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말하고 싶은 것들 - 인간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
김경훈 지음 / 시공아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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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어 즉석에서 현상하는 폴라로이드가 최첨단 사진기 1순위에 올라 있던 대학 새내기 시절, 필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라이카 필름 카메라를 들고 학교로 향했습니다. 주위에서 쏟아지는 부러움의 시선 세례를 즐기며 서로 모델이 되겠다고 나서는 여학우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한 친구를 간택한 뒤, 어깨너머 배운 구도법에 따라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며 따사로운 5월 어느 봄날 오후를 보냈습니다. 무사히 촬영은 마쳤지만, 안타깝게도 그 여학우에게 나의 마음과 더불어 사진을 전해주지는 못했습니다. 이 얼치기 사진사가 필름을 회수하던 중 실수로 빛에 노출하는 바람에 반나절의 수고를 허사로 만들고 말았던 겁니다. 이 일로 여자 사람의 시선이 작렬하는 자외선보다 더 따가울 수 있음을 배웠으니 그래도 아주 허탕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사실 사진이 전하는 메시지에 필름에 반사된 햇빛보다 더 강렬한 관심이 생긴 것은 이보다 더 어릴 적이었습니다. 모아 둔 용돈 백 원을 저축하려고 동네 마을금고를 찾았던 코흘리개 필자는 영업장에 비치된 LIFE 사진집을 우연히 꺼내 들었는데, 그 책이 하필이면 종군 기자들이 찍은 전쟁특별판이었습니다. 고통에 찬 기이한 모양으로 시커멓게 불에 타다 만 시체와 떨어져 나간 자신의 피투성이 왼팔을 오른손에 쥔 채 넋 나간 얼굴로 봉합수술을 기다리는 야전병원 대기실의 군인처럼 전쟁의 참상을 담은 사진들을 처음 접하느라 영업시간이 끝나도록 구경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의 32쪽과 88쪽에 등장하는 두 장의 월남전 사진 역시 그때 처음 보았던 기억이 너무나도 선명합니다.



 

사진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고유한 속성은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남긴다는 것입니다. 사진에 찍힌 뒤 현실 속의 피사체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하거나 소멸되어 가지만, 사진 속에 정지된 채로 담긴 피사체들의 이야기는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25)

 

이 책은 23개의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한 사진과 함께 풀어놓는 이야기보따리로, 저자가 찍었던 사진을 비롯하여 인화지 너머에 가려진 진실을 밝히며 세간에 알려진 오해를 풀어보는 1, 월남 전쟁과 흑백 갈등, 미국의 대공황과 우리나라의 80년대 민주화 시위 등 사회 변혁을 초래했던 사건들을 다룬 2, 달 착륙 우주인과 아인슈타인 박사, 냉전 시대의 정치인 등 역사 속 인물들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야사를 공개하는 3, 그리고 작고한 어느 유명 사진작가가 사진으로 남긴 개인사를 통해 사진이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일종의 언어임을 역설하는 4부로 구성되었습니다.

 


우리의 카메라는 최소한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기록하고 이것을 세상에 고발하는 인류의 눈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당신이 꼭 사진기자일 필요도 없습니다. 사회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다는 보통 사람으로서의 강한 의지를 가진 당신의 손에 카메라가 쥐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권력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무기일 수 있습니다. (129)

 

열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장면이 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더 믿음의 우선순위를 두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바로 진실이라고 확신하기까지 하지요. 그래서 사진이 말하고 싶은 것을 오해하고 심지어는 악의적으로 왜곡된 형태로 전파되는 파급효과는 매우 파괴적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중남미 난민들의 미국 국경 밀입국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하던 순간에 찍은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자 역시 그러한 진실 왜곡의 희생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도입부에 그 사건을 먼저 배치한 것만 보아도 그가 목숨 걸고 밝혔던 진실을 부정당했을 때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록 사진이 많은 것을 보여주긴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인간의 시선 너머에 숨어있음을 통찰한 듯, 저자는 사진이 찍힌 정황과 배경을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하며 등장인물들의 사후 근황을 들려주기도 합니다.



 

사진 한 장이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한 정답을 제시해줄 수도 없고 사회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힘도 없지만, 사진을 보는 이들에게 우리 사회의 문제를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 제임스 나처웨이 (295)

 

사진이 전달하는 이야기의 힘을 주제로 삼고 있지만, 어찌 보면 이 책은 사진에 설명을 곁들인 근사한 근현대사 교과서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비극적인 면모와는 딴판으로 이러한 상황을 세계에 알리려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의 중요성을 입증할 뿐 아니라, 해결되지 않는 아프리카의 기근 문제가 사실은 가뭄 이외에도 인간의 탐욕과 정책의 미비에 있음을 고발하는 보도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짧지만 강렬한 언어, 비유, 은유, 상징으로 이루어진 시처럼 사진은 사진만의 독특한 느낌과 여운으로 우리를 매료시킵니다. (280)

 

마지막으로 저자는 좋은 사진을 위한 첫 단계 중 하나는 좋은 소재 찾기가 사실이지만 피사체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단순히 자극적이고 눈에 띄는 소재를 찾아 카메라의 렌즈를 들이대는 행위는 삼가야 함을 역설합니다. 그의 당부처럼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며, 진실은 언제나 우리의 시선 너머에서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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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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