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악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1
레이몽 라디게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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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 소년 '나'는 아버지를 따라 지인 그랑지에 씨를 만나러 갔다가 그의 딸 마르트를 보고 사랑에 빠져버린다. 마르트는 참전 중인 군인 자크와 약혼을 한 사이로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마르트는 자크는 좋아하지 않지만 자신은 좋아하는 문학가의 이야기를 나와 공유했고, 함께 미술 학원에도 가는 등 서서히 가까워졌다. 그렇게 친밀한 사이가 되자, 마르트는 자크와 함께 살 신혼집에 넣을 가구를 나에게 함께 골라달라고 했다. 나는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이 될 남자를 기만하는 마음으로 취향을 듬뿍 담은 가구를 골라 사게 했다.

마르트가 결혼한 뒤에 나와의 관계는 끊어지기보다 더욱 깊어졌다. 전쟁으로 인해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는 자크 대신 내가 그녀의 신혼집을 종종 방문했고, 그러다 마르트와 깊은 관계가 되어 그녀에게 사랑을 눈 뜨게 했다. 나와의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마르트는 나에 대한 아낌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저자 레몽 라디게가 20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쓴 것이라 사회적인 파장이 일었다고 한다. 주인공은 16살 소년이고 상대방 역시 아직 20살이 되지 않았지만 결혼을 해 전장에 나가 있는 군인 남편을 둔 여자와의 농도 짙은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문제가 된 이유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소년 '나'의 심리 변화였다. 소년의 사랑은 처음엔 순수한 짝사랑에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좋아지기 시작했을 때의 풋풋한 설렘이 있었으나 그녀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자신에게 신혼집 가구를 함께 골라달라고 했을 때부터 그의 심리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결혼을 했지만 독수공방 신세가 된 마르트를 사랑에 탐닉하게 만들면서 소년은 쾌락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마르트는 소년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남편이 휴가를 나오는 게 달갑지 않았고, 소년과의 관계로 인해 안 좋은 소문이 나도 개의치 않았다. 그야말로 사랑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장님이 되고 만 것이었다.
마르트가 이렇게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랑에 허우적대고 있을 때, 소년은 마르트의 행동이나 말에 따라 사랑을 중심으로 한 남녀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신혼집 가구를 고르던 때에는 마르트의 남편만 기만하는 걸로 느껴졌다면, 시간이 흘러서는 마르트까지 기만하고 있었다. 소년은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라는 말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듯했다. 자신에게 푹 빠진 마르트를 어르고 달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가 소년에게 집 열쇠를 주고 어딘가로 떠나있을 때 마르트의 친구를 불러 익숙한 관계에서 다시는 없을 시작의 탐닉을 만끽하기도 했다.

10대 소년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그의 모습은 당연히 문제가 될만했다. 사랑의 시간적 흐름에 따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감정 묘사가 어떨 땐 불편한 느낌을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상대를 깊이 사랑한다면 소년이 느끼는 감정과는 다른 한결같은 심리를 보이겠지만, 그는 마르트가 첫사랑이었기에 치기 어린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성인의 사랑이었다면 소년의 사랑과는 달리 진중하고 감정적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사랑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짧은 소설이 후반으로 향해 가면서 마르트와 소년 사이에 큰 사건이 일어나고, 결말엔 놀라움을 금치 못할 일도 일어났다. 그런 사건을 관망하는 듯한 소년의 모습을 보며 첫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그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소년을 사랑한 마르트가 가여웠고,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갈 자크 역시 불쌍했다.

어떻게 보면 소년에게 사랑은 소설 제목처럼 육체에 지배된 악마 같은 것 아니었을까 싶다. 뭔가 씁쓸한 느낌만 남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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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행복이란 모래 위 누각과 같았다. 그러나 이곳의 조수 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니, 밀물이 가급적 아주 늦게 들어오기를 나는 바랐다. - P99

모든 사랑은 나름의 청춘기와 중년기, 그리고 노년기를 내포하고 있다. 무엇인가 기교의 도움 없이는 사랑이 이젠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그 마지막 단계에 벌써 다다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P10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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