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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 개정판 ㅣ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평점 :

영도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는 훈이와 양진은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묵묵히 살았다. 그런 그들에게도 아기가 찾아오지만, 아버지인 훈이를 닮아 윗입술이 갈라진 채 태어나 병으로 죽었고 이후 태어난 두 아이도 갓난아기일 때 아파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태어난 아이가 선자였다. 건강하게 태어난 선자는 밝고 착하게 자라 제 부모처럼 묵묵히 일하는 16살 소녀가 되었다.
양진 대신 장 보는 일을 맡은 선자는 장에 갈 때마다 생선 중개상 고한수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걸 알게 된다. 단골 가게 아주머니가 고한수를 파렴치하다는 듯 욕을 했지만, 선자는 그에게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깨끗한 양복에 하얀 가죽 구두를 신은 잘생긴 그에게 눈길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에서 여러 번 마주친 한수는 선자가 일본인 학생들에게 욕보이고 있을 때 큰 도움을 줬다. 그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자는 그에게 순결을 잃고 아기를 갖게 된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의 삶은 녹록지 않았지만 그래도 부산 너머 섬 영도는 그리 심하지 않은 편이었다. 훈이와 양진 부부는 가난하긴 했어도 자신이 세를 들어살고 있는 집에 하숙을 쳐서 조금이나마 돈을 벌 수 있었고, 마당에 채소를 심고 하숙인들이 바닷가에서 잡은 물고기로 반찬을 올릴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선자 역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소녀가 되었다.
선자가 16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인생을 바꿀 두 남자가 다가온다.
평양에서 영도 하숙집을 찾아온 백이삭 목사는 자신의 형 요셉이 오래전 이곳에 머물다 오사카로 떠났다고 했다. 그때 양진의 음식 솜씨가 너무 좋아서 칭찬하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며, 이삭 역시 오사카로 가기 전에 몇 주 동안 하숙집에 묵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이삭은 하숙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치됐다고 여긴 결핵이 다시 얼굴을 들이민 듯 몸이 나빠졌다. 양진과 선자, 그리고 식모아이들은 아픈 이삭을 내치지 않고 극진히 보살폈다.
또 한 사람은 더럽고 궁색한 이들 사이에서 빛이 나서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던 고한수였다. 깔끔한 양복에 깨끗하게 닦은 구두를 신고 시장을 오가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렸다. 시장 아주머니가 욕하던 것과는 달리 한수는 정중했고 낯선 그가 건네는 말에 전혀 대꾸하지 않는 선자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두 배의 나이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친구가 됐고, 순결한 선자를 처음으로 가지게 된다.
안타깝게도 한수와의 관계에서 아기를 갖게 된 선자는 혼인하지 않은 처녀의 몸이었기에 자신의 처지를 어머니 양진에게조차 알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한수가 오사카에 일본인 아내와 세 딸이 있다는 말을 뒤늦게 했기에 그의 아내가 될 수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정직하게 살아온 제 부모에게 손가락질을 할 것 같았고, 하숙집의 평판이 떨어질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아기를 가져 본 여자라면 당연히 선자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이라 양진의 딸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 도움을 준 사람은 지극한 보살핌을 받아 건강해진 이삭이었다. 아기 아버지가 누군지 결코 밝히지 않은 선자와 뱃속의 아기를 품어주겠다고 하며 선자와 혼인하고 싶다는 말을 양진에게 했다. 평범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누가 제 자식이 아닌 아이를 품은 여자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 거기다 대를 이을 핏줄이나 아들이 우선시되는 시대였기에 이삭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삭은 자신이 믿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며 선자와 아이를 품었고, 형 요셉과 형수 경희가 있는 오사카로 함께 떠난다.
일제가 지배하는 조선에서의 삶보다 오사카가 낫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 어려웠고, 조선인을 향한 일본인의 멸시는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기에 마음까지 힘들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도 선자는 묵묵히 이삭을 뒷바라지했고, 태어난 노아와 둘째 모자수를 보살피는 어머니가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련은 또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라 선자의 삶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이의 존재는 놀라웠으며, 한편으로는 이 인연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생각하게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난 여자 선자의 삶은 평탄함과는 거리가 멀 거라 여겼지만, 고되고 고되며 또 고되기만 한 삶이 그녀를 너무나 힘들게 하는 것 같아 애처로웠다. 그렇게 삶이 휘두르는 채찍에도 불구하고 선자는 굽히지 않으며 자신의 남편을 보살피고 아이들을 먹였으며, 가족이 된 경희와 요셉을 챙겼다. 그리고 돈을 벌게 도와준 식당의 창호도 가족과 같은 관계가 됐다.
읽는 동안 선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느라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그런 선자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나올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선자와 이삭, 고한수로 이루어진 세대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틀이 잡혔고, 이후엔 노아와 모자수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룰 것 같다. 2권도 얼른 읽어보고 싶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여인네가 잘 살고 못 살고는 혼례 올리는 사내한테 달려 있다. 좋은 사내 만나면 괜찮게 살고 나쁜 사내 만나면 욕보고 살고 그라는 기라. 어쨌거나 고생을 각오하고 그냥 열심히 일하면 된데이. 세상천지에 딱한 여인네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믿을 거는 자신뿐인 기라." - P52
by. 한수 "내가 너랑 아이를 아주 잘 돌볼 거야. 가정을 하나 더 꾸릴 돈과 시간이 있어. 내 의무를 다할 거야. 난 진짜로 널 사랑해.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사랑하고 있어. 이건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야. 할 수 있었다면 너랑 혼인했을 거야. 넌 내가 혼인하고 싶은 사람이야." - P86.87
by. 이삭 "제 삶이 의미가 있을 수도 있어요. 형님처럼 많은 사람에게는 아니라도 몇몇 사람에게는요. 제가 이 아가씨와 아이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두 사람도 절 돕게 될 거예요. 저에게 가족이 생길 테니까요. 목사님이 어떻게 보시든 그건 큰 축복입니다." - P113.114
이삭은 왜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고통받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이삭은 다른 이들이 고통받을 때 결코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왜 선자는 고통을 피했는데 그들은 그렇지 못했을까? -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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