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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공공성 - 구약으로 읽는 복음의 본질
김근주 지음 / 비아토르 / 2017년 5월
평점 :
복음의 공공성
승리주의 시대에 패자는 설 자리를 잃었다. 좁은 틈 비집고 주류 속에 편입하려는 아귀다움은 고시촌 쪽방, 대학, 각종 학원에서 매일같이 벌어지지만 해를 넘길수록 자신이 설자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들숨 한 번 내쉬며 스팩으로 무장하고 발 디딜 곳을 찾지만 이내 날숨과 함께 허공을 향한 발길질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애초에 정규직이라는 빛나는 승리는 극소수로 한정되어 있었다. 벼랑 밑으로 떨어진 ‘을’을 향한 폭력은 당연한 듯 갑질로 형상화 되어 나타나며 자본의 민낯을 부끄럼 없이 보여준다. 저자의 말 따라 사람을 오직 ‘쓸모’로 평가하는 자본은 결국 사람을 소외시킨다.
못 살겠다! 이곳에서!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필요한 것이 ‘복음의 공공성’이다.
몇 달 전, 책 저자가 방송 프로에 나와서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이 땅에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부르셨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고아, 과부 같은 힘없는 이들을 보호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했다. 책을 읽으며 구약과 신약에 기록된 ‘복음의 공공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했고, 그 동안 복음에 대한 이해를 사적인 차원으로 국한 시켜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놀란 부분은, 복음 공공성의 급진성이다. 그 동안 재능과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노력과 성실은 각 개인 힘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 반하여 설명한다. 근거는 삼상30장에 기록된 다윗 군대가 아멜렉과 전투에서 승리하여 얻은 수확물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군인들에게도 나누어주는 장면이다. 노력에 대한 성취로 보상은 당연히 따라와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것은 저자의 말처럼 사적 차원으로 복음을 국한 시킨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노력하는 성품도 부모에게 받은 것이고,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보아야 된다는 저자의 말에 수긍했다.
너무 급진적이다. 힘들게 얻은 수확물을 어찌 내놓으란 말인가?
하지만 내가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군인이라면, 말 그대로 복음 아니겠는가?
자기애를 포기할 때, 복음은 모두를 위한 것이 된다.
결국 타자를 향한 사랑이 ‘복음의 공공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