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약국
니나 게오르게 지음, 김인순 옮김 / 박하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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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센 강 위에는 커다란 화물선을 개조한 서점 '종이약국'이 있다. 서점 주인 장 페르뒤 씨는 손님이 원하는 책을 판매하기보다는 손님의 현재 마음 상태를 파악해 치료가 되고 위로가 될 만한 책을 권유해 판매하고 있다. 이 독특한 서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페르뒤 씨의 행동이 의아하겠지만, 그의 책 처방이 마음에 든 고객은 종이약국을 다시 찾게 된다.

다른 이의 마음을 잘 파악해 처방을 내리는 페르뒤 씨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마음을 치유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20년 전 그의 곁을 갑자기 떠나버린 마농을 아직까지 잊지 못하며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파트 이웃에 이사를 온 카트린에게 쓰지 않는 식탁을 가져다준 이후 일어난 사건으로 싱숭생숭해졌다. 카트린이 식탁 서랍에서 페르뒤 씨 앞으로 온 편지를 발견했다고 했을 때 그는 보지 않아도 마농이 보낸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애써 외면을 했지만, 카트린과의 사이에서 이제 막 피어난 애정으로 인해 과거의 사랑을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를 읽은 뒤 페르뒤 씨는 아주 오랫동안 정박해있던 종이약국을 몰고 센 강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강 위에 떠 있는 화물선을 개조한 서점이라는 설정부터 독특했는데, 원하는 책을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점 또한 신선했다. 종이약국이라는 서점 상호에 걸맞게 복용하는 약이 아니라 마음을 치유해 주는 종이로 된 책을 처방해 준다는 부분은 굉장히 기발했다.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점잖은 주인 페르뒤 씨의 혜안 덕분이었다. 그래서 나도 페르뒤 씨에게 책을 처방받고 싶은 마음이 가장 먼저 들었다.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페르뒤 씨의 서점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 예상했지만,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다고 페르뒤 씨의 마음에 남은 아픔을 해결하기 위한 여행기로 흘러갔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에 앞서 지난 사랑을 제대로 끝맺음하고자 떠난 여행에 의외의 동반자가 생겼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젊은 작가 막스 조당이었다. 페르뒤 씨는 조당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미 출항한 배에 오른 뒤였기 때문에 강에 버려두고 갈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여행을 시작하게 됐다. 종이약국에 사는 고양이 카프카와 린드그렌도 함께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여행 탓에 종이약국에는 먹을 게 고양이 사료와 캔 뿐이었기에 여기저기 경유를 하며 먹을 것과 처방 책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 여행 중에 페르뒤 씨처럼 오래전 연인을 잃어버리고 그리워하는 쿠에노를 만나 함께 여행을 하게 된다.

사실 마농이 페르뒤 씨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소설 초반 편지에서 밝혀졌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페르뒤 씨와 왜 결혼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 또한 등장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내 안에 가득한 유교적인 면으로 인해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나친 욕심이 욕망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아는데도 마농을 사랑했던 페르뒤 씨가 가엽게 느껴졌고, 페르뒤 씨와 처지가 같으면서도 달랐던 캐릭터에게도 연민을 느꼈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에 앞서 제대로 된 이별을 하기 위해 시작한 페르뒤 씨의 여행은 예상했던 대로 모두가 행복한 결말로 끝을 맺었다. 주인공 페르뒤 씨는 물론이고 카트린, 조당, 쿠에노 등을 비롯해 페르뒤 씨의 부모님까지 그들 나름의 행복한 결말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랑이 가득한 소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처방해 주는 서점 종이약국의 설정이 신선해서 읽게 됐는데 의외인 부분이 더러 있었다. 그래도 뭐, 나름 잘 마무리된 소설이었기에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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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의사들이 결코 진단하지 못하는 감정들, 고통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감정들을 치유하고 싶었어요. 너무 사소하거나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치료사들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런 모든 감정이요." - P33

어떤 책이 나를 구해줄까?
그 대답이 생각났을 때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다.
"책들이 많은 걸 할 수 있지만 모든 걸 할 수는 없어요. 중요한 일들은 직접 살아봐야 해요. 책으로 읽지 말고. 나는 내 책을…… 직접 체험해야 합니다." - P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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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
조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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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불치병으로 인해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좀 더 평온한 죽음을 제공하고자 안락사 합법 법안이 통과되어 '센터'가 설립되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 센터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24번째로 우리나라에도 들어섰다.
센터는 죽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입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입소하려면 먼저 큰 비용이 필요했다. 그리고 입소 전에 센터 의사와의 면담을 통해 입소 여부가 결정되었고, 입소 후에는 그곳에서 한 달이라는 필수 기간을 보낸 뒤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다. 더 살아보고 싶은 사람은 센터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고, 누군가는 지옥 같았던 세상으로 나갈 수도 있었으며, 죽음을 선택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날짜에 임종실에서 약을 먹고 편안히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서른이 가까운 나이의 이서우는 중학생 때부터 자신의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어느 순간 이후로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됐다. 그래서 엄마와는 늘 방문을 사이에 두고 문자와 말로 대화를 했다. 서우는 세상 모든 게 두려웠다.
그런 서우가 우리나라에도 센터가 설립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나도 가고 싶었다. 하지만 방 밖으로 나온 적이 없어 사회생활을 해보지 못한 그에게 입소 비용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인터넷을 통해 재택 아르바이트를 해보려고 해도 비용을 모으기 어려웠다. 결국 서우는 엄마에게 어렵사리 말을 꺼냈지만, 엄마는 아들이 죽기 위해 떠나겠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그러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엄마는 서우에게 센터에서 6개월만 살아보라는 약속을 받아내고 입소 준비를 도와준다.




소설은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음을 돕는 가상의 기관인 센터를 소재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주인공 이서우의 시점으로 흘러가면서 그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습에서 센터 입소 후에는 서로에게 깊이 공감하는 마음을 가진 여러 사람들을 만나 가까워지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단 한 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서우의 상황이나 센터에 입소한 많은 사람들에게 심적으로는 공감할 수 없었다. 아무리 사는 게 힘들어도 죽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고, 죽어가는 상황이나 내 몸에 가해질 고통이 두렵기도 하고, 또 개인적인 일이 있기도 해서 자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다만 죽고 싶을 정도로 삶이 괴로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현재, 따스한 말 한마디 건네줄 이가 아무도 없는 상황으로 인해 사는 것보다는 죽는 걸 택하는 이들도 있다는 게 너무나 안타까울 따름이다.
서우가 센터에 들어간 이후 만난 룸메이트 김태한을 비롯해 김태한과 어울리던 멤버들인 한 여사님과 양지, 손형과 작가님 등을 만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중엔 서우의 이야기까지 밝혀지면서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삶을 살기 마련인데, 그 삶이 얼핏 쉬워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어려운 사람도 있다. 삶을 포기할 만큼 절망적인 사건이 일어난 경우도 있지만, 누군가는 사소하다 여길 수 있는 문제로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갖게 하기도 한다. 모든 건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일이라 그 누구도 삶과 죽음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서우가 센터에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일어나는 소소한 매일을 읽으면서 문득 눈물이 쏟아질 뻔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죽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이들은 누군가의 포옹으로 인해 삶의 온기를 조금이나마 느꼈다. 친구가 된 사람들과 맛있는 걸 먹을 때, 서우가 가장 전망 좋은 방을 배정받아 창밖의 풍경을 볼 때, 아름다운 벚꽃길과 면회를 온 엄마의 뒷모습 같은 사소하지만 소중한 모든 게 아직은 이 삶을 놓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아 괜스레 슬퍼졌다. 죽음에 대한 시선은 언제나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누군가를 뜻하기 때문이었다. 삶에 대한 희망을 조금이나마 느꼈더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었더라면 선택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에 짙은 서글픔이 밀려왔다.

그렇게 공감 아닌 공감을 하면서 책을 읽는 동안 서우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궁금했다. 센터에서 생활하게 된 그에게 바깥세상에서와는 다른 희망이 점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사건이 일어나며 감정적으로 힘들어질 때가 있었고 어떤 선택도 하게 됐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참 다행이다 싶은 결말이었다. 비록 그 결말을 위해 앞서 일어났던 선택이 조금은 작위적인 느낌이 들긴 했어도 소설을 읽는 내내 간절히 바랐던 부분이라 안도했다.

완벽하게 마음에 쏙 든 내용의 소설은 아니었지만, 이 책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기억하고 떠올리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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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고통의 정도‘가 아니었다. 똑같이 온몸이 마비된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삶을 원했고, 누군가는 죽음을 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였다. - P21

누군가 나를 안으면 숨을 참고, 또 안으면 또 숨을 참고, 숨을 참고, 참고, 참고, 그러다 어느 순간, 숨이 쉬어졌다. 사람이 다가와 옷을 바스락거리는 소리. 입고 있는 옷과 체형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감촉. 그러나 비슷한 체온. 살아 있는 사람들. 누군가는 울면서 나를 안았고, 누군가는 수줍게 웃으며 안았고, 누군가는 얕게 품었고, 누군가는 깊고 오래 품었다. 나를 끌어안았던 누군가가 떠난 자리에 36.5도보다 낮은 공기가 스며들기 전에 또 다른 누군가가 다가와 온기를 채워주었다. 그렇게 여러 개의 체온 안에서 고요하게 머물렀다. - P151.152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꽤 소중하지. 필요한 거고.
그렇다고 해서 삶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잖아.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삶이 더 간절한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래서 더 아픈 건지도 몰라. 삶이, 진짜 살아 있는 삶이 너무나 간절해서.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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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악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1
레이몽 라디게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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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 소년 '나'는 아버지를 따라 지인 그랑지에 씨를 만나러 갔다가 그의 딸 마르트를 보고 사랑에 빠져버린다. 마르트는 참전 중인 군인 자크와 약혼을 한 사이로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마르트는 자크는 좋아하지 않지만 자신은 좋아하는 문학가의 이야기를 나와 공유했고, 함께 미술 학원에도 가는 등 서서히 가까워졌다. 그렇게 친밀한 사이가 되자, 마르트는 자크와 함께 살 신혼집에 넣을 가구를 나에게 함께 골라달라고 했다. 나는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이 될 남자를 기만하는 마음으로 취향을 듬뿍 담은 가구를 골라 사게 했다.

마르트가 결혼한 뒤에 나와의 관계는 끊어지기보다 더욱 깊어졌다. 전쟁으로 인해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는 자크 대신 내가 그녀의 신혼집을 종종 방문했고, 그러다 마르트와 깊은 관계가 되어 그녀에게 사랑을 눈 뜨게 했다. 나와의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마르트는 나에 대한 아낌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저자 레몽 라디게가 20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쓴 것이라 사회적인 파장이 일었다고 한다. 주인공은 16살 소년이고 상대방 역시 아직 20살이 되지 않았지만 결혼을 해 전장에 나가 있는 군인 남편을 둔 여자와의 농도 짙은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문제가 된 이유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소년 '나'의 심리 변화였다. 소년의 사랑은 처음엔 순수한 짝사랑에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좋아지기 시작했을 때의 풋풋한 설렘이 있었으나 그녀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자신에게 신혼집 가구를 함께 골라달라고 했을 때부터 그의 심리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결혼을 했지만 독수공방 신세가 된 마르트를 사랑에 탐닉하게 만들면서 소년은 쾌락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마르트는 소년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남편이 휴가를 나오는 게 달갑지 않았고, 소년과의 관계로 인해 안 좋은 소문이 나도 개의치 않았다. 그야말로 사랑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장님이 되고 만 것이었다.
마르트가 이렇게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랑에 허우적대고 있을 때, 소년은 마르트의 행동이나 말에 따라 사랑을 중심으로 한 남녀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신혼집 가구를 고르던 때에는 마르트의 남편만 기만하는 걸로 느껴졌다면, 시간이 흘러서는 마르트까지 기만하고 있었다. 소년은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라는 말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듯했다. 자신에게 푹 빠진 마르트를 어르고 달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가 소년에게 집 열쇠를 주고 어딘가로 떠나있을 때 마르트의 친구를 불러 익숙한 관계에서 다시는 없을 시작의 탐닉을 만끽하기도 했다.

10대 소년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그의 모습은 당연히 문제가 될만했다. 사랑의 시간적 흐름에 따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감정 묘사가 어떨 땐 불편한 느낌을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상대를 깊이 사랑한다면 소년이 느끼는 감정과는 다른 한결같은 심리를 보이겠지만, 그는 마르트가 첫사랑이었기에 치기 어린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성인의 사랑이었다면 소년의 사랑과는 달리 진중하고 감정적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사랑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짧은 소설이 후반으로 향해 가면서 마르트와 소년 사이에 큰 사건이 일어나고, 결말엔 놀라움을 금치 못할 일도 일어났다. 그런 사건을 관망하는 듯한 소년의 모습을 보며 첫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그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소년을 사랑한 마르트가 가여웠고,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갈 자크 역시 불쌍했다.

어떻게 보면 소년에게 사랑은 소설 제목처럼 육체에 지배된 악마 같은 것 아니었을까 싶다. 뭔가 씁쓸한 느낌만 남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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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행복이란 모래 위 누각과 같았다. 그러나 이곳의 조수 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니, 밀물이 가급적 아주 늦게 들어오기를 나는 바랐다. - P99

모든 사랑은 나름의 청춘기와 중년기, 그리고 노년기를 내포하고 있다. 무엇인가 기교의 도움 없이는 사랑이 이젠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그 마지막 단계에 벌써 다다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P10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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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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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순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첩첩산중 두왕리의 아홉모랑이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 어르신들의 유일한 낙인 막장 드라마를 보던 할아버지가 충격으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시골 마을에서 벗어나 도시에 사는 2남 2녀 자식들과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가 장례를 치르기 위해 아홉모랑이에 모여들었다.
정신없이 장례를 마치고서 남은 가족들이 시골집에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혼자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 80살 넘은 할머니 홍간난 여사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혼자 밥을 먹고 자고 일어나는 그 생활이 얼마나 쓸쓸하겠나 싶어 눈물을 찍어내는 이도 있었다. 무순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친척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엄마, 아빠, 동생까지 모두 다 이미 떠난 뒤라는 걸 알게 됐다. 잠시만 할머니를 부탁한다는 메모와 50만 원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화를 내봤자 버스는 한참 전에 떠난 뒤였다.

빠르게 체념한 무순은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좀처럼 쉽지 않다. IT 강국인 대한민국에서 와이파이도 터지지 않고, 심지어 통화도 잘 되지 않아 집 전화를 써야 하는 곳이 아홉모랑이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무순은 동네를 돌아다니며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등 한량처럼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집안에서 자신이 15년 전에 그린 보물지도를 발견한다. 보물지도에 그려진 경산 유씨 종택에 찾아가 땅을 파던 무순은 보물 상자를 발견했고, 종갓집 꽃돌이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15년 전 이 마을에 살던 여자아이 네 명이 한꺼번에 사라진 사건을 파헤치게 된다.



갑자기 홀로 남게 된 할머니를 걱정해 가족 중 한 명이 남아야 한다고 결정 내렸을 때 낙점된 사람이 무순이었던 것은 그녀가 삼수생을 표방한 백수였기 때문이다. 학원을 잘도 땡땡이를 치면서 뭐만 시키려고 하면 삼수생을 들먹였을 그녀의 처지가 눈앞에 선했다.
결국 홍간난 여사의 집에 남겨진 무순은 짧은 원망과 빠른 체념으로 적응기에 접어들었지만, 심심해도 너무나 심심한 시골이었다. 와이파이도 안 되고, 핸드폰도 안 터지는 시골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무순을 보며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 동생과 한 달간 시골 이모 댁에서 지내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엔 핸드폰이 당연히 없었을 때라 그렇다 칠 수 있지만, 그곳은 집 옆에 소 우리가 있었고 동네 개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초등학교 저학년인 내 동생 정도의 크기였으며, 조금만 나가면 시내가 흐르는 곳이 유일한 놀이터였다. TV 리모컨은 온전히 이모의 손에만 들러붙어 있던 것이라 동생과 나는 그야말로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무순이 무지하게 심심한 처지에 공감이 됐다.

그러던 중 뭔가 놀 거리를 찾아 헤매던 무순이 보물지도를 발견했고, 덕분에 보물 상자를 손에 넣었으며 시골 생활의 유일한 기쁨인 꽃돌이 창희와 만나게 됐다. 도시 생활보다 활력 넘치는 시골 생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15년 전, 6살이던 무순은 한동안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맡겨졌다. 무순이 지금과는 달리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리던 그때 마을에 백수를 맞은 어르신이 있었다. 그 어르신의 백수를 기념해 온 마을 어른들이 관광버스를 빌려 온천 여행을 떠났다. 그때 무순은 동네에 남아야 했지만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함께 가게 됐다.
그렇게 동네가 텅 비고 아이들만 남았던 그날 여자아이 4명이 사라졌다. 종갓집의 귀한 외동딸 16살 유선희, 효녀로 소문난 16살 황부영, 발랑 까진 18살 유미숙, 그리고 목사님의 막내딸 7살 조예은까지 나이와 학교 등이 각기 다른 여자아이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는 사실을 동네 어른들은 돌아와서야 알게 됐다. 경찰이 수사를 시작했지만 아무리 조사를 해도 아이들이 어떻게 됐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아낼 수 없었다. 결국 그 사건은 미제로 종결됐다.

그 15년 전의 사건이 무순으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것이었다. 삼수생 무순이 잠깐 머무는 이곳에서 무슨 수사를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처음엔 보물 상자 속에 담긴 '자전거와 소년' 조각을 단서로 유선희의 첫사랑을 캐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여러 사건을 맞닥뜨리고, 누군가를 마주하게 되면서 의외의 방향을 타고 흐르다가 15년 전의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게 됐다.
무순과 꽃돌이가 조용히 사건의 중심에 발을 들여놓고 있을 때쯤, 할머니 홍간난 여사가 얼떨결에, 때로는 우당탕탕 시끌벅적하게 사건을 해결할 방안을 척척 제시했다. 세 사람의 조합이 오묘하면서도 의외로 환상의 호흡을 보여서 신기하면서도 너무나 즐거웠다.
그렇게 해결된 이야기들의 내막은 너무나 안타깝고 화가 나는 부분이 있었고,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은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당사자는 시원섭섭하겠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하필이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사람도 있었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이제라도 밝혀진 게 다행이다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읽기 시작한 소설인데 어느새 흠뻑 빠져버렸을 만큼 재미가 있었다. 일어나는 사건이나 풀어가는 과정은 평범했지만, 문체가 너무나 재미있었다. 홍간난 여사의 화법이 킥킥대며 웃게 만들었고, 시니컬하지만 할머니 앞에선 쭈구리가 되는 무순이 너무 웃겼다. 냉미남 꽃돌이 창희 역시 매력이 있었고, 등장하는 다른 캐릭터들인 부흥슈퍼 글래머 노파, 동네 바보 일영 등 하나같이 눈길을 끌었다.
매력적인 요소가 다분해 독서가 너무나 즐거웠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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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타래라는 게 말이여. 처음부터 얽힌 데를 찾어서 살살 풀어야 하는디, 그냥 막 잡어댕기다 보면 야중에는 죄다 얽혀 갖고는 어디가 얽힌 줄도 모르게 되지 않디? 딱 그짝이란 말이지."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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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쳐보는 여자
민카 켄트 지음, 나현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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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때 낳은 딸을 입양 보냈던 오텀은 SNS를 샅샅이 뒤져 아이를 찾아냈다. 대프니와 그레이엄에게 입양된 딸은 그레이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SNS 스타인 대프니가 완벽하고 행복한 가족의 삶을 매일 같이 업로드하고 있던 덕분에 오텀은 그레이스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간접적인 행복을 느꼈다.
그렇게 7년 동안이나 대프니의 SNS의 계정을 지켜보던 오텀은 그레이스와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에 그들의 이웃에 사는 벤과 2년째 사귀고 있었고 동거도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대프니의 계정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검색을 해도 찾을 수 없게 되자 초조해진 오텀은 어떻게든 그들의 삶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아이 돌보미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을 하게 된다.

대프니는 세 아이를 돌보느라 매일이 힘들고 지친다. 그레이엄과의 사이에서 낳은 로즈와 세바스찬은 말을 잘 듣는데, 입양한 그레이스는 대프니를 약 올리려고 작정을 한 듯 말썽을 부린다. 더구나 그레이엄이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모르는 척하고 있느라 더욱 괴롭기만 하다.
그러던 그녀는 생활 속 소소한 일탈을 하게 된다. 마약 거래상 미치의 집에서 대마초를 피우며 그와 농밀한 관계가 될 듯 말 듯 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다 미치에게 그레이엄의 외도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됐는데, 그는 사람을 시켜서 그 여자의 이름을 알아내 대프니에게 알려준다.



소설은 입양 보낸 딸의 행복을 빌며 SNS를 훔쳐보는 오텀과 행복하지 않은데도 SNS에는 행복을 가장하는 대프니의 시점을 불규칙적으로 오가며 진행되었다.
오텀의 시선으로 소설이 시작되었지만 그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7년이나 지켜봤다는 부분에서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입양 보낸 아이의 행복을 확인하기 위해 SNS를 그렇게 오랫동안 훔쳐봤다는 게 너무나 섬뜩한 집착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오텀에게 마음이 가질 않았다.
그에 반해 대프니는 SNS에 자신과 가족의 일상을 거짓 행복으로 꾸며내고 있긴 했지만,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불행을 굳이 타인에게 알리려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더구나 대프니는 입양한 아이의 말썽과 남편의 외도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그렇게라도 자신의 마음을 환기시키려는 듯 보였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되면서 대프니 역시 점점 이해할 수 없는 경계로 나아갔다.

이 두 여자가 접점이 생긴 것은 돌보미를 구하는 데서부터 시작됐다. 오텀은 그레이스와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에 지원하게 됐고, 대프니는 자신의 삶에 여유를 가질 겸 그레이엄의 내연녀를 본격적으로 찾아볼 겸 해서 돌보미가 필요했다.
서로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만나게 된 두 여자는 한동안 자신의 손에 넣게 된 일상에 만족하는 듯 보였다. 오텀은 그레이스의 곁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대프니는 약간의 해방감을 만끽했다.

그렇게 각자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쥐게 된 두 여자의 일상은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레이엄과 외도를 하고 있는 상대 마르니의 존재 때문이었다. 마르니가 소설에서 처음 등장했을 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미 눈치를 채긴 했다. 책 뒤편에 쓰여있긴 하지만 읽는 동안에는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그래서 마르니가 누구의 손에 의해 죽게 된 걸까 내내 궁금해하면서 소설의 후반을 읽었다. 마르니가 죽게 된 원인이 직접적으로 밝혀져서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결말로 가면서 점점 알 수 없는 구석으로 이야기를 몰고 가기 시작해 당황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단 한 번도 마음이 가지 않았던 오텀이 처음 등장했을 때 이거 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읽는 동안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던 바람에 후반에 뒤통수를 맞았다. 더욱 놀라운 건 반전은 오텀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대프니 역시 오텀 못지않게 심상치 않은 구석이 있는 여자라는 게 밝혀져서 충격을 받았다. 오텀은 원래 찝찝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했지만, 대프니가 그렇게 된 건 오로지 그레이엄의 행동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대프니가 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불쌍한 캐릭터를 꼽자면 오텀의 남자친구인 벤이 아닐까 싶다. 오텀에게 이용만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런 비극까지 겪었으니 말이다. SNS 때문에 인생이 피곤하고 서글퍼진 벤이 딱했다.
그리고 SNS에 흠뻑 빠져 거짓된 인생을 살았던 두 여자를 보며 뭐든지 깊이 빠져드는 건 좋지 않다는 걸 느꼈다. 특히나 거짓된 행복과 내가 아닌 나를 꾸미는 것 따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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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텀
인스타페이스는 언제나 맑음이다. 그 맑음이 연출된 거라 할지라도…….
다만 대프니는 예외다. 대프니의 인스타페이스는 정말로 진짜다. 그녀는 가짜 이야기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고,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굳이 연출할 필요도 없다. 그녀의 가족은 두말할 것도 없이 완벽하다. - P106.107

by. 대프니
나는 겉으로만 아름다운 삶 속에 사는 죄수다. 겉으로만 번지르르할 뿐 내면은 보잘것없는 삶의 노예.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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