 내보일 수 없는 마음은 숨긴 채였다.

 

고백 수사가 되기 전 마지막으로 사귄 여자친구 미주가 고등학생 때의 이야기를 했다. 주나와 진희라는 친구 셋이서 단짝으로 지냈었던 기억으로 이야기가 시작됐다. 홀수라서 셋 중 한 명이 소외되기도 해서 조금은 섭섭한 감정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들 셋은 서로에게 모든 것을 내보일 수 있었던 사이였다. 열여덟 살 생일에 진희가 여태껏 말하지 않았던 것을 고백하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손길 혜인은 일곱 살부터 열한 살까지 숙모의 손에 길러졌다. 삼촌과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숙모는 당시에 20대 초반이었고 남편의 조카인 혜인을 보살펴야 했음에도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혜인을 즐겁게 해주려고, 웃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집안 모임이 있을 때마다 어른들이 숙모를 보고 혀를 차는 걸 보며 혜인은 숙모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혜인이 다시 부모의 집으로 돌아간 뒤, 고등학생 때 삼촌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숙모는 인사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치디에서 여행을 온 여자와 데이트를 하던 랄도는 그녀가 자기 나라로 돌아간 이후 연락이 되지 않자 아일랜드로 향했다. 집 앞에서 만난 그녀에게서 둘은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사실을 듣게 된 랄도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지만 화산 폭발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려야 했다. 가지고 온 돈은 모두 바닥이 나고, 이전부터 방탕했던 자신의 행실 때문에 엄마, 누나에게 거의 절연당한 랄도는 누군가에게 부탁해 시골에 있는 과수원에서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랄도는 한국에서 온 하민을 만난다.

 

 

 

다양한 이야기가 실린 단편집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가장 긴 분량의 <모래로 지은 집>이었다. 같은 고등학교 동창 세 명은 서로 너무나 달라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폐쇄된 인터넷 동호회를 먼저 알게 된 덕분인지 서로를 진짜 이름보다는 닉네임으로 부르며 몇 년 동안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로 지냈었다. 그게 그들만의 울타리처럼 보였다.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닉네임을 부르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면 모두 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각자의 마음에 서로를 향한 사랑이나 거절, 질투와 같은 마음이 생기면서 관계는 조금씩 어긋나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었다.

영원할 줄 알았던 관계는 한순간의 어긋남으로 끝나게 되기도 한다. 서로에게 날을 세우며 나쁘게 끝난 게 아닌 어느 순간 깨닫게 되어 멀어진 관계가 왠지 모르게 더 아프게 느껴졌다. 예전과 같은 관계가 그리워도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슬프게 만들었다.

 

<그 여름>과 <고백>은 레즈비언에 관한 소재를 담고 있었지만 느껴지는 감정은 완전히 달랐다.

<그 여름>은 보편적인 사랑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여자의 사랑이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누군가가 알아챌까 봐 학교 다닐 땐 숨기기에 급급했지만, 대학에 간 후에 두 사람은 다른 연인들처럼 지냈다. 그러다 서로의 다름과 새로운 사랑으로 인해 이제는 끝을 내야 할 때가 왔을 때, 이미 그 기미를 느끼고 덤덤하게 이별했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그만한 사랑은 다시없었다는 걸 오래도록 곱씹는 것은 선택을 한 사람이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고백>에서 미주가 고등학생 때 친구 진희의 커밍아웃을 들은 후 일어난 사건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만큼 진희에겐 두 친구가 소중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칼로 찌르는 듯한 말이었고 자신도 채 깨닫지 못한 감정이었다. 때로는 말보다 표정이 더 상처가 될 때가 있다. 감추고 싶어도 감춰지지 않고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는 감정은 무작정 나오는 말보다 때로는 진심을 온전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비수가 된다. 누군가를 죽이는 건 칼이나 총뿐만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의 말과 눈빛이기도 했다. <고백>을 읽으며 나도 무심결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겠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반성하게 됐다.

 

<601, 602>를 통해서는 남성우월주의를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집안에 대해 말하며 그걸 지켜보는 주영의 집도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줬다. <지나가는 밤>과 <손길>은 가족과 가족처럼 지낸 관계가 틀어진 후의 회상을 보여주는데 왠지 모를 애틋함이 남았다. 좋았을 때와는 달라진 관계라고 할지라도 그때의 감정까지 나쁘게 바뀌지 않았고, 각자의 사정을 이해하면서는 회복의 여지가 남기도 했다.

 

일곱 편의 단편 소설이 실린 소설집은 흘러가는 마음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상대방을 향한 마음이 사랑이기도 했고 우정일 때도 있었으며 때로 부모는 아니지만 그런 비슷한 마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들은 끊어지거나 끊어냈고 혹은 다시 이어지기도 했다. 타인과의 관계는 모두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눈물이 고였던 적이 두세 번 있었다. 그저 일상을 이야기하거나 이야기 속 누군가의 마음이 드러나는 부분인데 괜스레 울컥하고 말았다. 비슷한 경험을 한 추억이 떠올라 행복해서 공감한 부분 외에는 화자의 감정이 온전히 느껴져서인 것 같다. 울리려고 작정한 글이 아니라서 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최은영 작가의 책은 <쇼코의 미소>만 읽었었는데 이 책도 정말 좋았다. 덤덤하지만 마음을 건드리는 감성적인 글이 정말 좋았다.

 

 

 

어떤 사람들은 벼랑 끝에 달린 로프 같아서 단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안도감을 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모래도 내게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에게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나를 세상과 연결시켜준다는, 나를 세상에 매달려 있게 해준다는 안심을 준 사람이. 그러나 모래에게도 내가 그런 사람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모래로 지은 집> - P162.163

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얼굴 앞에서 거스를 수 없는 슬픔을 느끼니까. 너의 이야기에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에게 또다른 수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 <고백> - P208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막으면 막아지고 닫으면 닫히는 것이 마음이라면, 그러면 인간은 얼마나 가벼워질까. <손길> - P225

중력도 마찰도 없는 조건에서 굴린 구는 영원히 굴러간다.
언젠가 네가 한 말을 난 종종 떠올렸어. 영원히 천천히 굴러가는 공을 생각했어. 그 꾸준함을 상상했어. 이상하게도 눈을 감고 그 모습을 그려보면 쓸쓸해지더라.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 모습이 어쩐지 외로워 보여서. 그래도 우린 중력과 마찰력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구나. 가다가도 멈출 수 있고, 멈췄다가도 다시 갈 수 있는 거지. 영원할 순 없겠지만.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모래로 지은 집>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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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은 방 열린책들 세계문학 28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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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허니처치는 사촌 언니 샬롯과 함께 피렌체 여행을 왔다. 그런데 도착한 숙소인 펜션에서 방을 잘못 주는 바람에 기분이 잔뜩 상했다. 전망 좋은 남쪽의 붙어있는 두 방을 주기로 해놓고 북쪽에 전망도 안 좋은, 서로 멀리 떨어진 방을 내줬기 때문이다. 식사를 하는 식당에서 이런 불평에 관한 대화를 들은 다른 투숙객 에머슨 씨가 자신과 아들 조지의 방과 바꿔주겠다고 말했다. 자신들은 남자라 전망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루시의 보호자인 샤프롱으로 여행에 동행하게 된 샬롯은 표면상으로는 낯선 남자의 호의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어서 거절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 노신사의 행색부터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연찮게 루시가 사는 곳의 교구로 올 예정인 비브 목사를 펜션에서 만나 그의 중재 덕분에 전망 좋은 방으로 바꾸게 된다.

 

루시는 몸이 안 좋은 샬럿 대신 펜션 숙박객과 함께 관광을 나섰다가 졸지에 버려지고 만다. 일행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루시를 잊어버리고 떠나는 바람에 혼자 남겨져 어쩔 줄을 몰라하는 그녀 앞에 에머슨 부자가 나타났다. 덕분에 루시는 안심을 하고 성당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고, 에머슨 씨에 대한 인상이 보기와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반면에 조지는 뭔가 예민한 느낌이 들어 꺼려지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에 우연히 일어난 사건으로 두 사람 사이에 스스로도 깨닫지 못할 만큼 어떤 기운이 감돈다. 그리고 펜션 투숙객과 목사 두 명과 함께 마차를 타고 소풍을 나갔던 날, 제비꽃이 흐드러지게 핀 곳에서 조지가 루시에게 키스를 하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든 서로를 잊을 수 없게 된다.

 

 

 

1908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아직 계급이 존재하던 사회였다. 거기다 주인공들은 모두 영국인이었는데, 현대에는 사라졌다고는 해도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는 국가가 배경이었으니 100여 년 전엔 더 심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의 여자는 누군가에게 예속되어야만 했다. 루시는 혼자 여행할 수 없는 젊은 아가씨였기 때문에 "샤프롱"이라는 명칭의 보호자인 사촌 언니와 동행할 수밖에 없었고, 집안에서는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어머니께, 그리고 나중엔 남편에게 예속된 삶을 살아야 했다. 여성에겐 자주성이 보장되지 않았다.

하지만 루시는 그 시대의 여성보다는 현대의 여성에 가까웠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했고, 보고 싶은 걸 보려고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시대가 여자를 바라보는 눈이 너무나 엄격해서 루시는 원하는 걸 쉽게 할 수 없었다. 루시가 베토벤의 곡만 연주한다고 주변에서 예민하니 어쩌니 왈가왈부하는 걸 보며 피아노 연주 하나도 제 마음대로 못하는 삶이 너무 답답했다. 물론 루시는 자기가 치고 싶은 곡 외에 다른 곡은 연주하지 않았다.

 

이런 루시에게 푹 빠지게 된 조지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무뚝뚝해 보이면서 신사다운 면이 있었고 예의도 바른 모습을 보여줬다. 소심한 것 같으면서도 루시에게 갑자기 키스를 하는 모습에서는 저돌적인 면이 있어서 딱히 어떤 타입의 사람이라 정의 내릴 수 없었다.

반면에 루시에게 세 번이나 청혼을 해서 허락을 얻어낸 세실은 딱 그 시대, 구시대의 남자였다. 허니처치가로 돌아온 루시에게 한 세 번째 청혼이 받아들여지자, 집안의 가구를 바꿀 생각 먼저 했다. 돌아가신 루시의 아버지가 남긴 것이라 어머니도 손을 대지 않고 있는데, 감히 예비 사위 따위가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하다니 너무 속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세실은 도무지 굽힐 줄을 몰랐고, 싫은 건 절대 안 하는 사람이었다. 루시의 동생 프레디가 짝을 맞춰 테니스를 치자고, 못 해도 괜찮다고 하는데도 자기는 테니스를 안 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이 테니스를 칠 때 옆에서 책을 읽으며 이 부분은 꼭 들어봐야 한다고 읽어주며 듣기를 강요하기도 했다. 정말이지 너무 싫은 타입이었다.

이런 사람이 청혼을 받아들인 루시를 어떻게 대할지는 안 봐도 훤했다. 그나마 아직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서 그렇지, 다 뜯어고치려고 이미 계획을 다 짜두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루시가 어쩌다 이런 사람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됐는지 의문이다. 직업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겉만 번드르르 한 남자인데 대체 무엇을 보고 그와 약혼까지 하게 됐을까. 아무래도 시대의 영향이 적잖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루시가 아무리 깨어있는 여성이었다고 할지라도 주변 사람들은 아직까지 구시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그랬을 테고, 함께 여행하는 동안 샬럿에게 들은 잔소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루시는 마음이 없다는 걸 깨닫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세 번이나 청혼하는 남자를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청혼을 받아들인 이후에 루시는 세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좋은 면만 보려고 애를 썼다. 그의 행동이나 표정, 말투에서 훤히 드러나는 남을 향한 멸시를 보고도 못 본 척, 애써 모른 척했다.

 

하지만 다행히 세실이 타인을 습관적으로 무시하는 버릇 때문에 피렌체를 떠난 이후 다시 만날 수 없었던 루시와 조지가 재회하게 된다. 역시 사랑은 삼각관계가 되어야 재미있듯, 조지가 등장한 이후로 어찌나 스릴이 넘쳤는지 모른다. 특히 테니스를 친 후 세 사람만 남았다가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세실이 안 볼 때 조지가 루시에게 키스하는 장면은 짜릿했다. 들키면 난리가 나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더 흥미진진했다.

그 후에는 여러 사건들이 한꺼번에 몰아쳤고, 순진한 루시가 제 마음도 모르고 괜히 고생할 뻔하는 과정도 이어졌다.

 

이 소설은 두 번째 읽는 거라 이미 결말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초반에 방을 바꿔준 부분과 해피엔딩인 결말 외에 중간 내용은 전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심지어 세실이 어떤 인간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워낙 밉상 캐릭터라 잊을 수 없었을 텐데 예전엔 대체 책을 어떻게 읽은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무튼, 다행스럽게도(?) 과정이 기억나지 않았던 덕분에 읽는 동안 심장이 콩닥거렸다. 조지가 루시에게 키스하는 두 번의 장면이 어찌나 로맨틱했는지 모른다. 문장 자체가 너무 아름다워서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루시가 세실을 보면 "전망이 없는 방"이 떠오른다고 했던 부분은 너무 웃기고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이라 감탄했다.("갑갑"보다는 "깝깝"한 세실.)

 

고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예스러운 분위기의 로맨스 소설이라 좋았다. 피렌체의 풍경이나 허니처치가의 자연 친화적인 저택, 숲 등의 배경을 상상하며 읽으니 더욱 로맨틱했다.

책을 읽었으니 80년대에 제작된 영화도 나중에 꼭 챙겨 봐야겠다.

 

 

 

인생은 정리하기는 간단하지만 실제로 살기는 혼돈스러우며, 우리는 언제나 <신경>이라든가 다른 피상적인 말들로 내면의 욕망을 가려 덮으려고 한다. 그녀는 세실을 사랑했다. 조지는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누가 그녀에게 두 문장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해 줄 것인가? - P176

「그 사람은 여자에게 결정권을 주지 않아요. 유럽을 천년 동안 붙잡아 매둘 부류의 사람입니다. 그는 매 순간 당신을 자기 뜻대로 빚어내고, 당신이 어떻게 해야 매력적이고 흥미롭고 여성스러울 수 있는지 가르쳐 줄 겁니다. 남자가 생각한 여자다움을 말이에요.
(……중략)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보다는 제 사랑의 방식이 더 낫다고 확신합니다. 맞아요……. 제 방식이 더 낫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 품에 안겨서도 당신 자신의 생각을 하기를 원합니다.」 - P204.205

조지는 그녀가 도착하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그는 잠시 동안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빛나는 기쁨을 보았고, 꽃들이 그녀의 드레스로 말려들어 푸른 파도를 일으키며 부딪치는 것을 보았다. 위쪽의 덤불숲이 닫혔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 P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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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위크
강지영 외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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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및 간략한 내용

 

전건우 × 프롤로그 & 에필로그 별 볼 일 없는 20대 세 친구 중식, 현우, 태영은 우연히 주운 권총을 사용해 현금수송차량을 털기로 한다. 세 친구 중에 제일 머리가 좋은 현우가 완벽한 계획을 짜 뒀다. 그런데 막상 실전에 들어가자 계획은 하나도 들어맞지 않았다. 현금수송차량에 탄 사람이 세 명이라 알고 있었는데 네 명이라 묶을 끈이 부족했다. 트럭은 오토가 아닌 스틱이라 운전을 할 수도 없었으며, 돈 가방을 들고 도망치는데 어마어마하게 무거워 죽을 만큼 힘이 들었다. 세 친구는 "어위크"라는 편의점에 일단 들어가 아르바이트생 한주를 인질로 잡는다.

정명섭 × 대화재의 비밀 얼마 전 경운궁에서 화재가 나 전각들이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그 잔해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평리원 검사 이준을 "손탁 빈관"의 손탁 여사가 찾았다. 화재 사건과 관련하여 일본 공사관 측이 수상한 행동을 보였다는 소식을 들은 손탁 여사는 이준에게 사건을 파헤쳐 달라고 하며 통역으로 박에스더를 붙여주었다.

 

김성희 × 옆집에 킬러가 산다 14살에 미국에 팔려가 킬러로 길러진 "나"는 사건 의뢰를 받아 한국에 돌아왔다. 산업 스파이를 찾아내 살해하는 임무라 의심되는 사람의 아파트 옆집에 살게 된 나는 온갖 훈련으로 숙련된 킬러였는데도 도통 참을 수가 없다. 층간 소음은 물론 벽간 소음으로 인해 좌우, 위아래, 대각선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낱낱이 알게 됐기 때문이다.

노희준 × 당신의 여덟 번째 삶 어떤 노인 앞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나타났다. 자신의 복제인간인 줄 알았지만 그는 아니라고 말하며 노인이 만든 타임머신을 통해 죽은 아내 클라라를 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신원섭 × 박 과장 죽이기 수진은 민에게 남편 박 과장을 죽이고 싶다고 말했다. 민은 수진의 말이 그저 우스갯소리인 줄 알고 보험금에서 1억 원만 떼어달라고 했지만, 수진은 왠지 진심인 것 같다. 그리고 얼마 후, 수진과 박 과장, 민은 함께 출장을 가게 됐다. 평소에는 그럴 일이 없는 수진이 물건을 두고 오고 박 과장의 천식약을 바꿔 가지고 온 걸 보니, 민은 오늘이 디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진에게 그때의 대화를 언급하지만 무슨 소리냐는 듯한 시선만 받는다.

강지영 × 러닝패밀리 고등학교 교사 다영은 요즘 아이들이 "러닝패밀리"라는 게임에 매달리고 있는 걸 이해할 수 없다. 게임 속 캐릭터가 죽으면 그 숫자만큼 사람이 사라진다는 도시괴담을 도통 믿을 수가 없는데, 아이들은 철석같이 믿으며 캐릭터가 죽으면 슬퍼서 울기까지 한다. 이런 상황에 핸드폰이 없어서 게임을 하지 않는 유일한 아이 선우가 얼마간 학교에 나오지 않아 다영은 집에 직접 찾아간다. 재개발 예정지라 사람이 살지 않은 것 같은 동네에 있는 선우의 집에 찾아갔더니, 안방에 있는 기이한 구멍에 선우의 팔 한쪽이 빠져있었다.

 

소현수 × 아비 보영의 남편 병철은 음주운전 사고로 어린 여자아이를 치여 죽이고 본인도 즉사했다. 그 사고 이후로 보영은 밤마다 병철이 소름 끼치는 귀신에게 죽임을 당하는 꿈을 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여자아이의 이모라는 호희가 찾아온다. 사죄의 말을 꺼내는 보영에게 호희는 꿈을 꾸지 않냐고 묻는다. 놀란 보영이 꿈 이야기를 하자, 아이의 할머니이자 자신의 신어머니인 무속인 태령이 병철에게 복수를 하며 고쳐 죽이고 있다고 했다. 영원히 갇혀서 고통받는 무간지옥, 아비라고 했다.

정해연 × 씨우세클럽 세븐위크 유통체인 회장 백광우가 성희롱과 안하무인으로 기사에 오르내렸다. 뉴스를 본 시민들은 자회사 중 한 곳인 "어위크" 편의점 불매 운동에 나섰다.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진 것에 불만을 가진 편의점 점주 다섯 사람이 "씨우세클럽"을 만들어 백광우의 이미지를 회복시킬 작전을 짰다. 계획이 나름 성공해 매출은 그나마 회복되었지만 백광우가 언제 또 사고를 칠지 몰라 전전긍긍해 한다. 그러는 와중에 백광우가 씨우세클럽 멤버들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여덟 명의 작가가 쓴 단편소설은 이렇다 할 공통점이란 것은 없었다. 배경은 대한제국부터 현대, 언제인지 모를 미래까지 다양했고, 장르도 SF와 추리, 스릴러, 오컬트, 멜로 등 가지각색이었다. 단 하나의 공통점은 어위크 편의점이 적어도 1회는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숨은 그림 찾기처럼 등장하는 편의점이었지만 다양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단편집이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편의점으로 이야기의 문을 열고 닫았다. 인질로 잡혔지만 왠지 모르게 여유로워 보이던 아르바이트생 한주가 들려주는 일곱 가지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한주의 이름이 "어위크"와 같은 뜻이란 걸 리뷰를 쓰면서 깨달았다.

 

워낙 장르가 다양해서 각각의 매력이 있던 단편소설이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공감되고 웃겼던 건 김성희 작가의 <옆집에 킬러가 산다>였다. 갖은 훈련을 받은 능숙한 킬러조차 무너뜨리고 분노할 뻔하게 만들 만큼 아파트 소음 문제는 심각했다. 이웃들의 소음이 어찌나 다양했는지 모른다. 발을 쿵쿵대는 건 기본이고 술 파티, 아동 학대, 밤낮을 가리지 않는 음란행위까지 화가 나고도 남을 이유였지만, 킬러는 각고의 노력으로 참고 또 참다가 나중에 펑 터트렸다. 그 장면이 정말 속 시원했다. 특히 음란행위를 일삼던 직장인이 제일 쌤통이었다.

비슷하게 웃겼던 건 <씨우세클럽>인데, 대기업 회장이나 임원의 갑질 행각이 실제로 여러 번 터져서 그런지 왠지 공감됐다. 돈이 많다고 사람들을 모두 발밑에 두고 행동한 이런 인간들로 인해 괜히 가맹점 사장들만 피를 본다. 회장이 사고를 치지 않게 막으면서 미화시키려고 하는 씨우세클럽 멤버들의 노력이 괜히 안타까웠다. 추리를 기본으로 하며 나름 코믹한 부분도 있어서 가볍게 읽었다.

 

<대화재의 비밀>은 역시 추리 장르인데 짧게 끝내기엔 왠지 아쉬웠다. 실존 인물인 독립운동가 이준 선생님과 손탁 여사가 등장해 화재의 비밀을 밝히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역사에 허구를 담은 팩션이라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아비>는 섬뜩해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남편을 몇 번이고 죽이는 태령의 묘사가 정말 무시무시했다. 음주운전으로 자신과 어린아이를 죽인 남편이 영원히 고통받는 아비, 그곳에서 조카의 혼과 원망스러운 남편을 구하려고 하는 호희와 보영의 모험이 제법 스릴 있었다. 그러고선 마지막에 뒷골을 서늘하게 만든 결말이 충격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무섭다.

 

셰에라자드의 천일야화처럼 이 소설은 이레야화였다.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던 한 편을 제외하고는 읽는 동안 각각의 재미를 느꼈다. 그리고 이 책 덕분에 이름도 낯설었던 작가들도 알게 되어 좋았다.

 

 

 

"전 여러 이야기를 알고 있어요. 아주 다양한 이야기들. 분명 들으면 재미있어 하실 거예요." 전건우 <프롤로그> - P39

모든 사람은 연결되어 있어서, 모두가 모두를 위해서 살지 않으면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어. 노희준 <당신의 여덟 번째 삶>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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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9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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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긴 소년 구스토 한센은 양부모의 손에 자랐다. 천성이 나쁜 구스토는 어릴 때부터 반항을 일삼으며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땐 양엄마와 성관계를 가졌고,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양아빠가 그 광경을 목격하게 만들었다. 구스토로 인해 집안이 파탄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집의 친아들은 구스토를 죽도록 미워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여동생 이레네는 구스토를 잘 따랐다.

더 이상 그 집에 붙어있기 싫었던 구스토는 가출을 한 이후 마약을 팔기 시작했고, 수완이 좋은 그를 눈여겨본 "두바이"라는 마약 거물이 스카우트해 더 많은 돈을 벌게 됐다.

 

노르웨이 항공사의 조종사 토르 슐츠는 해외 비행에 나갈 때마다 한껏 긴장돼 있다. 이혼 이후 돈에 쪼들리는 그에게 누군가가 마약 운반책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해왔기 때문이다. 승객보다는 감시가 덜한 편인 조종사라는 직업을 이용해 마약을 외국으로 운반하거나 혹은 노르웨이로 들여오면 꽤나 짭짤한 수입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마약 탐지견이 토르 슐츠의 가방을 콕 집었고, 규정 무게를 넘긴 가방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설명해야만 했다.

 

3년 전, 홍콩으로 떠난 해리는 갑작스럽게 귀국하여 허름한 호텔에 단출한 짐을 풀었다. 그리곤 곧장 옛 보스인 군나르 하겐 반장을 찾아가 마약 살인사건을 수사하고 싶다고 말한다. 군나르 하겐은 경찰청 내에서 해리에게 호의적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해리가 부탁한 감옥 면회에 관한 건은 들어줬다. 감옥에 도착한 해리는 구스토 한센의 살인 혐의로 수감된 라켈의 아들 올레그를 만난다.

 

3년 만에 해리 홀레가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한쪽 뺨에 길게 난 흉터를 가진 그는 이전에 홍콩에서 알던 사람의 사업을 도와주며 제법 잘 나갔고, 끊을 수 없을 것 같던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아 사람다워졌다.

다시는 오슬로에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해리가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올레그 때문이었다. 해리는 라켈을 사랑한 만큼이나 그녀의 아들 올레그 역시 사랑했다. 자기 핏줄은 아니었지만 성심껏 아버지 노릇을 했고, 올레그 또한 해리를 종종 아빠라 부를 정도로 잘 따랐다. "스노우맨" 사건으로 라켈과 올레그의 신변이 위험하지 않았더라면 진작 가족이 되고도 남을 그런 관계였지만, 안타깝게도 해리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은 위험해지거나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멀어져야만 했다.

 

그런데 그렇게 친자식처럼 아낀 올레그가 마약을 하며 누군가에게 판매를 한 것도 모자라 살인까지 저질렀다고 하니 해리는 당장에 날아올 수밖에 없었다. 해리가 아는 올레그는 살인 따위를 저지를 아이가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사권이 없는 해리는 예전부터 친했던 베아테의 도움을 받아 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먼저 둘러보았다. 아쉽게도 딱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고 베아테의 말에 따르면 모든 증거가 올레그를 가리키고 있어서 빼도 박도 못하는 듯했다. 더군다나 감옥에 찾아간 올레그는 떠나버린 해리를 증오하며 사건에 관한 그 어떤 말도 하려 하지 않았다.

해리로서는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 신분이 아니라서 정식으로 알아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베아테의 도움을 받는 것 역시 그녀의 입지를 위태롭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예전 신분증을 이용해 하는 데까지 조사를 했고, 때로는 누군가를 협박해서 통화 기록 같은 정보를 빼내기도 했다.

 

해리의 비공식 수사를 중심으로 여러 사람의 시점이 등장했다. 이미 죽은 구스토의 시점에서는 그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보여주며 올레그를 어떻게 만나 친구가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마약 운반책인 비행기 조종사 토르 슐츠도 초반에 등장해 여러 미끼를 던졌지만, 왠지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사람은 아닌 것 같더니 역시나 중간에 살해당했다.

이들 외에 중요한 건 두바이의 경찰 끄나풀로 활동하는 트룰스 베른트센의 시점도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전 시리즈에서 해리와 부딪치는 것 같으면서도 업무상 협조를 해야 했던 미카엘 벨만의 어린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이자 현재는 온갖 더러운 일을 대신해 주는 사람이었다. 풍기는 분위기가 워낙 음침해서 구스토 사건에 중요한 용의자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대신 미카엘 벨만과 접점이 많은 인물이라 트룰스의 시점에 미카엘이 자주 등장했는데, 이 인간은 머리가 너무 좋은 탓인지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대신 의심의 연기만 여기저기 잔뜩 피워놓았다. 미카엘 벨만의 정체는 언제쯤 밝혀질는지 궁금하다.

 

이들 외에도 여러 사람이 등장했지만, 왠지 모르게 수상한 느낌을 풍기던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 끝난 줄 알고 홍콩으로 가려던 해리가 다시 돌아와 그 사람과 마주하면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비밀이 밝혀졌다.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 그런지 생각하는 것도 이상했던 사람이었다. 머릿속에 자신의 일, 업무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듯했다. 그런 점에서 해리와 완전히 반대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그 사람이 구스토를 죽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다시 한번 뒤집혀 역시나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을 보여줬다. 그야말로 추락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그럴 줄은 몰랐던 사람이라 충격을 받았다. 과연 이 이후에는 그 사람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하지만 최근 나온 시리즈의 줄거리를 보니 잘 지내는 듯.)

 

해리의 행동을 보면 싫어해야 할 요소가 다분한데도 어쩐지 응원하게 된다. 경찰인데 알코올중독자이고 사람을 워낙 가리는 편이라 누군가에게는 거만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며, 상사조차 곤란하게 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근데 매력적인 건 능력이 너무나 뛰어나고 자신이 신뢰하는 몇 안 되는 동료들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며 오로지 라켈만을 사랑하는 순정파라는 것이다. 물론 다른 여자 몇 명과 섹스를 했었고 이전 시리즈인 <레오파드>의 카야와는 잘 되는 것 같다가 홍콩으로 떠나버리기도 했지만, 해리의 마음속에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라켈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해리를 응원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측은지심 때문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짧게 스쳐간 연인은 물론이고 동료와 상사까지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이 시리즈를 9권째 읽고 있는데 해리에게 이런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농담 삼아 하는 말로 작가가 주인공 안티라고 할 정도니 말 다 한 셈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가까운 누군가가 죽거나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대신 뒤통수를 워낙 세게 때려서 마음의 상처가 좀 클 것 같긴 하다.

 

전작과는 다르게 분량이 조금 줄어들어 500페이지가 넘는, 나름 짧은(?) 시리즈였다. 해리 홀레 시리즈가 600~700페이지가 기본인 벽돌책이라 그런지 500페이지를 훌쩍 넘긴 이 책은 짧아서 금세 읽었다. 좋아하는 시리즈이고 재미있기도 해서 금방 읽을 수 있었다.

"넌 늘 나한테 거는 기대가 너무 커, 올레그. 너무 커. 나 역시 네가 나란 인간을 더 좋게 봐주길 바란 것도 있고."
올레그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보았다. "아이들은 원래 아버지를 영웅으로 보는 거 아닌가요?" - P330

"올레그는 자네를 사랑했네. 아비가 아들에게 받고 싶은 그런 사랑. 열정 넘치는 도덕주의자인 데다 우리처럼 사랑에 굶주린 아비들은 패기가 어마어마하지. 우리의 약점은 예측 가능하다는 거야." - P504.505

"내가 도망쳤다고 생각하지 말아주길 바랐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는 일들이 있거든.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네 곁에 없다고 해서 네가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 아닌 건 아니란 뜻이야.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누구나 다 갇힌 신세야. 세상사의 감옥에. 우리 자신의 감옥에."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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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타임슬립 필립 K. 딕 걸작선 1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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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은 10년 전 정신분열증으로 인한 괴로움에 갑작스럽게 화성 이민을 결정했다. 살고 있는 집을 팔고 아내 실비아, 아들 데이비드와 함께 화성으로 이주한 그는 기계 수리 기사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화성에서는 고장 난 기계를 지구에서 배송받는 데 들이는 시간과 비용에 비해 고쳐서 쓰는 게 훨씬 절약되기 때문이었다.

미스터 이의 회사에 소속된 잭은 헬리콥터를 타고 방문 수리를 가던 중, UN으로부터 화성 원주민 "블리크맨"이 위험에 처했으니 도와주라는 연락을 받는다. UN의 지시를 무시하면 벌금을 물어야 하기 때문에 무조건 도와야 했다. 잭은 탈수증세를 보이는 블리크맨에게 물을 나눠주고 보답으로 말라비틀어진 물건을 받는다. 물의 정령이라는 그 물건은 언제든 원할 때 물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수자원노동조합장 어니는 화성의 부유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구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신세였지만, 화성 이민을 빠르게 결정한 덕분에 물이 부족한 화성에서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고 블리크맨 하인까지 두는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그런 그가 관심을 갖게 된 분야는 미래였다. 현재엔 미개발지지만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통해 UN이 개발 예정인 땅을 미리 사서 부를 더 늘릴 심산이었다. 전처 앤을 만나러 가다 잭과 마주쳤었던 어니는 기계를 수리하겠다는 명분으로 그를 불러들여 가깝게 지내면서 지구에 있는 잭의 아버지가 화성의 땅을 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일을 맡기기로 한다.

 

지구에서 고급 식료품을 밀수하는 노버트는 이웃에 사는 잭 가족도 모르는 아들 만프레드가 있다. 만프레드는 자폐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뉴 이스라엘 지역의 특수시설에 보내두었다. 노버트는 만프레드를 만나서 줄 선물을 사러 갔다가 주인 앤에게서 자폐증 아이들에 관한 법안이 상정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특수시설이 폐쇄되고 자폐증, 정신분열증 아이들은 안락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만프레드에 대한 걱정과 이제는 해방될지도 모른다는 양가적 감정이 동시에 생긴 노버트는 아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차에 몸을 던진다.

 

 

 

SF 소설의 거장 필립 K. 딕의 소설은 단편만 세 권 읽었다. 영화화된 작품들이 많이 실린 단편이라 나름 흥미로웠고 재미도 있었다. 이번엔 장편을 좀 읽어보고 싶어서 이 책을 선택했다.

화성으로 이민을 갈 수 있는 가상의 미래 시대지만, 작가가 소설을 썼을 당시에는 미래였어도 우리에겐 20년도 더 된 199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화성이 지구 환경과 가장 비슷하다고들 한다. 물의 흔적이 있고 산의 흔적도 있으며, 생명체의 발자국도 발견됐다는 음모론 아닌 음모론도 있다. 하지만 화성 하면 떠오르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건조, 메마름 따위라 그런지 소설의 설정도 그런 걸 잘 반영하고 있었다.

 

 

 

 

UN이 우주까지 확장되어 수자원을 통제하고 있기는 해도 물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 자가 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게 바로 어니였다. 지구에서 가지지 못했던 걸 화성에 와서야 손에 넣었기 때문인지 어니는 부에 대한 욕심이 가득했다. 그래서 신빙성 없는 방법까지 동원해 더 가지려고 들었다.

이 상황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 노버트의 아들 만프레드였다. 노버트가 자살한 이후 시설의 담당 정신과 의사 글러브 박사가 어니에게 아이를 추천했고, 잭이 우연찮게 어니와 만나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잭이 지구에 있을 때 정신분열증을 앓았다는 사실을 안 어니는 만프레드와 소통할 수 있는 기계를 잭에게 만들어달라고 한다. 잭은 만프레드를 데리고 다니면서 다 나은 줄 알았던 정신분열증이 다시 나타나는 걸 느낀다.

 

미래 배경의 SF 소설이라 뭔가 상상력이 가득한 이야기를 보여주리라 예상했는데, 그것보다는 정신 의학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자폐를 가진 만프레드가 보는 세상은 너무나 빨랐다.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게 그에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 적응을 할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세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해 줬던 게 잭이었다. 잭이 10여 년 전에 정신분열증으로 고생했었기 때문에 만프레드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지 알고 있었다. 처음에 잭은 어니의 지시대로 만프레드와 소통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지만, 이후엔 어니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 말하며 그만두길 강력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세상을 물질적인 시선으로만 보는 어니가 자신에게 이익이 될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고, 어느 정도가 지난 후에는 현실 구분이 되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마치 만프레드가 보는 세상을 어니에게 씌워둔 것 같았다. 느리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환상이라 믿었지만 그것은 현실이라 끔찍한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성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 이 소설은 지구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게 특징이었다. 어디를 가나 가진 자들은 과거로 가서라도 더 가지기를 원했다. 사람을 이용하는 일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이기적인 인간은 다른 환경에서도 여전한 법이었다.

 

자폐나 정신분열증을 가진 사람의 눈에 세상은 이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들이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건 너무나 빠르기 때문이라는 말에 수긍했다. 어니와 만프레드 사이에 잭이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어니의 흐름대로 만프레드를 이끈다면 아이는 감당하기 어려워 폭발할지도 몰랐다. 화성 원주민 블리크맨도 잭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만프레드가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보다는 블리크맨과 소통하고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책의 간략한 줄거리에 호기심이 생겨 읽게 된 책인데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전개를 보였다. 여러 사람이 등장해 바람도 피우고 누군가의 계략으로 사업이 망해 살인을 저지르고 화성 원주민까지 등장했지만, 각기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없었다. 잭이 초반에 블리크맨에게 물의 정령이라는 물건을 받았을 때 중요하게 쓰이겠구나 생각했는데, 사용하는 걸 보여주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이외에도 여기저기에 눈길을 끌만한 요소를 심어두었지만 지나쳐도 될 것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결말까지 다 읽고서는 좀 아쉬웠다. 필립 K. 딕의 단편집을 읽을 땐 신선함 덕분에 매번 감탄을 했었는데, 이 책은 제목이나 소설 초반을 읽고 예상했던 내용과는 너무 달랐다. 블리크맨을 예시로 삼은 인종차별에 관한 문제와 자폐증과 같은 증상을 가진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가지는 부분이 눈에 띄긴 했지만 두드러지진 않았다. 아무래도 다른 책을 한번 읽어봐야겠다.

"이 ‘공립학교‘하고 너희들 같은 티칭머신들은 다음 세대의 정신분열증 환자들을 키우고 있는 거야. 나처럼 이 새로운 행성의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는 사람들의 자손들을 정신분열증으로 만들고 있다는 뜻이지. 너희들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환경을 기대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아이들의 정신을 분열시킬 거야. 그런 환경은 이제 지구에서조차도 사라져버렸어." - P139

"만프레드는 단지 미래를 예지하는 것 이상의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들어.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를 제어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나 할까. 여러 가능성 중에서 최악의 결과를 불러오는 재능이 있는 것 같아. 만프레드에게는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고, 현실이니까. 마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저 아이의 현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만프레드의 현실이 우리를 침식하고, 우리의 인식을 대체해버리는 거야. 그 결과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익숙해진 사건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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