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망각한 사회.

(김균진,죽음과 부활의 신학,새물결플러스)

 

오랜 암투병과 그로인한 부작용이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작년 타들어가는 8월을 맞이하기 전 6월에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다. 아니 그전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했다. 치료는 중단된 상태였고, 호스피스 병동을 오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상한다. 하지만, 삶을 포기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희망포기는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암흑에 의학도, 기도도, 어설픈 위로도 묻혔다. 무력감을 느끼며 죽음을 알려고 책을 읽어댔다. 관련 책들은 많았고, 죽음은 삶에 대한 이해를 넓혀줬다. 그래서 더더욱 죽음을 탐구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곤 후회했다. 더 빨리 알았다면 하고 말이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죽음에 직면하고서도 응시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죽음의 배재현상이다. 사회에 만연한 죽음의 현상들이 있지만 애써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무감각해진 그들은 죽음을 감지해내지 못한다. 가족을 땅에 묻고도 죽음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왜일까? 성숙한 삶의 태도인가? 아니다. 깊은 신앙의 힘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들은 죽음을 부인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생각한 것처럼, 죽음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일까? (p53) 그럴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배재 현상을 성의 터부로부터 찾은 사람이 있다. 인종심리학자 고러(G.Gorer)과 의학자 바알(C.W.Wahl)이다. 그들에 의하면 과거 성에 대한 터부가 죽음에 대한 터부로 대체된 것이다. 과거에는 성에 대한 공론을 부끄럽게 생각했다면, 이제는 죽음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하여 오늘날 죽음은 의사소통 장애를 겪고 있다. (p74)

 

친족이나 가족의 장례를 치르고 나면 주위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위로형이다. ‘힘들지.’라는 말로 어깨를 두드리며 슬픔을 달래주려고 한다. 또 하나는 분투형이다. ‘더 열심히라는 말로 생활을 독려한다. 죽음을 묵상, 생각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애도는 딱 3일 안에 끝내야 하는 패드스푸드와 같은 것이다. 교회조차 다르지 않다. 죽음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장례는 하나의 행사로 그치고 만다. 여기서도 죽음은 실종된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와도 어머니는 좀처럼 삶을 포기하지 못하셨다. 살아있음을 사랑하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 죽으면 너희들 어떻게 하니?’ 그때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이 뻣뻣해졌고 생각은 끊겼다. 침묵했다. 죽음을 머릿속으로 이해했지만 가슴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어머니와 함께했던 추억가운데 한 곳으로 잠시나마 되돌아 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서 죽음을 이야기하겠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 있더라도 죽음을 응시하겠다.

 

눈 빠지게 기다렸네.’ 23일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어머니가 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이 마지막 말이 되었다.

죽음을 망각한 곳엔 삶이 없다. 죽음의 배재가 곳 삶의 재배임에 다름없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할 때, 삶을 알 수 있다. 필연적으로 죽음을 자주 접하게 되는 사역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피상적 죽음에 대한 이해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삶조차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죽음은 곧 삶에 대한 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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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망각한 사회.

(김균진,죽음과 부활의 신학,새물결플러스)

 

오랜 암투병과 그로인한 부작용이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작년 타들어가는 8월을 맞이하기 전 6월에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다. 아니 그전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했다. 치료는 중단된 상태였고, 호스피스 병동을 오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상한다. 하지만, 삶을 포기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희망포기는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암흑에 의학도, 기도도, 어설픈 위로도 묻혔다. 무력감을 느끼며 죽음을 알려고 책을 읽어댔다. 관련 책들은 많았고, 죽음은 삶에 대한 이해를 넓혀줬다. 그래서 더더욱 죽음을 탐구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곤 후회했다. 더 빨리 알았다면 하고 말이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죽음에 직면하고서도 응시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죽음의 배재현상이다. 사회에 만연한 죽음의 현상들이 있지만 애써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무감각해진 그들은 죽음을 감지해내지 못한다. 가족을 땅에 묻고도 죽음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왜일까? 성숙한 삶의 태도인가? 아니다. 깊은 신앙의 힘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들은 죽음을 부인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생각한 것처럼, 죽음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일까? (p53) 그럴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배재 현상을 성의 터부로부터 찾은 사람이 있다. 인종심리학자 고러(G.Gorer)과 의학자 바알(C.W.Wahl)이다. 그들에 의하면 과거 성에 대한 터부가 죽음에 대한 터부로 대체된 것이다. 과거에는 성에 대한 공론을 부끄럽게 생각했다면, 이제는 죽음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하여 오늘날 죽음은 의사소통 장애를 겪고 있다. (p74)

 

친족이나 가족의 장례를 치르고 나면 주위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위로형이다. ‘힘들지.’라는 말로 어깨를 두드리며 슬픔을 달래주려고 한다. 또 하나는 분투형이다. ‘더 열심히라는 말로 생활을 독려한다. 죽음을 묵상, 생각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애도는 딱 3일 안에 끝내야 하는 패드스푸드와 같은 것이다. 교회조차 다르지 않다. 죽음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장례는 하나의 행사로 그치고 만다. 여기서도 죽음은 실종된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와도 어머니는 좀처럼 삶을 포기하지 못하셨다. 살아있음을 사랑하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 죽으면 너희들 어떻게 하니?’ 그때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이 뻣뻣해졌고 생각은 끊겼다. 침묵했다. 죽음을 머릿속으로 이해했지만 가슴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어머니와 함께했던 추억가운데 한 곳으로 잠시나마 되돌아 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서 죽음을 이야기하겠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 있더라도 죽음을 응시하겠다.

 

눈 빠지게 기다렸네.’ 23일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어머니가 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이 마지막 말이 되었다.

죽음을 망각한 곳엔 삶이 없다. 죽음의 배재가 곳 삶의 재배임에 다름없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할 때, 삶을 알 수 있다. 필연적으로 죽음을 자주 접하게 되는 사역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피상적 죽음에 대한 이해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삶조차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죽음은 곧 삶에 대한 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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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망각한 사회.

(김균진,죽음과 부활의 신학,새물결플러스)

 

오랜 암투병과 그로인한 부작용이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작년 타들어가는 8월을 맞이하기 전 6월에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다. 아니 그전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했다. 치료는 중단된 상태였고, 호스피스 병동을 오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상한다. 하지만, 삶을 포기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희망포기는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암흑에 의학도, 기도도, 어설픈 위로도 묻혔다. 무력감을 느끼며 죽음을 알려고 책을 읽어댔다. 관련 책들은 많았고, 죽음은 삶에 대한 이해를 넓혀줬다. 그래서 더더욱 죽음을 탐구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곤 후회했다. 더 빨리 알았다면 하고 말이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죽음에 직면하고서도 응시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죽음의 배재현상이다. 사회에 만연한 죽음의 현상들이 있지만 애써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무감각해진 그들은 죽음을 감지해내지 못한다. 가족을 땅에 묻고도 죽음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왜일까? 성숙한 삶의 태도인가? 아니다. 깊은 신앙의 힘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들은 죽음을 부인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생각한 것처럼, 죽음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일까? (p53) 그럴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배재 현상을 성의 터부로부터 찾은 사람이 있다. 인종심리학자 고러(G.Gorer)과 의학자 바알(C.W.Wahl)이다. 그들에 의하면 과거 성에 대한 터부가 죽음에 대한 터부로 대체된 것이다. 과거에는 성에 대한 공론을 부끄럽게 생각했다면, 이제는 죽음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하여 오늘날 죽음은 의사소통 장애를 겪고 있다. (p74)

 

친족이나 가족의 장례를 치르고 나면 주위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위로형이다. ‘힘들지.’라는 말로 어깨를 두드리며 슬픔을 달래주려고 한다. 또 하나는 분투형이다. ‘더 열심히라는 말로 생활을 독려한다. 죽음을 묵상, 생각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애도는 딱 3일 안에 끝내야 하는 패드스푸드와 같은 것이다. 교회조차 다르지 않다. 죽음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장례는 하나의 행사로 그치고 만다. 여기서도 죽음은 실종된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와도 어머니는 좀처럼 삶을 포기하지 못하셨다. 살아있음을 사랑하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 죽으면 너희들 어떻게 하니?’ 그때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이 뻣뻣해졌고 생각은 끊겼다. 침묵했다. 죽음을 머릿속으로 이해했지만 가슴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어머니와 함께했던 추억가운데 한 곳으로 잠시나마 되돌아 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서 죽음을 이야기하겠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 있더라도 죽음을 응시하겠다.

 

눈 빠지게 기다렸네.’ 23일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어머니가 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이 마지막 말이 되었다.

죽음을 망각한 곳엔 삶이 없다. 죽음의 배재가 곳 삶의 재배임에 다름없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할 때, 삶을 알 수 있다. 필연적으로 죽음을 자주 접하게 되는 사역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피상적 죽음에 대한 이해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삶조차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죽음은 곧 삶에 대한 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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