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혐오 - 젠더·계급·생태를 관통하는 혐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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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를 특별한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기회가 주어졌다고 상상해 보자.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구조와 패턴이 눈앞에 또렷이 드러나고, 심지어 서구 중심 문명의 앞날까지 어렴풋이 읽힐지도 모른다. 다만 그 시야를 얻는 대가로, 역사 속 공포의 방을 끝까지 통과해야 한다면그럼에도 과연 우리는 보고 싶을까?

 

저자 데릭 젠슨은 작가이자 교사, 환경운동가다. 그는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대규모 벌목과 연어 절멸 같은 현장을 오래 지켜본 경험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례를 엮어 우리 문화가 지구와 생명을 어떻게 해쳐 왔는지 차분히 보여 준다. 이 책에서 그는 혐오경제가 사회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얽혀 작동하는지를 추적한다. 질문은 단순하다. 왜 노골적 혐오보다 이익의 이름으로 더 많은 잔혹이 벌어지는가? 젠슨은 홀로코스트, 린치, 환경 파괴, 강간, 콜롬비아의 죽음의 분대’, 산업 재해처럼 서로 성격이 다른 사건들을 한데 엮어, 섬뜩할 만큼 설득력 있는 하나의 큰 그림을 그려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런 만행은 생명보다 생산을 앞세우는 경제 체제에서 필연적으로 맺히는 열매다.

 

자본주의에 익숙한 우리는 모든 것에 가격표를 붙이고, 살아 있는 존재까지 상품으로 환원한다. 젠슨의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의 체제는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끌 탐욕과 세계화를 비호한다. 저자의 주장은 광범위하고 때로 과감해 보일 수 있지만, 그는 미시적 역사와 맥락을 자연스럽게 엮어 오싹할 만큼 그럴듯한 결론으로 이끈다. 젠슨은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이다. 그는 열정적인 목소리로, 겉으로는 무관해 보이는 사건들의 연결고리를 집요하게 드러내는 데 탁월하다.

 

책은 1918년 미국 조지아주 발도스타에서 벌어진 메리 터너 공개 살해 사건을 섬뜩하게 재구성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당시 한 백인 농부가 살해되자 격분한 백인 폭도들은 흑인 남성 11명을 린치했는데, 그중 열 명은 억울한 희생자였다. 메리 터너의 남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격앙된 백인 공동체에게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메리 터너가 남편의 죽음에 대한 보복, 아니 최소한의 정의를 공개적으로 요구하자AP 보도에 따르면발도스타의 선량한 시민들은 그녀의 말과 태도를 문제 삼아, 임신 8개월이던 그녀를 휘발유와 흉기, 총탄이 난무한 집단 광란 속에서 잔혹하게 살해했다.

 

환경 파괴와 산업 재해의 장면에서도 같은 질문이 이어진다. 1984년 인도 보팔의 유니언 카바이드 공장 폭발메틸 이소시아네이트 40톤이 누출되어 약 8천 명이 사망하고 20만 명이 부상한 사건을 그는 단순한 사고로 읽지 않는다. 독성 화학물질로 이윤을 내는 구조에서 이런 참사는 예견된 결과에 가깝다. 보팔 공장의 안전장치 축소를 짚는 한편, 미국에서 멕시코계 이주 농업 노동자들이 살충제 산업에서 얼마나 손쉽게 대체 가능한 사람으로 취급되는지도 보여 준다.

 

여기서 다시 책임의 문제가 제기된다. 보팔에 독을 만드는 공장을 지을 권리는 누가 부여했는가. 무엇이 그 일을 정당화하는가. 젠슨은 우리의 법과 관행 속에, 어떤 종류의 죽음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게 만드는 장치가 촘촘히 숨어 있다고 말한다. 생태계 파괴, 유색인에 대한 폭력, 여성과 아동에 대한 범죄는 대개 그렇게 취급되는 반면, 부유층의 재산을 건드리는 일에는 신속히 단죄가 내려진다.

 

이렇듯 책은 증오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깊이 파고든다. 젠슨의 글이 독자의 충격을 노리거나 죄책감을 부추기려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과거와 현재의 비극적 장면들을 불편할 만큼 자세히 그려 보이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그는 우리’, 곧 평범한 미국인들이 이런 사건들 속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 묻는다. 그 답은 첫 장을 여는 프리모 레비의 인용문이 예고한다. “괴물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수는 너무 적어 진정한 위협이 되지 못한다.

 

더 위험한 것은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은 채 믿고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평범한 사람들, 곧 기능인들이다.” 젠슨은 대다수가 차마 묻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은 대단히 불편하다. 책을 덮을 즈음이면 우리는, 인도 보팔의 참사로 8,000명이 목숨을 잃은 일, 노예제, 아메리카 원주민의 파괴, 생계를 위해 목숨을 갉아먹는 일자리를 두고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현실, 우리 모두의 생명을 떠받치는 생태계를 끊임없이 훼손하는 일 등 온갖 참상을 낳는 탐욕적 기업 문화를 우리가 스스로 떠받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진보’, ‘문명’, ‘개발이라는 이름의 더러운 전쟁에서, 아무 생각 없이 명령에 따르는 일개 보병으로 자신을 발견한다. 이 책은 우리의 경제·사회 시스템이 중심에 증오를 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시스템을 굴러가게 하기 위해 혐오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우리가 살아온 문명은 앞으로도 같은 것을 되풀이해 낳을 것이다. 그것이 이 존재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편한 책을, 어떻게 가능한 한 강한 어조로 추천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젠슨은 서문에서 답한다. “만행을 멈추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낳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이해하고 바꾸어야 한다. 이 책은 무기다. 세계를 인식하고 존재하는 방식에 우리 자신을 묶어 두는 밧줄을 끊어내는 칼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성냥이다.” 우리는 연관성이 없다고 믿는 체하며 시선을 돌릴 수도 있다. 아니면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고, 크게 숨을 들이쉬어, 세계를 바꾸는 일에 착수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우리가 당연시해 온 믿음과 제도를 다시 보게 만들고, 끝까지 책임을 추적하도록 독자를 밀어붙이는, 손에 쥘 수 있는 도구다.

 

#한달한권할만한데 #벽돌책격파 #문명과혐오 #데릭젠슨 #아고라 #책추천 #책리뷰 #온라인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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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에 관한 거의 모든 이야기 - 벤츠에서 테슬라까지, 150년 역사에 담긴 흥미진진 자동차 문화사전
루카 데 메오 지음, 유상희 옮김 / 미래의창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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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살아온 시선이 이끄는 자동차 문명의 입문서이자 애정과 성찰이 균형을 이루는 진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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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에 관한 거의 모든 이야기 - 벤츠에서 테슬라까지, 150년 역사에 담긴 흥미진진 자동차 문화사전
루카 데 메오 지음, 유상희 옮김 / 미래의창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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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은 자동차를 원제 사랑의 사전이라는 틀로 풀어낸 독특한 수필집이다. 제목 그대로 사전의 형식을 빌리지만 사전적 객관성보다는 개인적 기억과 업계에서의 경험을 앞세운다. 저자는 르노 그룹의 최고경영자로 지난 30여 년 동안 유럽의 여러 제조사에서 일한 경영자이다. 이 책은 그가 현장에서 보고 느낀 자동차 문명의 얼굴을 A부터 Z까지 항목별로 정리해 보여준다. 세세한 뒷이야기, 브랜드 전략과 디자인 감각, 정책과 사회 변화를 오가며 자동차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시대를 비추는 문화적 거울임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이 책의 구성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각 항목은 길지 않은 글로 이루어져 있어 어디든 펼쳐 읽기 좋다. “왜 페라리는 빨간색인가와 같은 상징의 기원부터, “19세기 초 전기차는 무엇이 달랐는가같은 역사적 질문, “회전교차로(라운드어바웃)는 교통 문화를 어떻게 바꾸었는가라는 도시 인프라의 이야기, “중국은 어떻게 전기차 강국이 되었는가라는 산업 재편의 흐름까지 폭넓게 다룬다. 항목 간 연결성은 별로 없지만 그 느슨함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동한다. 한 꼭지를 읽을 때마다 소소한 발견을 하고, 그 발견들이 쌓여 자동차라는 거대한 생태계의 윤곽을 자연스럽게 그려 보게 된다.


저자의 목소리는 일관되게 현장 지향적이다. 다행히도 자랑 일색인 성공담을 늘어놓지는 않는다. 시장에서 고전한 모델과 빗나간 전략, 전환기에 나온 실수들까지도 숨기지 않는다. 예컨대 차량의 지나친 무게 증가가 가져오는 역효과,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덧칠된 비현실적 기획, 규제와 보조금의 파도에 휩쓸리는 기업의 의사결정 같은 부분을 담담히 짚는다. 이런 서술은 경영 보고서의 숫자가 아니라 숫자 뒤에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의 시선을 보여 준다. 독자는 그 시선을 통해 디자인, 브랜딩, 생산, 유통, 정책, 레이스 문화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책의 또 다른 특징은 다양한 직군의 목소리이다. 저자는 곳곳에서 레이서, 디자이너, 경영자, 업계 종사자의 짧은 코멘트를 끌어와 한 항목 안에 여러 시각을 겹쳐 놓는다. 자동차는 오랫동안 기술과 욕망, 안전과 속도, 규제와 자유의 갈등이 교차하는 장소였고 이 책은 그 교차점을 다양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 덕분에 독자는 엔진의 종류신차의 사양같은 시시콜콜한 관심을 넘어 왜 어떤 자동차가 세대의 취향을 바꾸고 도시의 풍경을 다시 그렸는지까지 생각하게 된다. 또한 브랜드의 역사는 단지 마케팅의 산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언어라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체감한다.

 

읽기의 손맛은 알파벳식 배열이 만들어낸다. 항목 하나하나가 독립된 소품처럼 작동하기 때문에 업무와 일상 사이의 짧은 틈에도 읽기 좋다. 그러나 짧다고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항목의 마지막 문장들은 종종 이어지는 다음 질문을 불러들인다. 페라리의 빨강을 이야기한 뒤에는 색은 어떻게 권위를 얻는가라는 물음이 남고, 초기 전기차의 흥망을 훑은 뒤에는 기술은 왜 어떤 시기에만 대중화되는가라는 질문이 뒤따른다. 저자는 답을 쉽게 단정하지 않고 사례와 맥락을 보여 준다. 독자는 그 빈틈을 스스로 메우며 사고의 폭을 넓히게 된다.

 

그렇다고 이 책에 흠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사랑의 사전이라는 기획은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다. 어떤 항목은 풍부한 사례와 통찰로 빛나지만 어떤 항목은 짧은 감상에 그치기도 한다. 항목 간의 깊이와 밀도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균질한 백과사전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왕에 사전적 구성을 채택했다면, 거칠게 처리된 스케치보다 컬러사진을 수록하는 방식이 저자가 중시하는 자동차 디자인의 미학을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냈을 것이다. 또한 저자가 현직 유럽 제조사의 수장이라는 점은 초점을 일정 부분 유럽과 프랑스로 끌어당긴다. 유럽의 규제 환경, 유럽 브랜드의 미학, 유럽 시장의 맥락이 상대적으로 더 자세히 다뤄진다. 세계 자동차 산업의 균형을 철저히 따지는 독자라면 아시아·북미의 관점이 더 많이 보강되기를 바랄 수 있다. 다만 이 편향은 기획의 성격과 저자의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라 장점과 한계가 동시에 담긴 결과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이 책의 의의는 분명하다. 첫째, 산업의 거대한 전환기전동화, 소프트웨어 중심 설계, 자율주행의 꿈과 현실를 내부자의 언어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둘째, ‘기술사문화사의 경계를 가볍게 넘나들며 자동차를 둘러싼 욕망과 상징, 제도와 일상의 관계를 쉽게 설명했다는 점이다. 셋째, 성공과 실패를 함께 서술하면서 독자에게 현실적 균형 감각을 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 편의 찬가도, 고발도 아니다. 사랑의 사전답게 애정이 깔려 있지만 그 애정은 맹목이 아니라 성찰을 동반한다.

 

추천 독자는 명확하다. 자동차 문화의 역사와 브랜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 전동화와 새로운 제조 강국의 부상 같은 현재의 재편을 큰 그림으로 보고 싶은 독자, 짧은 글 속에서 실마리를 찾고 스스로 더 깊이 파고드는 독자에게 어울린다. 또한 경영과 디자인, 정책과 도시를 가로지르는 교차점을 수업이나 강연의 예시로 활용하려는 사람에게도 실용적이다. 항목별로 핵심 사례가 응축되어 있어 발췌와 인용이 수월하고, 각 항목이 던지는 질문은 토론의 좋은 출발점이 된다.

 

문체는 읽기 쉽다. 지나치게 학술적이지 않고 대화하듯 풀어낸 문장이 많다. 덕분에 자동차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지 않아도 따라갈 수 있다. 동시에 오랜 업계 경험에서 나오는 구체적 장면들이 글의 밀도를 높여 준다. 디자인 리뷰 회의의 공기, 규제 변화에 흔들리는 예산 편성, 공장에서의 작은 결함이 시장에서 어떤 파장을 낳는지 같은 묘사가 간간이 등장한다. 이런 장면은 숫자와 그래프가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을 보여 준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데이터와 연표로 밀어붙이는 정통사도, 취향 자랑에 머무는 취미 에세이도 아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언어로 자동차 문명을 다시 쓰되, 사랑이 눈을 흐리게 하지 않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점검하는 책이다. 편향과 불균등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지만 그 한계를 감수할 만한 내용적 보상이 따른다. 독자는 항목을 넘기며 세계의 도로가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그리고 다음 교차로에서 어디로 향할지를 차분히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면 현장을 살아온 시선이 이끄는 자동차 문명의 입문서이자 애정과 성찰이 균형을 이루는 진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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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 - 파국의 시대를 건너는 필사적 SF 읽기
강양구 지음 / 북트리거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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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표지만 보고는 웬 만화책인가 싶었다. 그러나 사실은 만화보다 더 만화 같은 공상과학 소설이 다루는 세계로 독자를 안내하는 비밀의 문임을 깨닫는다. 이 책은 지금의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공사 현장으로 바라본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이 바꿔놓은 우리의 생업, 신체, 감정, 윤리의 문제를 차근차근 짚으며 세계가 망가졌다면, 우리는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까?”라고 묻는다. 과학·기술·사회를 함께 보는 STS (Science, Technology, Society) 관점에 SF 상상력을 더한 교양서이자, 과학기술 사용 설명서와 시민윤리 사용법을 한데 묶은 안내서이다.

 

18개로 낱개 포장된 각 주제는 등장인물보다 생각의 흐름을 따라간다. 각 장은 먼저 오늘의 기술 이슈를 사례로 설명하고(STS), 이어서 SF적 장면을 생각 실험으로 불러와 독자의 판단을 흔들어 본다. 마지막에는 정책·윤리·시민행동 차원의 질문과 점검목록으로 현실의 발판을 놓는다. , ‘문제 제기맥락화생각 실험실천 제안의 흐름도를 따라간다. 이 단순한 리듬이 장을 거듭하며 꾸준히 쌓여 하나의 읽기 경험을 만든다. 읽다 보면 머리는 차분해지고, 손은 뭔가 해보고 싶어진다. 편집 방향도 분명하다. 다양한 자료로 전문성을 확보하되, 문장은 쉬운 말로 낮춘다. 핵심 키워드는 AI, 생명공학, 위험사회, 윤리, 연대 등 논란의 여지가 충분한 각종 사회 문제다. 본문 끝의 생각거리와 주제별 추천 도서는 다음 공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계단 역할을 한다. 안내 표지판이 곳곳에 서 있는 셈이다.

 

가장 돋보이는 건 저자의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다. 저자는 과학기술을 사실 모음으로 가두지 않는다. 기술이 모든 걸 정한다는 생각도, 막연한 공포도 경계한다. 기술·사회·권력이 얽힌 매듭을 함께 보여 주며, 논의를 제도 설계와 삶의 규범으로 끌고 간다. 여기서 SF 상상력이 힘을 발휘한다. 추상적 개념을 일상의 선택지로 바꾸어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이어간다. 교실이나 독서 모임, 토론장에서도 곧바로 써먹기 좋은 구조다. 예를 들어 “AI와 돌봄 노동을 공정하게 설계하려면 최소 조건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은 읽는 즉시 과제가 된다.

 

이 책에도 한계는 있다. 첫째, 다루는 주제가 넓다 보니 장마다 깊이가 고르지 않다. 어떤 장은 날카로운 데이터와 사례로 설득하지만, 어떤 장은 아이디어 스케치에 가깝다. 둘째, 실천 제안의 촘촘함은 독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정책 실무자에겐 초안’, 시민·교사·학생 독자에겐 방향키로 읽힐 수 있다. 셋째, SF적 사고실험은 상상에 불을 붙이는데 훌륭하지만, 경험적 근거를 중시하는 독자라면 검증의 빈틈이 보일 수 있다. 이 빈틈은 약점이자 장점이다. 독자가 스스로 채워야 할 여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기술 낙관과 비관의 싸움에서 한발 비켜선다. ‘현실적 희망이라는 말은 흔하지만, 책은 희망의 감정보다 방법을 찾는 데 집중한다. 시민적 상상력과 공동체적 실천이라는 오래된 단어를 오늘의 기술사회에 맞게 새로 다듬는다. 망가진 세계를 고치는 일은 거창한 수리보다 생활의 설계에서 시작된다는 메시지다.

 

문장은 평이하고 설명은 재치 있으며 결론은 과하지 않다. 덕분에 책은 무엇이 옳은가를 설교하기보다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다. 독자는 읽는 동안 전문가가 되지는 않지만, 더 좋은 시민이 될 마음의 준비를 갖춘다. 세계가 당장 덜 망가져 보이진 않더라도, 고치는 법은 훨씬 선명해진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결론적으로, 이 책은 과학기술을 삶의 언어로 옮겨 주는 믿을 만한 통역사다. 논쟁의 열기를 식히고, 상상의 불씨를 살리고, 실천의 목록을 남긴다. 교실·회의실·동네 모임에서 함께 읽고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알찬 교양서다. 책은 독자에게 최소한의 공구 세트를 건네준다. 드라이버와 스패너를 어디에 쓸지 알려주고, 때로는 설명서를 접고 직접 조립해 보라고 등을 떠민다. 덤으로 만화책이라 착각했던 인상적인 표지 디자인은 오래도록 기억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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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된 인생 - 쓰레기장에서 찾은 일기장 148권
알렉산더 마스터스 지음, 김희진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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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은 평소 애정하는 범죄 스릴러나 고전 문학, 또는 특정 주제를 깊게 파고드는 부류의 글은 아니지만 읽는 경험은 의외로 상쾌했다. 저자 알렉산더 마스터스는 겉으론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의 특별한 삶을 기록해 온 전기 작가인데, 이번에는 이름조차 모르는 한 인물의 전기를 쓰는 데 도전한다. 시작은 케임브리지의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148권의 일기장이었다. 그는 주인공을 그냥 라고 부르며, 겉으로는 보통이지만 속으로는 열정과 좌절, 분노와 미완의 야망으로 출렁였을 삶을 가능한 한 성실하게 복원하려 한다. 제목만 보면 거창하고 극적인 복수전이 기다릴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름 없는 보통 사람 한 명의 삶을 끝까지 존중하는 법을 배워가는 여정에 가깝다.

 

일기는 1950년대 초 의 십대 시절부터 시작해 수십 년에 걸친 보통의 시간을 빈틈없이 적어 내려간 기록이다. 저자는 필체 감정가의 도움까지 구해 가며 탐정 놀이하듯 단서들을 맞춰 나간다. 추적 끝에 드러난 일기의 주인은 로라 프랜시스(Laura Francis)’. 케임브리지에서 한 노교수의 집에 상주하며 동거·가사 돌봄을 맡았던 인물로, 마스터스는 그녀의 일기에서 뽑은 문장들로 단편을 엮어 파리 리뷰에 실어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 책이 곧장 전기의 전형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실상은 전기 그 자체라기보다 전기를 쓰는 사람의 이야기에 가깝다. 일기가 발견된 순간부터 마스터스의 추적이 시간순으로 이어지지만 정작 일기 본문은 굳이 재배열하지 않는다. 덕분에 미스터리가 하나씩 풀려가는 긴장감이 살아난다. 전기를 쓴다는 일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가설에 의존하는지, 방대한 자료를 앞에 두고도 끝내 메울 수 없는 빈칸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메타 전기다.

 

마스터스의 추진력은 집요함에서 나온다. 그는 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동네 도서관의 지리 코너부터 필적학자, 음악학자, 철학자, 심지어 사설탐정까지 두드린다. ‘가 남긴 일기의 양만 놓고 보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일기를 쓴 사람으로 기록될 만하다는 말도 따라붙는다. 이 탐사는 우연히도 마스터스의 개인적 인생사와 겹친다. 함께 일기를 건져 올린 친구 다이도 데이비스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던 때, 오히려 는 점점 선명한 존재감을 획득하며 작가에게 목적과 추진력을 준다. 이 감정선은 쉽게 감상으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호기심과 열정으로 단단히 조율된다.

 

한편으로 전기문을 구성하는 그의 방식에는 물음표가 붙는다. 그는 일기를 손에 잡히는 대로 뒤적이며 오랫동안 연대기적 정리를 미룬다. 필적학자의 조언에도 반신반의하고, 정답에 가까운 단서를 한동안 외면하기도 한다. 그는 이를 세계 최초의 무명 전기라는 이상과 탐정 놀이의 즐거움으로 정당화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때때로 일부러 속도를 늦추는 것처럼 느껴진다. 몇 페이지에 걸쳐 글씨의 기울기와 팔 길이로 의 키를 계산하는 장면은 뜻밖의 웃음을 주면서도, 정작 핵심을 피하려는 엉뚱함으로 비치기도 한다.

 

일기 속 의 목소리는 기발하고 코믹하며 때로는 뭉클하다. ‘c느낌같은 독창적인 표현이 불쑥 등장하고, “내 일기는 불멸의 가치가 있다는 선언이 반복된다. 초반에는 신체 감각과 유명 배우에 대한 집착이 눈에 띄고, 후반으로 갈수록 TV 시청 기록과 주변 인물 ‘E’, 그리고 그녀가 간수라 부르는 고용인과의 관계가 중심을 이룬다. 젊은 시절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60년대를 만끽했지만 일과 관계에서는 번번이 좌절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연민을 자극하면서도 쉽게 호감 가는 인물은 아닌, 불편하지만 솔직한 초상이다.

 

중반부에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찾아온다. 마스터스가 단서들을 엮어 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아내고, 과연 비밀의 문을 두드릴지 말지 고심하는 지점에 이르는 것이다. 이 발견은 독자에게도 심장이 뛰는 긴장감을 선사한다. 다만 정체를 공개하는 방식에는 윤리적 고민이 따라붙는다. 책 속 이름 로라 프랜시스가 실명이 아닐 수 있고, 이미 세상을 떠난 주변 인물들의 이름 역시 가명일 가능성이 있다. 사생활 보호라는 당연한 이유가 있지만, 텍스트가 만들어 내는 미학적 긴장과는 어긋나는 지점이 있다. 마스터스의 문장은 유려하고 유머러스하며 세심할 때가 많지만, 종종 기행과 곁길로의 우회가 길어져 독자는 피로해진다. 특히 연대기적 정리나 큰 그림의 제시를 늦추는 선택은 미스터리의 긴장을 살리면서도 독서의 보폭을 더디게 만든다.

 

그럼에도 이 책의 성과는 분명하다. 첫째, 전기 쓰기의 본질가설과 환상, 과도한 기대와 오류가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고 또 무너뜨리는지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둘째, 방대한 일기 속 지루함과 진실성을 꾸밈없이 기록한다. 셋째, 실패와 일상의 질감을 연대기라는 평범한 결말로 내려놓으며 기대와 현실의 간극을 몸으로 느끼게 한다. 개인적으로도 공명하는 지점이 많다. 띄엄띄엄 일기를 써 본 경험이 있거나, 오래 누군가의 글을 해독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일방적 관계의 밀도와 더 알고 싶은 갈증을 선명히 느낄 것이다. 짧은 장 구성과 경쾌한 문체는 잠들기 전에 한 장만 더읽고픈 스릴러 같은 흡인력을 지녔다. 동시에 주인공도, 저자도 끝내 완전히 사랑스럽지는 않다는 냉정한 인상도 남긴다. 좋은 소재를 아깝게 흘려보낸 것 같으면서도 그 실패에는 나름의 품위가 있다는 양가적 평가가 공존한다.

 

결국 회계 용어를 빌리자면 이 책은 마치 이중장부 같다. 하나는 라는 인물의 흩어진 삶의 기록, 다른 하나는 그것을 쫓으며 자신의 한계와 집착, 애정과 미루기를 낱낱이 드러낸 사람 냄새 나는 전기 작가의 기록이다. 미스터리의 긴장과 메타 전기의 자의식을 원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충분히 매혹적일 것이다. 반대로 탄탄한 조사, 빠른 결론, 입체적인 인물상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불친절할 수 있다. 한 줄 평을 달자면, 이 책은 불완전하지만 솔직한 전기적 모험담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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