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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평점 :
강무순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첩첩산중 두왕리의 아홉모랑이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 어르신들의 유일한 낙인 막장 드라마를 보던 할아버지가 충격으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시골 마을에서 벗어나 도시에 사는 2남 2녀 자식들과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가 장례를 치르기 위해 아홉모랑이에 모여들었다.
정신없이 장례를 마치고서 남은 가족들이 시골집에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혼자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 80살 넘은 할머니 홍간난 여사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혼자 밥을 먹고 자고 일어나는 그 생활이 얼마나 쓸쓸하겠나 싶어 눈물을 찍어내는 이도 있었다. 무순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친척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엄마, 아빠, 동생까지 모두 다 이미 떠난 뒤라는 걸 알게 됐다. 잠시만 할머니를 부탁한다는 메모와 50만 원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화를 내봤자 버스는 한참 전에 떠난 뒤였다.
빠르게 체념한 무순은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좀처럼 쉽지 않다. IT 강국인 대한민국에서 와이파이도 터지지 않고, 심지어 통화도 잘 되지 않아 집 전화를 써야 하는 곳이 아홉모랑이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무순은 동네를 돌아다니며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등 한량처럼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집안에서 자신이 15년 전에 그린 보물지도를 발견한다. 보물지도에 그려진 경산 유씨 종택에 찾아가 땅을 파던 무순은 보물 상자를 발견했고, 종갓집 꽃돌이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15년 전 이 마을에 살던 여자아이 네 명이 한꺼번에 사라진 사건을 파헤치게 된다.
갑자기 홀로 남게 된 할머니를 걱정해 가족 중 한 명이 남아야 한다고 결정 내렸을 때 낙점된 사람이 무순이었던 것은 그녀가 삼수생을 표방한 백수였기 때문이다. 학원을 잘도 땡땡이를 치면서 뭐만 시키려고 하면 삼수생을 들먹였을 그녀의 처지가 눈앞에 선했다.
결국 홍간난 여사의 집에 남겨진 무순은 짧은 원망과 빠른 체념으로 적응기에 접어들었지만, 심심해도 너무나 심심한 시골이었다. 와이파이도 안 되고, 핸드폰도 안 터지는 시골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무순을 보며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 동생과 한 달간 시골 이모 댁에서 지내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엔 핸드폰이 당연히 없었을 때라 그렇다 칠 수 있지만, 그곳은 집 옆에 소 우리가 있었고 동네 개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초등학교 저학년인 내 동생 정도의 크기였으며, 조금만 나가면 시내가 흐르는 곳이 유일한 놀이터였다. TV 리모컨은 온전히 이모의 손에만 들러붙어 있던 것이라 동생과 나는 그야말로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무순이 무지하게 심심한 처지에 공감이 됐다.
그러던 중 뭔가 놀 거리를 찾아 헤매던 무순이 보물지도를 발견했고, 덕분에 보물 상자를 손에 넣었으며 시골 생활의 유일한 기쁨인 꽃돌이 창희와 만나게 됐다. 도시 생활보다 활력 넘치는 시골 생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15년 전, 6살이던 무순은 한동안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맡겨졌다. 무순이 지금과는 달리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리던 그때 마을에 백수를 맞은 어르신이 있었다. 그 어르신의 백수를 기념해 온 마을 어른들이 관광버스를 빌려 온천 여행을 떠났다. 그때 무순은 동네에 남아야 했지만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함께 가게 됐다.
그렇게 동네가 텅 비고 아이들만 남았던 그날 여자아이 4명이 사라졌다. 종갓집의 귀한 외동딸 16살 유선희, 효녀로 소문난 16살 황부영, 발랑 까진 18살 유미숙, 그리고 목사님의 막내딸 7살 조예은까지 나이와 학교 등이 각기 다른 여자아이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는 사실을 동네 어른들은 돌아와서야 알게 됐다. 경찰이 수사를 시작했지만 아무리 조사를 해도 아이들이 어떻게 됐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아낼 수 없었다. 결국 그 사건은 미제로 종결됐다.
그 15년 전의 사건이 무순으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것이었다. 삼수생 무순이 잠깐 머무는 이곳에서 무슨 수사를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처음엔 보물 상자 속에 담긴 '자전거와 소년' 조각을 단서로 유선희의 첫사랑을 캐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여러 사건을 맞닥뜨리고, 누군가를 마주하게 되면서 의외의 방향을 타고 흐르다가 15년 전의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게 됐다.
무순과 꽃돌이가 조용히 사건의 중심에 발을 들여놓고 있을 때쯤, 할머니 홍간난 여사가 얼떨결에, 때로는 우당탕탕 시끌벅적하게 사건을 해결할 방안을 척척 제시했다. 세 사람의 조합이 오묘하면서도 의외로 환상의 호흡을 보여서 신기하면서도 너무나 즐거웠다.
그렇게 해결된 이야기들의 내막은 너무나 안타깝고 화가 나는 부분이 있었고,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은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당사자는 시원섭섭하겠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하필이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사람도 있었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이제라도 밝혀진 게 다행이다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읽기 시작한 소설인데 어느새 흠뻑 빠져버렸을 만큼 재미가 있었다. 일어나는 사건이나 풀어가는 과정은 평범했지만, 문체가 너무나 재미있었다. 홍간난 여사의 화법이 킥킥대며 웃게 만들었고, 시니컬하지만 할머니 앞에선 쭈구리가 되는 무순이 너무 웃겼다. 냉미남 꽃돌이 창희 역시 매력이 있었고, 등장하는 다른 캐릭터들인 부흥슈퍼 글래머 노파, 동네 바보 일영 등 하나같이 눈길을 끌었다.
매력적인 요소가 다분해 독서가 너무나 즐거웠던 책이었다.
"실타래라는 게 말이여. 처음부터 얽힌 데를 찾어서 살살 풀어야 하는디, 그냥 막 잡어댕기다 보면 야중에는 죄다 얽혀 갖고는 어디가 얽힌 줄도 모르게 되지 않디? 딱 그짝이란 말이지."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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