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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원 ㅣ 로망 컬렉션 Roman Collection 8
서진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6년 8월
평점 :
남쪽 지방 여행부분이 길어서 약간 지루한 감이 있었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티브이 화면에서 우연히 본 수목원이 눈에 익어 찾아본 15년 전의 사진에서, 같은 배경 앞에 있는 스무 살의 나를 보면서 잊고 있었던 첫사랑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히데오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중저가 브랜드의 여성복 회사의 과장인 이수는 입사동기인 유부남인 재영과 원할 때마다 서로의 육체를 탐닉한다. 이제 이수는 재영의 피부 감촉과 아직 탄탄한 다리근육과, 서서히 탄력을 잃어가는 허벅지 안쪽 살까지 너무 잘 안다. 그렇게 편하게 섹스에 몰입하는 사이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두 사람 모두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런 재영과의 관계로 자신의 일상을 지탱하고 있는 이수는, 재영이 새로 들어온 자신의 부하직원인 차 대리와 비록 업무적이긴 하지만 그 관계가 긴밀해지고 견고해지는 보면서 불안을 느끼고 초조해한다.
재영이 연애시절부터 결혼까지 이수가 옆에서 보아온 재영의 아내가 만삭의 몸으로 찾아와 울면서 재영과 차 대리와 사이를 의심하며 이수에게 둘의 관계를 알아봐달라고 하고 돌아간다. 재영의 아내가 의심스럽다고 조목조목 얘기했던 부분들은 모두 이수 자신의 흔적들이었다. 이수는 더욱 괴로워져 폭음을 하고 만취하여 의식을 잃기도 한다. 이수는 히데오와 자주 가던 라멘집이 생각나서 찾아갔던 일식집에 자주 들리게 되면서, 음식을 직접 만드는 사십대 중반의 주인과 친하게 되고, 그로부터 많은 위안을 받는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고 고배지진 때 그곳에 있었다는 그는, 어떤 허위나 가식이 끼어들 틈이 없는 순순한 미소,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쓸쓸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잘 어울리는 웃음을 웃는 남자였다. 그에게도 말 못할 상처가 있다.
이수는 재영을 떠나려 하나 재영은 이수를 쉽게 놓아 주지 않으려 한다. 이수는 휴가원을 던지고 남쪽 바닷가로 여행하면서 히데오와의 추억에 잠긴다. 이수는 고교 2년 때 어머니가 한국식 주점을 하는 일본으로 건너가 엄마와 함께 살게 되면서 3년 동안 히데오를 거의 매일 만났다. 둘 사이에 실수로 아기가 들어섰지만 이수는 기뻐했다. 그러나 히데오는 기뻐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에서 살던 헤데오는 8살 때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겼었고, 히데오의 어머니는 그 휴유증으로 일본에서 돌아온 지 4년 후 유방암 진단을 받고 죽었다. 히데오는 자신도 방사능으로 일찍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이수는 이런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이는 태어나자 곧바로 죽었다. 그녀는 잠을 자기 위해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히데오를 괴롭혔다. 히데오도 엄마도 지쳐갔다. 이수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 히데오는 잠시만 쉬다 오라고 했었다. 이수는 사직서를 회사로 보내고 일본으로 간다.
엄마로부터 히데오의 아버지가 오래 전부터 이수를 한 번 보고 싶어 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만난다, “히데오는 잘 있죠?” “그럼 잘 있고말고.” 두 사람은 묻고 답하고, 히데오의 아버지는 이수를 데리고 히데오에게 가면서 히데오의 이야기를 해준다. 수목원을 지나 산사에 이른다. 눈 쌓인 숲 한 나무 앞에 히데오는 딸 리에의 유골과 함께 같은 단지에 묻혀 있었다. 그는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이수와 헤어지려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히데오와 리에를 묻은 곳 위에 쌓인 눈을 헤치자 두 나무의 밑둥으로 연결된 뿌리가 뒤엉켜 하나가 되어 있었다. 하나가 된 뿌리 위에 손을 얹는다. 이수는 당분간 일본에 머물며 그와의 추억이 있던 곳을 다니며 그와 리에를 충분히 기억하고 사랑하려 한다. 연리목처럼 하나가 되려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재미를 더하는 것이 적지 않은 분량이 나오는 일식집 마츠리에서의 이야기다. ‘그릇을 들어 아직도 따뜻한 국물까지 훌훌 들어마셨다, 기분 좋은 포만감이 온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무장해제되는 기분이다. 음식을 만들고,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는 그 분위기가 참 좋다. 사람 사이에 훈훈한 정이 흐르고 위로를 받는다. 이 부분들을 읽으면서 나는 입에 군침이 돌았고 당장 그런 일식집에 가서 음식을 즐기고 인정을 만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