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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
팜 제노프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1년 7월
평점 :
1946년 뉴욕.
그레이스 힐리는 일상을 벗어난 전날 밤으로 인해 복잡한 출근길에 올랐다. 평소 타던 버스가 아닌 기차를 선택한 그녀는 기차역에서 우연히 벤치 아래에 놓인 여행 가방을 발견한다. 주인을 찾아주려는 마음에 살펴보던 그녀는 가방 옆에 '엘리노어 트리그'라고 쓰인 이름을 본다. 왠지 모를 호기심이 생긴 그레이스는 가방 안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다가 손을 베였는데, 그녀를 다치게 한 봉투 안에 든 사진들을 발견한다. 스물다섯이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젊고 어린 여자들의 독사진이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던 그레이스는 기차역 바깥에서 갑자기 울린 사이렌에 지레 겁을 먹어 사진을 자신의 가방에 넣고 자리를 떠난다.
1943년 런던.
특수작전국에서 그레고리 윈슬로 국장의 비서로 일하는 엘레노어 트리그는 회의에 참석했다. 이번 달 들어서 프랑스에 파견된 요원들이 세 번째로 붙잡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상황이다. 남자들은 모두 징집 대상인 까닭에 마을을 돌아다니는 젊은 남자 요원들이 붙잡힌 건 당연한 얘기였다.
엘레노어는 어느 마을에나 차고 넘치는 여자들 사이에 숨을 수 있는 여자 요원들이 임무를 대신 수행할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한다. 남자 요원들만큼 잘 훈련시킨 여자 요원들을 파견한다면 독일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회의에 참석한 군인들은 반대 의사를 내비쳤지만, 윈슬로 국장의 지지로 인해 엘레노어는 여성 요원들을 발굴해 훈련시키는 책임자를 맡게 된다.
1943년 런던.
점심때마다 가는 카페에 앉아 보들레르의 시집을 읽던 마리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프랑스어로 된 시의 구절을 읽어달라고 말한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남자의 간청에 마리는 시를 읽어주게 된다. 다 들은 남자는 마리에게 주소만 적힌 명함을 주며 새로운 직장에 관심이 있을 것 같다며 그곳으로 꼭 가보라고 말한다. 덧붙여 급여가 좋다는 얘기도 남겼다.
남편 없이 혼자 딸을 키우다 숙모 집에 맡기고 혼자 런던에서 일하고 있던 마리는 호기심에 그곳을 찾는다. 엘레노어를 마주한 마리는 훈련을 받은 뒤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여자 행세를 해야 한다는 일에 대해 듣는다.
전쟁이 끝난 뒤 뉴욕에서 소녀들의 사진을 발견하게 된 그레이스, 여자 스파이 요원들의 총책임자인 엘레노어, 그리고 그 요원들 중 한 명인 마리의 시점으로 번갈아가며 진행되던 소설이었다.
우연히 사진을 발견한 그레이스는 카메라를 응시하던 한 소녀의 눈빛으로 인해 소녀들이 가지고 있을 이야기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엘레노어는 중책을 맡고 있는 자리에서 그 누구보다 냉정함을 유지해야 했지만, 자신의 소녀들에게 깊이 마음을 쓰고 있었다. 마리는 위험한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무선통신원으로 임무를 수행하며 뜨겁고 치열한 순간을 살았다. 엘레노어와 마리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레이스는 모든 게 끝난 후에 그녀들 각자의 이야기를 알고 싶어 했다.
처음엔 그레이스가 사진을 가져간 걸 보며 그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찌 됐건 남의 물건을 가져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왜 그렇게 호기심이 동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레이스의 심리는 처음부터 내게는 좀 의아한 구석이 많았다. 그레이스가 사진을 발견한 사건이 모든 이야기의 시발점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레이스와 엘레노어, 마리는 각자의 상처가 있었다는 점이 서로 잘 알지 못했던 그녀들을 연결해 준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을 만나기 위해 휴가를 나오던 남편 톰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폴란드 국적의 유대인인 엘레노어는 여동생을 잃은 상처를 안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남은 딸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리 역시 남편이 떠났는데, 전쟁 중 전사가 아니라 도망을 친 바람에 홀로 딸을 키우고 있는 처지였다. 나중에서야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그녀들이 가진 공통의 상처가 마주한 상대에게 마음을 쓰게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전쟁이 그녀들을 직간접적으로 힘들게 만들어 상처를 냈다.
이들 중에서 가장 극적인 삶을 살았던 건 당연히 마리였다. 딸을 맡겨두고 일을 하며 살다가 갑자기 고된 훈련을 받아 프랑스 여자 행세를 하게 됐는데, 독일군이 포진해 있는 한복판에서의 상황이 너무나 위험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프랑스 북부팀의 총책임자인 베스퍼를 알게 되면서 고된 상황 속에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그녀는 위험에 처하게 되고, 끔찍한 일을 몇 번이고 겪고 만다. 놀라운 건 그 이후 마리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보면 대단하다고 느껴졌는데, 마음 한구석에는 극적인 감동을 위한 작위적 진행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반면에 안타까웠던 건 엘레노어였다. 그녀는 여성 요원들의 책임자였지만, 뉴욕에 와서 사망했다는 게 소설 초반에 밝혀졌다. 죽은 그녀가 왜 런던에서 뉴욕까지 오게 됐는지 밝혀지는 여정이 이어지며 오해했던 부분이 풀어지는 과정을 보여줬다. 그 오해라는 게 굉장한 파장을 일으킬 만한 것이라 덩달아 마음이 휩쓸렸고, 나중에 진실이 밝혀졌을 때 미안한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잘 마무리된 결말이었지만 아쉬운 부분이 더러 느껴지기도 했던 소설이다. 극적인 전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내게는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아 그런 듯하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으려고 한 게 아니라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알고 싶었던 거예요." - P355
"어쨌든 딸이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겠지. 딸을 위해서 싸우는 거고, 앞으로 딸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위해서 싸우는 거잖아. (……중략) 혹시라도 마음이 흔들리면 딸이 어른이 되었을 때를 상상해 봐. 그리고 성인이 된 딸에게 엄마가 전쟁 중에 어떤 일을 했는지 설명하는 모습을 생각해 봐. 아니면 우리 엄마가 하신 말씀처럼 너 스스로 자랑스러움을 느낄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보든가." - P93.94
이 소녀들은 위험하고 치명적인 임무를 완벽히 수행해야 하고 안전하게 돌아와야 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 두 가지뿐이었다. 그 두 가지를 전부 해낼 수 있을까?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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