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분마다
리사 스코토라인 지음, 권도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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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병원의 정신과 과장 에릭 패리시는 그 누구보다 환자들에게 열정적인 의사다. 병원 한편에 격리되어 있는 정신과 병동 소속 의사들과 간호사들, 일하는 직원 모두 그를 좋아하고 존경한다. 심지어 그는 잘생긴 외모까지 가지고 있어서 뭇 여성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혼 협의 중인 케이틀린과는 딸 해나의 양육권 문제로 다투고 있다. 현재 해나는 함께 살던 집에서 엄마와 지내고 있지만, 변호사를 통해 케이틀린이 집을 팔았다는 얘기를 들어서 더욱 딸을 자신이 키우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에릭은 의대 시절부터 친구인 응급의학과 로리의 연락을 받고 환자를 만나게 된다. 암 말기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의 10대 손자 맥스 자보우스키가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아기 때 집을 나가고 엄마는 알코올중독인 맥스에게 유일한 가족이라고 볼 수 있는 할머니마저 곁을 떠날 것 같다는 생각에 아이는 정서적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맥스를 만난 뒤 에릭은 자신의 집 한편에 딸린 상담실에서 아이를 만나 대화를 나누며 상담을 이어갔다. 맥스와의 상담을 통해 아이가 굉장히 똑똑하지만 불안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맥스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인 르네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맥스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맥스가 실종된다. 에릭은 불안감에 경찰에 신고를 하고 맥스를 찾으러 헤매지만 찾을 수가 없다.




마음이 불안한 사람들을 보살펴주고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신과 의사 에릭은 자신의 직업 정신에 투철한 사람이었다. 헌신적으로 보이기까지 했을 만큼 사명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입장에서 주로 진행되던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연이어 벌어지는 사건으로 인해 안타까운 마음을 느꼈다. 맥스의 상담을 시작하기 이전에 양육권 문제로 골치 아픈 상황에 놓여 있었던 에릭은 상담을 시작한 이후 병원에서 실습 중이던 의대생 크리스틴을 성추행 했다는 혐의가 제기되어 병원 법률팀의 호출을 받았다. 그리고 정신 병동에 입원 중이던 한 환자의 아내에게서는 고소를 하겠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런 여러 문제들에 맥스가 언급했던 여학생 르네가 살해당하면서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이어졌다. 에릭 입장에서는 실종된 맥스가 무슨 일을 벌였을지 몰라 찾아야만 하는 입장이었는데, 경찰 측에서는 에릭을 이상한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맥스가 실종된 이후 에릭은 르네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에 찾아갔고, 퇴근 후에는 미행을 했다는 걸 이웃들이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에릭은 맥스가 르네를 해칠지도 모를 우려로 때문에 한 행동이었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아무리 봐도 용의자로만 보였다.

이 사건으로 에릭은 병원에서 정직을 당하고 딸 해나를 볼 수 없게 됐다.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의 비밀유지 의무로 인해 도리어 자신이 곤란해진 것이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에릭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법적으로는 환자의 상담 내용을 비밀로 해야 했지만, 환자가 다른 사람을 해칠 우려가 있을 때는 경찰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무에도 불구하고 에릭은 무조건적으로 맥스를 믿으며 그가 상담 중에 무슨 말을 했는지 경찰에 알려주려고 하지를 않았다. 심지어 르네의 엄마가 개인적으로 찾아와 애원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를 않았다. 에릭 역시 딸을 키우고 있는 아빠이고 딸을 너무나 사랑하는데도 딸을 잃은 슬픔에 지옥을 살아가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았다.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여러 사건으로 힘들어하는 에릭을 안타깝게 여겼지만, 가면 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라 그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실종됐던 맥스가 나타났을 때 엄청나게 큰 사건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사건 이후에 에릭은 자신의 처지가 더욱 곤란해졌는데도 맥스를 향한 신뢰를 굳건히 지켰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렇게 주인공에 대한 감정이 무미건조해지면서 범인이 나타나고 번복되어 진범이 다시 나타나는 등의 나름 반전이 있었다. 그 반전을 읽어나가면서도 별다른 감정이 일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밝혀진 범인을 보며 너무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종종 등장한 범인의 시점에서 이야기했던 것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밝혀진 범인보다는 에릭이 마지막에 만난 이가 범인이라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었다. 물론 에릭은 처음부터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것만 보는 주인공 에릭에게 공감이 안 되니 영 짜증만 났던 소설이었다. 술술 잘 읽히긴 했는데 좋은 감정을 남기지는 않았다.



​​​​​​​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 많은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있으며,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세상에는 하나의 얼굴만 보여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더 잘 알았어야만 했다. - P603.604

"그 애는 거짓말쟁이예요. 당신네들 말로 병적인 거짓말쟁이예요. 그 애를 믿으면 안 돼요." - P260.261

"정신과 의사들이 환자들을 배신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준다는 확신이 없다면 자신들의 생각과 두려움, 감정들을 털어놓을 수 없을 겁니다. 패리시 선생님은 비밀유지 조항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환자들을 아끼고, 공익을 중시하기 때문이죠." - P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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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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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는 훈이와 양진은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묵묵히 살았다. 그런 그들에게도 아기가 찾아오지만, 아버지인 훈이를 닮아 윗입술이 갈라진 채 태어나 병으로 죽었고 이후 태어난 두 아이도 갓난아기일 때 아파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태어난 아이가 선자였다. 건강하게 태어난 선자는 밝고 착하게 자라 제 부모처럼 묵묵히 일하는 16살 소녀가 되었다.

양진 대신 장 보는 일을 맡은 선자는 장에 갈 때마다 생선 중개상 고한수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걸 알게 된다. 단골 가게 아주머니가 고한수를 파렴치하다는 듯 욕을 했지만, 선자는 그에게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깨끗한 양복에 하얀 가죽 구두를 신은 잘생긴 그에게 눈길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에서 여러 번 마주친 한수는 선자가 일본인 학생들에게 욕보이고 있을 때 큰 도움을 줬다. 그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자는 그에게 순결을 잃고 아기를 갖게 된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의 삶은 녹록지 않았지만 그래도 부산 너머 섬 영도는 그리 심하지 않은 편이었다. 훈이와 양진 부부는 가난하긴 했어도 자신이 세를 들어살고 있는 집에 하숙을 쳐서 조금이나마 돈을 벌 수 있었고, 마당에 채소를 심고 하숙인들이 바닷가에서 잡은 물고기로 반찬을 올릴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선자 역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소녀가 되었다.

선자가 16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인생을 바꿀 두 남자가 다가온다.
평양에서 영도 하숙집을 찾아온 백이삭 목사는 자신의 형 요셉이 오래전 이곳에 머물다 오사카로 떠났다고 했다. 그때 양진의 음식 솜씨가 너무 좋아서 칭찬하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며, 이삭 역시 오사카로 가기 전에 몇 주 동안 하숙집에 묵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이삭은 하숙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치됐다고 여긴 결핵이 다시 얼굴을 들이민 듯 몸이 나빠졌다. 양진과 선자, 그리고 식모아이들은 아픈 이삭을 내치지 않고 극진히 보살폈다.
또 한 사람은 더럽고 궁색한 이들 사이에서 빛이 나서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던 고한수였다. 깔끔한 양복에 깨끗하게 닦은 구두를 신고 시장을 오가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렸다. 시장 아주머니가 욕하던 것과는 달리 한수는 정중했고 낯선 그가 건네는 말에 전혀 대꾸하지 않는 선자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두 배의 나이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친구가 됐고, 순결한 선자를 처음으로 가지게 된다.

안타깝게도 한수와의 관계에서 아기를 갖게 된 선자는 혼인하지 않은 처녀의 몸이었기에 자신의 처지를 어머니 양진에게조차 알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한수가 오사카에 일본인 아내와 세 딸이 있다는 말을 뒤늦게 했기에 그의 아내가 될 수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정직하게 살아온 제 부모에게 손가락질을 할 것 같았고, 하숙집의 평판이 떨어질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아기를 가져 본 여자라면 당연히 선자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이라 양진의 딸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 도움을 준 사람은 지극한 보살핌을 받아 건강해진 이삭이었다. 아기 아버지가 누군지 결코 밝히지 않은 선자와 뱃속의 아기를 품어주겠다고 하며 선자와 혼인하고 싶다는 말을 양진에게 했다. 평범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누가 제 자식이 아닌 아이를 품은 여자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 거기다 대를 이을 핏줄이나 아들이 우선시되는 시대였기에 이삭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삭은 자신이 믿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며 선자와 아이를 품었고, 형 요셉과 형수 경희가 있는 오사카로 함께 떠난다.

일제가 지배하는 조선에서의 삶보다 오사카가 낫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 어려웠고, 조선인을 향한 일본인의 멸시는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기에 마음까지 힘들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도 선자는 묵묵히 이삭을 뒷바라지했고, 태어난 노아와 둘째 모자수를 보살피는 어머니가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련은 또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라 선자의 삶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이의 존재는 놀라웠으며, 한편으로는 이 인연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생각하게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난 여자 선자의 삶은 평탄함과는 거리가 멀 거라 여겼지만, 고되고 고되며 또 고되기만 한 삶이 그녀를 너무나 힘들게 하는 것 같아 애처로웠다. 그렇게 삶이 휘두르는 채찍에도 불구하고 선자는 굽히지 않으며 자신의 남편을 보살피고 아이들을 먹였으며, 가족이 된 경희와 요셉을 챙겼다. 그리고 돈을 벌게 도와준 식당의 창호도 가족과 같은 관계가 됐다.

읽는 동안 선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느라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그런 선자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나올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선자와 이삭, 고한수로 이루어진 세대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틀이 잡혔고, 이후엔 노아와 모자수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룰 것 같다. 2권도 얼른 읽어보고 싶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여인네가 잘 살고 못 살고는 혼례 올리는 사내한테 달려 있다. 좋은 사내 만나면 괜찮게 살고 나쁜 사내 만나면 욕보고 살고 그라는 기라. 어쨌거나 고생을 각오하고 그냥 열심히 일하면 된데이. 세상천지에 딱한 여인네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믿을 거는 자신뿐인 기라." - P52

by. 한수
"내가 너랑 아이를 아주 잘 돌볼 거야. 가정을 하나 더 꾸릴 돈과 시간이 있어. 내 의무를 다할 거야. 난 진짜로 널 사랑해.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사랑하고 있어. 이건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야. 할 수 있었다면 너랑 혼인했을 거야. 넌 내가 혼인하고 싶은 사람이야." - P86.87

by. 이삭
"제 삶이 의미가 있을 수도 있어요. 형님처럼 많은 사람에게는 아니라도 몇몇 사람에게는요. 제가 이 아가씨와 아이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두 사람도 절 돕게 될 거예요. 저에게 가족이 생길 테니까요. 목사님이 어떻게 보시든 그건 큰 축복입니다." - P113.114

이삭은 왜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고통받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이삭은 다른 이들이 고통받을 때 결코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왜 선자는 고통을 피했는데 그들은 그렇지 못했을까? -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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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러티
콜린 후버 지음, 민지현 옮김 / 미래지향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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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아픈 어머니를 보살피느라 바깥에 나갈 수 없었던 무명의 스릴러 작가 로웬은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에이전시가 주로 연락을 취했던 메일이 아니라 굳이 대면 미팅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출판사 앞 횡단보도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로웬은 당황스러움에 빠진다. 그때 도움을 준 남자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미팅 자리에서 그 남자 제러미와 재회하게 된다.
제러미와 함께 나온 타 출판사 편집장은 인기를 끈 스릴러 시리즈의 작가 베러티 크로퍼드가 건강상의 이유로 시리즈를 이어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로웬이 나머지 시리즈를 써줄 것을 부탁했다. 제러미는 베러티의 남편으로 그 자리에 동석하게 된 것이었다. 왠지 모를 아쉬움이 드는 로웬은 인기 있는 시리즈를 이어쓸 수 없다는 생각에 거절하려고 했지만, 제러미의 설득으로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 로웬은 한적한 곳에 위치한 제러미의 집을 찾아가 얼마 동안 그곳에서 지내게 된다. 베러티가 소설을 위해 써둔 수많은 메모와 노트들, 책들을 모두 옮길 수 없었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로웬이 그동안 어머니를 보살피느라 일을 하지 못해 집세를 밀리는 바람에 거리에 나앉게 된 신세였기 때문이다.
로웬은 그 집으로 가기 전 그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검색을 통해 알아봤었다. 베러티와 제러미 부부는 쌍둥이 두 딸을 시간 차이를 두고 잃었다. 그리고 베러티는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은 있지만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저택 2층에 베러티의 침실이 있었고, 제러미와 막내아들 크루가 살고 있었으며, 낮 시간에는 간호사가 상주했다.

베러티의 소설 시리즈를 읽어보지 못했던 로웬은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서재에서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베러티가 쓴 자서전을 읽게 된다. 큰 충격에 빠진 로웬은 이후 자서전을 계속 읽어나가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겪는다.



작가에게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이어 써 달라는 요구는 관계자가 아닌 내가 보기에도 굴욕적이었다. 공동 저작이라고 이름을 올렸을 때 잘해도 문제, 못하면 더 큰 문제가 될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큰 인기를 끈 시리즈의 작품이라면 팬들의 성화를 감당하기 부담스러울 터였다.
그런데도 로웬이 베러티의 유명한 시리즈를 이어 쓰기로 한 건 원고료를 많이 주기 때문이었다. 베러티의 에이전트가 낮은 액수를 불렀다며 제러미가 더 많이 요구해도 된다고 한 말에 긍정적인 답이 돌아온 게 주효했다. 로웬이 돈이 필요한 상황이라 부담스러운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매력적인 제러미의 영향도 없지는 않았다.

그렇게 일이 진행되면서 제러미의 집에서 얼마 동안 지내게 된 로웬은 서재에서 자료를 살펴보다가 베러티의 자서전을 읽게 된다. 제러미와의 첫 만남으로 시작된 자서전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상황에 금세 빠져버렸다. 로웬은 소설 시리즈를 쓴 베러티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행동이라며 합리화를 했지만, 훔쳐보는 것이란 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그것들을 읽었다.
그런데 자서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베러티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자서전 속 베러티는 제러미에 대한 집착이 굉장했다. 심지어 뱃속에 있던 아이들에게 제러미를 빼앗겼다고 여길 정도였다. 그런 질투심으로 베러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짓을 저질러 경악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에도 베러티는 질투심이 점점 커져 폭발 직전의 폭탄을 안고 있는 상태처럼 보였다. 태어난 쌍둥이 딸들을 향해 나쁜 생각을 하는 게 마치 그녀가 썼다는 스릴러 소설의 악당과 흡사해 보일 지경이었다.
로웬이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제러미에 대한 호감이 연민이 되었고 나중에는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깊은 애정이 되었다. 그리고 제러미 또한 식물인간 상태와 같은 아내 베러티를 돌보는 생활을 하다가 생기 넘치는 매력을 지닌 로웬과 함께 지내게 되면서 비슷한 상실을 경험한 그녀에게 스며들게 됐다.

문제는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씩 달라지면서 베러티가 움직이는 걸 로웬이 종종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의식은 있지만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고 했던 베러티와 눈이 마주치고 심지어는 계단에 서서 로웬을 쳐다보고 있는 걸 분명히 봤다. 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로웬의 말을 믿기엔 상식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로웬은 아주 오래전부터 몽유병 증세를 앓고 있었고, 약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전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었다.
몽유병의 로웬과 식물인간에 가까운 베러티, 그리고 그 사이에 낀 매력적인 제러미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소설이 후반을 향해 가면서 생각보다 이르게 진실이 밝혀졌고, 이후 놀라운 공모가 이어졌다. 그러고서도 소설 분량이 어느 정도 남아 무슨 이야기가 있을지 우려스러웠는데, 밝혀진 진실은 꽤나 큰 충격을 줬다. 그리고 그 충격을 홀로 받아들인 로웬의 결정 역시 놀라움을 안겼다. 소설 속에 등장한 두 작가 로웬과 베러티의 정신세계는 평범한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라 어질어질했다.

근래에 출간된 추리 소설의 주인공 트렌드는 믿을 수 없는 캐릭터인가 보다. 이 소설의 로웬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자 화자였지만, 좀처럼 신뢰하기 어려웠다. 그 덕분에 소설의 재미를 느낀 것이지만 말이다.



​​​​​​​

이 글은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여자가 쓴 것이며, 내가 지금 그녀의 집에서 기거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머리에 맴돌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저 위에 베러티가 있다. 자고 있거나, 먹고 있거나,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겠지. 이 집안에 나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도사리는 그녀의 기운이 느껴졌다. - P131.132

by. 베러티
가끔 제러미를 처음 만나던 날 밤을 떠올리곤 한다. 그날 서로의 눈빛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지금 나의 삶이 달라졌을까? 나의 운명은 처음부터 이렇게 비극적인 결말을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운명이 아니라 잘못된 선택의 결과였을까? - P76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늘 잠을 자고 있는 상태에서 내가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나를 믿을 수 없게 된 것 같아 두려웠다. 내가 정말 베러티를 본 걸까? 스트레스로 인한 환각이었을까? 그녀의 남편과 가까워진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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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심장 스토리콜렉터 100
크리스 카터 지음, 서효령 옮김 / 북로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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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오밍주에 있는 어느 휴게소의 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려던 보안관과 보안관보는 그곳으로 돌진해오는 픽업트럭을 발견하고 가게 안 사람들에게 피하라고 소리친다. 큰 사고가 일어날 거라 예상했지만, 다행히 트럭은 식당을 살짝 빗겨가 바로 옆에 있는 창고와 화장실 건물에 처박혔다. 보안관이 밖으로 나가 확인한 결과 운전자가 깨진 유리에 찔려 즉사했다는 걸 알았다.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보안관보를 불렀으나 그는 픽업트럭이 치고 가는 바람에 열린 차의 트렁크를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트렁크 속에 있던 열린 아이스박스 안에는 여자의 잘린 머리 두 개가 들어있었다. 그 즉시 식당에 있던 차의 운전자가 체포되어 FBI로 넘겨졌다.

LAPD의 로버트 헌터는 파트너와 오랫동안 매달린 살인사건을 끝내고 휴가를 앞두고 있었다. 하와이로 2주간 여행을 떠나기 위해 몇 시간 후 비행기를 타려는 그는 사무실로 급히 오라는 반장의 연락을 받는다. 사무실에 도착한 헌터는 FBI 강력범죄분석센터의 센터장 에이드리언 케네디와 특수요원 코트니 테일러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은 헌터에게 와이오밍주 휴게소에서 일어난 추돌사고로 발견하게 된 두 여자의 머리를 이야기하며 붙잡은 용의자의 신상에 대해서도 말한다. 용의자의 면허증을 통해 알게 된 신상과 차량 소유주의 존재에 대해 말해도 헌터는 그들이 누군지 모른다. 그러다 FBI 측이 3일 동안 그가 유일하게 내뱉은 '로버트 헌터에게만 말하겠다'는 말을 들려주며 용의자의 사진을 보여주자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휴가를 포기하고 FBI 아카데미가 있는 콴티코로 향한다.



우연한 추돌사고로 발견하게 된 몸통 없는 머리로 인해 살인 용의자가 체포되었다. 시신은 단순히 목이 잘린 게 아니라 살아있을 때 심하게 고문당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입술에는 자물쇠가 세 개 채워져 있었고, 자물쇠를 제거하자 치아 전부와 혀가 없었다. 심지어 안구까지 적출돼 있었다. 너무나 끔찍한 사건이라 용의자는 당연히 FBI에 넘겨졌다. 하지만 용의자는 3일 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로버트 헌터의 이름이 언급되자 FBI는 반드시 그를 데리고 와야만 했다.
LA의 특수강력범죄수사대 팀장 로버트 헌터는 23살 때 FBI의 스카우트를 받았을 만큼 출중한 능력이 있었고, 그가 쓴 범죄 심리학 박사 논문은 FBI 요원들의 필독서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프로파일러 중에 최고라고 칭하는 그를 용의자가 찾고 있으니 당연히 모셔가야 했다.
그러나 헌터는 사건에 대해 듣고 있어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온전히 FBI의 소관일 뿐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FBI 요원들을 따라 콴티코로 향하게 된 건 용의자가 스탠퍼드 대학 시절 룸메이트로 친하게 지냈던 루시엔 폴터였기 때문이다.

헌터는 콴티코에서 오랜만에 루시엔과 재회하며 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헌터가 졸업을 하고 떠난 뒤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하던 루시엔은 마약 중독으로 인해 나쁜 이들에게 손을 벌리게 되어 물건을 배달하는 일을 했었다고 말했다. 자신은 범인이 아니고, 누가 그랬는지 안다고 하며 혹시 몰라 그들에게 의뢰를 받았을 때마다 기록해둔 공책이 있는 곳을 알려줬다.
FBI 요원 코트니와 함께 루시엔이 알려준 은신처로 가게 된 헌터는 대학 시절 루시엔과 함께 셋이서 어울렸던 수전의 문신 피부가 걸린 액자를 발견한다. 이후 콴티코로 돌아온 헌터는 결백을 주장했던 루시엔의 완전히 다른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그때부터 소설은 루시엔이 설계한 게임을 따르는 헌터의 두뇌 싸움으로 진행됐다. 뛰어난 두뇌를 자랑하며 어릴 때부터 월반을 거듭해 16살에 특별히 대학에 입학을 허가받은 헌터와 살인에 대한 욕구와 오랫동안 싸워가다 결국 굴복해 이 모든 걸 설계한 루시엔의 싸움이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었다. 헌터는 루시엔과 오랜만에 만나긴 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말려들지 않으려 감정을 통제했다. 반면에 동석한 FBI 요원 코트니는 헌터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게임에 때때로 말려들어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그런 코트니를 보며 루시엔은 즐거워했고, 그녀를 가지고 놀았다.
루시엔과 게임을 진행하면 할수록 그의 살인이 오랫동안 지속돼 왔다는 걸 알게 되면서 큰 충격에 빠졌다. 첫 살인은 같이 어울렸던 수전이었고, 이후엔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살인을 해왔다는 게 밝혀졌다. 심지어 그의 살인은 연쇄 살인이라고 할 수 있는 수법이 있는 게 아니라 여자와 남자를 가리지 않으며 여러 나이대의 사람들을 살해했고, 지역 역시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25년 동안 루시엔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었다.
심지어 루시엔은 심리학을 전공한, 빌어먹게 똑똑한 인간이었다. 그가 했을 살인을 밝혀내고 피해자의 유골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무조건 그에게 협조해야만 했다. 그게 피해자의 가족을 위한 길이라는 걸 헌터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시엔과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가 놀라운 진실을 말하자, 헌터는 그동안 견고하게 쌓아올렸던 감정이 한꺼번에 허물어진다. 그 부분을 읽으며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대체 이 악마는 뭘까 하는 생각을 거듭했다. 냉정을 유지했던 헌터가 당장 루시엔을 죽인다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시엔은 또 다른 진실을 밝히며 자신의 게임을 이어갔다. 헌터와 코트니는 끝까지 그에게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루시엔이 설계해 둔 게임이 대체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어 무서웠고 긴장됐다. 과연 헌터가 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헌터 역시 만만치 않은 천재적 두뇌를 가지고 있었기에 결말은 다행스러웠다고 할 수 있었다. 헌터의 개인적인 사정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기도 하지만, 루시엔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줄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이 소설은 '로버트 헌터 시리즈'의 6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국내에는 이 작품만 출판되었다. 단독 작품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을 내용이라 읽는 데에 큰 무리가 없었다. 오히려 이 시리즈를 전부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정도로 재미가 있었다. 하루 만에 다 읽었을 만큼 흥미진진했다. 로버트 헌터는 물론이고 루시엔까지 캐릭터의 매력이 도드라져서 푹 빠졌었다.
작가의 필력이 굉장했다. 부디 '로버트 헌터 시리즈'가 계속 나와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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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넌 흥미를 느끼지 않아? 그렇게 열성적이었던 학생이, 살인자의 머릿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싶지 않았다고?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진짜 이유가 궁금하지 않았던 거야? 우리가 배웠던 이론들이 진실인지, 아니면 멍청한 심리학자들의 허튼 추측에 불과할 뿐인지 정말로 알고 싶지 않았어?" - P228

"자,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알려주지. 나한테 질문 몇 개를 하게 해줄게. 나는 그 질문들에 진실하게 대답할 거야. 진심이야. 거짓말은 하지 않아. 그 후엔 내가 질문할 차례야. 내게 정직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싶으면, 심문은 24시간 동안 종료야. 다음 날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나는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너희는 내게 진실을 말하고. 이 정도면 공평하지 않아?" - P167

"루시엔은 경험이 많습니다. 이 게임을 아주 오랫동안 해오고 있어요. 비록 우연히 붙잡혔다 해도, 모든 수를 아주 세밀하게 계산해놓았죠. 노련한 선수는 비장의 카드를 사용할 줄 압니다."
"절대 빨리 내놓지 말 것." 테일러가 말했다. "가장 좋은 순간이 올 때까지 쥐고 있을 것."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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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
팜 제노프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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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뉴욕.
그레이스 힐리는 일상을 벗어난 전날 밤으로 인해 복잡한 출근길에 올랐다. 평소 타던 버스가 아닌 기차를 선택한 그녀는 기차역에서 우연히 벤치 아래에 놓인 여행 가방을 발견한다. 주인을 찾아주려는 마음에 살펴보던 그녀는 가방 옆에 '엘리노어 트리그'라고 쓰인 이름을 본다. 왠지 모를 호기심이 생긴 그레이스는 가방 안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다가 손을 베였는데, 그녀를 다치게 한 봉투 안에 든 사진들을 발견한다. 스물다섯이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젊고 어린 여자들의 독사진이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던 그레이스는 기차역 바깥에서 갑자기 울린 사이렌에 지레 겁을 먹어 사진을 자신의 가방에 넣고 자리를 떠난다.

1943년 런던.
특수작전국에서 그레고리 윈슬로 국장의 비서로 일하는 엘레노어 트리그는 회의에 참석했다. 이번 달 들어서 프랑스에 파견된 요원들이 세 번째로 붙잡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상황이다. 남자들은 모두 징집 대상인 까닭에 마을을 돌아다니는 젊은 남자 요원들이 붙잡힌 건 당연한 얘기였다.
엘레노어는 어느 마을에나 차고 넘치는 여자들 사이에 숨을 수 있는 여자 요원들이 임무를 대신 수행할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한다. 남자 요원들만큼 잘 훈련시킨 여자 요원들을 파견한다면 독일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회의에 참석한 군인들은 반대 의사를 내비쳤지만, 윈슬로 국장의 지지로 인해 엘레노어는 여성 요원들을 발굴해 훈련시키는 책임자를 맡게 된다.

1943년 런던.
점심때마다 가는 카페에 앉아 보들레르의 시집을 읽던 마리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프랑스어로 된 시의 구절을 읽어달라고 말한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남자의 간청에 마리는 시를 읽어주게 된다. 다 들은 남자는 마리에게 주소만 적힌 명함을 주며 새로운 직장에 관심이 있을 것 같다며 그곳으로 꼭 가보라고 말한다. 덧붙여 급여가 좋다는 얘기도 남겼다.
남편 없이 혼자 딸을 키우다 숙모 집에 맡기고 혼자 런던에서 일하고 있던 마리는 호기심에 그곳을 찾는다. 엘레노어를 마주한 마리는 훈련을 받은 뒤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여자 행세를 해야 한다는 일에 대해 듣는다.



전쟁이 끝난 뒤 뉴욕에서 소녀들의 사진을 발견하게 된 그레이스, 여자 스파이 요원들의 총책임자인 엘레노어, 그리고 그 요원들 중 한 명인 마리의 시점으로 번갈아가며 진행되던 소설이었다.
우연히 사진을 발견한 그레이스는 카메라를 응시하던 한 소녀의 눈빛으로 인해 소녀들이 가지고 있을 이야기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엘레노어는 중책을 맡고 있는 자리에서 그 누구보다 냉정함을 유지해야 했지만, 자신의 소녀들에게 깊이 마음을 쓰고 있었다. 마리는 위험한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무선통신원으로 임무를 수행하며 뜨겁고 치열한 순간을 살았다. 엘레노어와 마리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레이스는 모든 게 끝난 후에 그녀들 각자의 이야기를 알고 싶어 했다.
처음엔 그레이스가 사진을 가져간 걸 보며 그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찌 됐건 남의 물건을 가져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왜 그렇게 호기심이 동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레이스의 심리는 처음부터 내게는 좀 의아한 구석이 많았다. 그레이스가 사진을 발견한 사건이 모든 이야기의 시발점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레이스와 엘레노어, 마리는 각자의 상처가 있었다는 점이 서로 잘 알지 못했던 그녀들을 연결해 준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을 만나기 위해 휴가를 나오던 남편 톰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폴란드 국적의 유대인인 엘레노어는 여동생을 잃은 상처를 안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남은 딸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리 역시 남편이 떠났는데, 전쟁 중 전사가 아니라 도망을 친 바람에 홀로 딸을 키우고 있는 처지였다. 나중에서야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그녀들이 가진 공통의 상처가 마주한 상대에게 마음을 쓰게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전쟁이 그녀들을 직간접적으로 힘들게 만들어 상처를 냈다.

이들 중에서 가장 극적인 삶을 살았던 건 당연히 마리였다. 딸을 맡겨두고 일을 하며 살다가 갑자기 고된 훈련을 받아 프랑스 여자 행세를 하게 됐는데, 독일군이 포진해 있는 한복판에서의 상황이 너무나 위험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프랑스 북부팀의 총책임자인 베스퍼를 알게 되면서 고된 상황 속에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그녀는 위험에 처하게 되고, 끔찍한 일을 몇 번이고 겪고 만다. 놀라운 건 그 이후 마리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보면 대단하다고 느껴졌는데, 마음 한구석에는 극적인 감동을 위한 작위적 진행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반면에 안타까웠던 건 엘레노어였다. 그녀는 여성 요원들의 책임자였지만, 뉴욕에 와서 사망했다는 게 소설 초반에 밝혀졌다. 죽은 그녀가 왜 런던에서 뉴욕까지 오게 됐는지 밝혀지는 여정이 이어지며 오해했던 부분이 풀어지는 과정을 보여줬다. 그 오해라는 게 굉장한 파장을 일으킬 만한 것이라 덩달아 마음이 휩쓸렸고, 나중에 진실이 밝혀졌을 때 미안한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잘 마무리된 결말이었지만 아쉬운 부분이 더러 느껴지기도 했던 소설이다. 극적인 전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내게는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아 그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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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으려고 한 게 아니라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알고 싶었던 거예요." - P355

"어쨌든 딸이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겠지. 딸을 위해서 싸우는 거고, 앞으로 딸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위해서 싸우는 거잖아.
(……중략)
혹시라도 마음이 흔들리면 딸이 어른이 되었을 때를 상상해 봐. 그리고 성인이 된 딸에게 엄마가 전쟁 중에 어떤 일을 했는지 설명하는 모습을 생각해 봐. 아니면 우리 엄마가 하신 말씀처럼 너 스스로 자랑스러움을 느낄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보든가." - P93.94

이 소녀들은 위험하고 치명적인 임무를 완벽히 수행해야 하고 안전하게 돌아와야 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 두 가지뿐이었다. 그 두 가지를 전부 해낼 수 있을까?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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