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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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및 간략한 내용

 

그 여름 이경과 수이는 열여덟 살 여름에 처음 만났다. 수이가 찬 공에 맞아 이경의 안경이 부러지고 코피가 난 이후, 수이는 매일같이 이경의 반에 찾아왔다. 둘은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됐고,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게 됐다. 성인이 되어 각자 다른 길을 선택했어도 둘 사이는 변하지 않을 줄 알았지만, 마음이라는 건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달라지고 만다.

601, 602 "나"의 가족은 다섯 살 때 광명의 주공아파트로 이사했다. 옆집에 살던 효진은 나와 동갑에 생일도 이틀 차이라 가까운 단짝이 되었다. 서로의 집에 자주 놀러 가기도 했었는데, 어느 날 효진의 오빠 기준이 동생을 죽도록 때리고 있는 걸 목격했다. 그때 거실에는 효진의 부모가 있었지만 누구도 기준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효진이 잘못해서 맞고 있는 거라고 하며 폭력을 용인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밤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윤희는 면접을 보기 위해 오랜만에 한국에 왔다. 윤희가 귀국했다는 사실을 안 동생 주희는 자신의 집에 머무르라고 말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는 그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 같은 자매 사이였지만, 주희가 나이 많은 남자의 아기를 임신해 결혼생활을 시작하자 윤희는 그 꼴을 도무지 보고 싶지 않아졌다.

모래로 지은 집 "나"와 공무, 모래는 천리안 동호회에서 만난 같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서로를 몰랐지만 통신을 통해 알게 됐고, 동호회가 폐쇄된다는 공지에 정모를 하기로 했다. 그 자리에 나온 사람은 세 사람은 이내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된다. 시간이 될 때마다 만나고 함께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서로에게 내보일 수 없는 마음은 숨긴 채였다.

 

고백 수사가 되기 전 마지막으로 사귄 여자친구 미주가 고등학생 때의 이야기를 했다. 주나와 진희라는 친구 셋이서 단짝으로 지냈었던 기억으로 이야기가 시작됐다. 홀수라서 셋 중 한 명이 소외되기도 해서 조금은 섭섭한 감정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들 셋은 서로에게 모든 것을 내보일 수 있었던 사이였다. 열여덟 살 생일에 진희가 여태껏 말하지 않았던 것을 고백하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손길 혜인은 일곱 살부터 열한 살까지 숙모의 손에 길러졌다. 삼촌과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숙모는 당시에 20대 초반이었고 남편의 조카인 혜인을 보살펴야 했음에도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혜인을 즐겁게 해주려고, 웃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집안 모임이 있을 때마다 어른들이 숙모를 보고 혀를 차는 걸 보며 혜인은 숙모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혜인이 다시 부모의 집으로 돌아간 뒤, 고등학생 때 삼촌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숙모는 인사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치디에서 여행을 온 여자와 데이트를 하던 랄도는 그녀가 자기 나라로 돌아간 이후 연락이 되지 않자 아일랜드로 향했다. 집 앞에서 만난 그녀에게서 둘은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사실을 듣게 된 랄도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지만 화산 폭발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려야 했다. 가지고 온 돈은 모두 바닥이 나고, 이전부터 방탕했던 자신의 행실 때문에 엄마, 누나에게 거의 절연당한 랄도는 누군가에게 부탁해 시골에 있는 과수원에서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랄도는 한국에서 온 하민을 만난다.

 

 

 

다양한 이야기가 실린 단편집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가장 긴 분량의 <모래로 지은 집>이었다. 같은 고등학교 동창 세 명은 서로 너무나 달라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폐쇄된 인터넷 동호회를 먼저 알게 된 덕분인지 서로를 진짜 이름보다는 닉네임으로 부르며 몇 년 동안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로 지냈었다. 그게 그들만의 울타리처럼 보였다.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닉네임을 부르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면 모두 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각자의 마음에 서로를 향한 사랑이나 거절, 질투와 같은 마음이 생기면서 관계는 조금씩 어긋나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었다.

영원할 줄 알았던 관계는 한순간의 어긋남으로 끝나게 되기도 한다. 서로에게 날을 세우며 나쁘게 끝난 게 아닌 어느 순간 깨닫게 되어 멀어진 관계가 왠지 모르게 더 아프게 느껴졌다. 예전과 같은 관계가 그리워도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슬프게 만들었다.

 

<그 여름>과 <고백>은 레즈비언에 관한 소재를 담고 있었지만 느껴지는 감정은 완전히 달랐다.

<그 여름>은 보편적인 사랑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여자의 사랑이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누군가가 알아챌까 봐 학교 다닐 땐 숨기기에 급급했지만, 대학에 간 후에 두 사람은 다른 연인들처럼 지냈다. 그러다 서로의 다름과 새로운 사랑으로 인해 이제는 끝을 내야 할 때가 왔을 때, 이미 그 기미를 느끼고 덤덤하게 이별했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그만한 사랑은 다시없었다는 걸 오래도록 곱씹는 것은 선택을 한 사람이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고백>에서 미주가 고등학생 때 친구 진희의 커밍아웃을 들은 후 일어난 사건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만큼 진희에겐 두 친구가 소중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칼로 찌르는 듯한 말이었고 자신도 채 깨닫지 못한 감정이었다. 때로는 말보다 표정이 더 상처가 될 때가 있다. 감추고 싶어도 감춰지지 않고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는 감정은 무작정 나오는 말보다 때로는 진심을 온전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비수가 된다. 누군가를 죽이는 건 칼이나 총뿐만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의 말과 눈빛이기도 했다. <고백>을 읽으며 나도 무심결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겠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반성하게 됐다.

 

<601, 602>를 통해서는 남성우월주의를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집안에 대해 말하며 그걸 지켜보는 주영의 집도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줬다. <지나가는 밤>과 <손길>은 가족과 가족처럼 지낸 관계가 틀어진 후의 회상을 보여주는데 왠지 모를 애틋함이 남았다. 좋았을 때와는 달라진 관계라고 할지라도 그때의 감정까지 나쁘게 바뀌지 않았고, 각자의 사정을 이해하면서는 회복의 여지가 남기도 했다.

 

일곱 편의 단편 소설이 실린 소설집은 흘러가는 마음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상대방을 향한 마음이 사랑이기도 했고 우정일 때도 있었으며 때로 부모는 아니지만 그런 비슷한 마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들은 끊어지거나 끊어냈고 혹은 다시 이어지기도 했다. 타인과의 관계는 모두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눈물이 고였던 적이 두세 번 있었다. 그저 일상을 이야기하거나 이야기 속 누군가의 마음이 드러나는 부분인데 괜스레 울컥하고 말았다. 비슷한 경험을 한 추억이 떠올라 행복해서 공감한 부분 외에는 화자의 감정이 온전히 느껴져서인 것 같다. 울리려고 작정한 글이 아니라서 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최은영 작가의 책은 <쇼코의 미소>만 읽었었는데 이 책도 정말 좋았다. 덤덤하지만 마음을 건드리는 감성적인 글이 정말 좋았다.

 

 

 

어떤 사람들은 벼랑 끝에 달린 로프 같아서 단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안도감을 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모래도 내게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에게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나를 세상과 연결시켜준다는, 나를 세상에 매달려 있게 해준다는 안심을 준 사람이. 그러나 모래에게도 내가 그런 사람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모래로 지은 집> - P162.163

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얼굴 앞에서 거스를 수 없는 슬픔을 느끼니까. 너의 이야기에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에게 또다른 수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 <고백> - P208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막으면 막아지고 닫으면 닫히는 것이 마음이라면, 그러면 인간은 얼마나 가벼워질까. <손길> - P225

중력도 마찰도 없는 조건에서 굴린 구는 영원히 굴러간다.
언젠가 네가 한 말을 난 종종 떠올렸어. 영원히 천천히 굴러가는 공을 생각했어. 그 꾸준함을 상상했어. 이상하게도 눈을 감고 그 모습을 그려보면 쓸쓸해지더라.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 모습이 어쩐지 외로워 보여서. 그래도 우린 중력과 마찰력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구나. 가다가도 멈출 수 있고, 멈췄다가도 다시 갈 수 있는 거지. 영원할 순 없겠지만.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모래로 지은 집>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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