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타임슬립 필립 K. 딕 걸작선 1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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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은 10년 전 정신분열증으로 인한 괴로움에 갑작스럽게 화성 이민을 결정했다. 살고 있는 집을 팔고 아내 실비아, 아들 데이비드와 함께 화성으로 이주한 그는 기계 수리 기사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화성에서는 고장 난 기계를 지구에서 배송받는 데 들이는 시간과 비용에 비해 고쳐서 쓰는 게 훨씬 절약되기 때문이었다.

미스터 이의 회사에 소속된 잭은 헬리콥터를 타고 방문 수리를 가던 중, UN으로부터 화성 원주민 "블리크맨"이 위험에 처했으니 도와주라는 연락을 받는다. UN의 지시를 무시하면 벌금을 물어야 하기 때문에 무조건 도와야 했다. 잭은 탈수증세를 보이는 블리크맨에게 물을 나눠주고 보답으로 말라비틀어진 물건을 받는다. 물의 정령이라는 그 물건은 언제든 원할 때 물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수자원노동조합장 어니는 화성의 부유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구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신세였지만, 화성 이민을 빠르게 결정한 덕분에 물이 부족한 화성에서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고 블리크맨 하인까지 두는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그런 그가 관심을 갖게 된 분야는 미래였다. 현재엔 미개발지지만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통해 UN이 개발 예정인 땅을 미리 사서 부를 더 늘릴 심산이었다. 전처 앤을 만나러 가다 잭과 마주쳤었던 어니는 기계를 수리하겠다는 명분으로 그를 불러들여 가깝게 지내면서 지구에 있는 잭의 아버지가 화성의 땅을 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일을 맡기기로 한다.

 

지구에서 고급 식료품을 밀수하는 노버트는 이웃에 사는 잭 가족도 모르는 아들 만프레드가 있다. 만프레드는 자폐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뉴 이스라엘 지역의 특수시설에 보내두었다. 노버트는 만프레드를 만나서 줄 선물을 사러 갔다가 주인 앤에게서 자폐증 아이들에 관한 법안이 상정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특수시설이 폐쇄되고 자폐증, 정신분열증 아이들은 안락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만프레드에 대한 걱정과 이제는 해방될지도 모른다는 양가적 감정이 동시에 생긴 노버트는 아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차에 몸을 던진다.

 

 

 

SF 소설의 거장 필립 K. 딕의 소설은 단편만 세 권 읽었다. 영화화된 작품들이 많이 실린 단편이라 나름 흥미로웠고 재미도 있었다. 이번엔 장편을 좀 읽어보고 싶어서 이 책을 선택했다.

화성으로 이민을 갈 수 있는 가상의 미래 시대지만, 작가가 소설을 썼을 당시에는 미래였어도 우리에겐 20년도 더 된 199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화성이 지구 환경과 가장 비슷하다고들 한다. 물의 흔적이 있고 산의 흔적도 있으며, 생명체의 발자국도 발견됐다는 음모론 아닌 음모론도 있다. 하지만 화성 하면 떠오르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건조, 메마름 따위라 그런지 소설의 설정도 그런 걸 잘 반영하고 있었다.

 

 

 

 

UN이 우주까지 확장되어 수자원을 통제하고 있기는 해도 물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 자가 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게 바로 어니였다. 지구에서 가지지 못했던 걸 화성에 와서야 손에 넣었기 때문인지 어니는 부에 대한 욕심이 가득했다. 그래서 신빙성 없는 방법까지 동원해 더 가지려고 들었다.

이 상황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 노버트의 아들 만프레드였다. 노버트가 자살한 이후 시설의 담당 정신과 의사 글러브 박사가 어니에게 아이를 추천했고, 잭이 우연찮게 어니와 만나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잭이 지구에 있을 때 정신분열증을 앓았다는 사실을 안 어니는 만프레드와 소통할 수 있는 기계를 잭에게 만들어달라고 한다. 잭은 만프레드를 데리고 다니면서 다 나은 줄 알았던 정신분열증이 다시 나타나는 걸 느낀다.

 

미래 배경의 SF 소설이라 뭔가 상상력이 가득한 이야기를 보여주리라 예상했는데, 그것보다는 정신 의학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자폐를 가진 만프레드가 보는 세상은 너무나 빨랐다.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게 그에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 적응을 할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세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해 줬던 게 잭이었다. 잭이 10여 년 전에 정신분열증으로 고생했었기 때문에 만프레드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지 알고 있었다. 처음에 잭은 어니의 지시대로 만프레드와 소통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지만, 이후엔 어니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 말하며 그만두길 강력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세상을 물질적인 시선으로만 보는 어니가 자신에게 이익이 될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고, 어느 정도가 지난 후에는 현실 구분이 되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마치 만프레드가 보는 세상을 어니에게 씌워둔 것 같았다. 느리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환상이라 믿었지만 그것은 현실이라 끔찍한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성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 이 소설은 지구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게 특징이었다. 어디를 가나 가진 자들은 과거로 가서라도 더 가지기를 원했다. 사람을 이용하는 일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이기적인 인간은 다른 환경에서도 여전한 법이었다.

 

자폐나 정신분열증을 가진 사람의 눈에 세상은 이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들이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건 너무나 빠르기 때문이라는 말에 수긍했다. 어니와 만프레드 사이에 잭이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어니의 흐름대로 만프레드를 이끈다면 아이는 감당하기 어려워 폭발할지도 몰랐다. 화성 원주민 블리크맨도 잭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만프레드가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보다는 블리크맨과 소통하고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책의 간략한 줄거리에 호기심이 생겨 읽게 된 책인데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전개를 보였다. 여러 사람이 등장해 바람도 피우고 누군가의 계략으로 사업이 망해 살인을 저지르고 화성 원주민까지 등장했지만, 각기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없었다. 잭이 초반에 블리크맨에게 물의 정령이라는 물건을 받았을 때 중요하게 쓰이겠구나 생각했는데, 사용하는 걸 보여주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이외에도 여기저기에 눈길을 끌만한 요소를 심어두었지만 지나쳐도 될 것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결말까지 다 읽고서는 좀 아쉬웠다. 필립 K. 딕의 단편집을 읽을 땐 신선함 덕분에 매번 감탄을 했었는데, 이 책은 제목이나 소설 초반을 읽고 예상했던 내용과는 너무 달랐다. 블리크맨을 예시로 삼은 인종차별에 관한 문제와 자폐증과 같은 증상을 가진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가지는 부분이 눈에 띄긴 했지만 두드러지진 않았다. 아무래도 다른 책을 한번 읽어봐야겠다.

"이 ‘공립학교‘하고 너희들 같은 티칭머신들은 다음 세대의 정신분열증 환자들을 키우고 있는 거야. 나처럼 이 새로운 행성의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는 사람들의 자손들을 정신분열증으로 만들고 있다는 뜻이지. 너희들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환경을 기대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아이들의 정신을 분열시킬 거야. 그런 환경은 이제 지구에서조차도 사라져버렸어." - P139

"만프레드는 단지 미래를 예지하는 것 이상의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들어.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를 제어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나 할까. 여러 가능성 중에서 최악의 결과를 불러오는 재능이 있는 것 같아. 만프레드에게는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고, 현실이니까. 마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저 아이의 현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만프레드의 현실이 우리를 침식하고, 우리의 인식을 대체해버리는 거야. 그 결과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익숙해진 사건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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