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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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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처음 발간될 무렵,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에 작가 박범신이 나와 신간을 낸 소회를 밝히고 있었다. 극 중 주인공의 이름 두 글자로 씌어진 강렬했던 제목이 뇌리에 남았고, 그 소설은 이제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을 앞두고 있다. 어찌보면 굉장히 자극적이게 들릴 수 있을만한 소재 때문이었을까. 읽는 내내 영화로 만들어지면 흥행하겠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들의 흥행코드로 "70대 노시인 이적요와 열일곱 소녀의 치정극"이라고 홍보하면 될 일이었다. 영화 <파주>도 그랬고,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도 그랬고, <오감도>도 그랬다. 이 영화는 과연 어떤 모양으로 소설 속의 시인 이적요와 그의 제자 서지우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을까. 너무나도 숨이가빠 생략하거나 뭉게버리거나 덧씌워버리지는 않을는지. 내가 좋아하는 배우 박해일이 시인 이적요역을 맡았다는 것도 의아했다. 젊었을 때부터 모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60대에서 70대 사이만 연기하는 극중 배우를 왜 젊은 이가 특수분장까지 고집스럽게 해가며 맡았단 말인가. 실제로 60대의 배우가 시인역할을 맡아 스물남짓한 젊은 배우를 욕망하는 내용이 등장하면 관객이 거부감을 가질 수 있어서? 아니면 노년의 배우들 중 흥행의 코드에 맞을만한 배우가 남아있지 않아서? 그 어느쪽도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영화 <시>에서처럼 노년의 배우가 주연을 맡아 감정선을 살리고 베드씬까지도 연기한 예는 얼마든지 있었다. 영화가 개봉하기에 앞서 걱정이 앞서는 이유다.

 

  강우석 감독은 전작이 있는 영화 <이끼>를 찍으면서 전작이 갖는 기대감 때문에 그동안 영화를 찍으며 평생 겪었던 고통을 합친것보다도 훨씬 더 큰 심리적 압박과 부담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는 전작이 있는 영화, 미리 사람들의 기대치가 있는 작품은 찍지 않겠다고 술회한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영화가 어느정도 흥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세간의 입말들이 시끄러운 것은 종이작품과 영상작품이 가지는 본질적인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여백과 호흡을 조절하며 읽는 이가 함께 내용을 구성해 나갈 수 있는 종이작품에 비해 영상작품은 그 여백과 호흡이 만들어내는 사람들에 의해 크게 좌우되는 까닭이다. 이틀간에 걸쳐 천천히 음미하며, 때로는 단숨에 읽어내려가 버린 촘촘하기도 하고 성기기도 한 문장들을 두시간여의 러닝타임안에 복원해 재구성해 낸다는 것은 비단 고달프고도 지난한 작업일테다.      

 

  <은교>는 욕망과 본능의 교차점이자 뒤엉켜 제 갈길을 찾지 못하고 우왕자왕하는 전시장이다. 이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은 단 세사람으로 압축되어있고, 그 밖의 인물들은 아주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 이 세사람의 자아가 워낙 왕성하고 거대하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이야기가 짜임새있게 진행되는 까닭이다.

 

 노시인 이적요는 서지우를 자식처럼 여기면서도 성공시키고 싶어하는 욕망 더불어 세속적인 자신의 작품을 제자의 입으로나마 세상으로 내보내고 싶어하던 욕망, 하지만 그에 반대로 자신의 것을 훔치고도 태연한 멍청한 제자에 대한 미움과 사랑하는 그가 은교를 범하고 유린했다는 분노가 뒤엉켜있다. 물론 뒤로 갈수록 후자의 욕망이 커져 마침내 그것은 최후의 울부짖음처럼 살인을 계획하는 악한의 모습으로 터져나온다. 은교를 향해서는 꽃처럼 싱싱하고 새하얀 그녀를 정갈하고 다정하게 사랑하는 마음과 그녀를 가지고 취하고 싶어하는 본능적 욕망이 어지럽게 뒤엉킨다. 이는 서지우도 마찬가지여서, 시인 이적요를 향해서 아버지처럼 모시고 존경하고 살뜰히 아끼는 마음만큼이나 그의 것을 탐하고 싶어하는 욕심과 은교를 사이에둔 질투와 원망의 감정, 더불어 글솜씨가 없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모멸의 심정이 뒤섞여 그를 속이고 뛰쫒고 의심한다. 심리묘사가 세밀하게 되어있지 않은 인물은 오직 은교뿐인데, 열일곱의 여린 가슴속에서 어떤 욕망들이 움틀거렸는지는 쉽게 단정지어지다가도 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충분한 사랑을 담뿍 받지 못하고 자란 가정의 결핍이 그녀를 그렇게 이끌어 왔는지, 그녀는 생각보다도 쉽게 서지우에게 몸을 내어준다. 그리고 몸을 내어 주면서도 영어단어를 암기하거나 그들의 은어를 귀엽게 내뱉는 등 큰 충격이나 내적 갈등은 엿보이지 않는다. 할아버지에게 위태로운 상황을 들키면서도 크게 불쾌해하거나 염려하는 모습조차 그려지지 않는다. 돈과 권력, 그리고 애틋한 사랑마저도 가지고 있는 두 남자 사이에서 영민하고 영악한 듯 움직이던 악녀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를 이렇게 갖고 싶어하는지도 몰랐다구요.'라고 절규하며 짐짓 나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기도 했다.

 

 작가 스스로도 '실제로 나도 모르겠다. 걔가 어떤 앤지.'라고 말하며 은교라는 인물에 대해 사실적이면서도 관념적인 인물이라고 평했다. 은교 자체를 이적요 시인의 갈망의 징표이고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은교가 독자에게 너무 가까우면 안된다고. 글의 제목이기도 하고 이 이야기의 주된 축이기도 한 한은교. 그녀는 어찌보면 깊이 잘 생각하지 않고, 마음내키는 대로 행동하며 그러면서도 자기 생각에 빠져 우울해졌다가 생기있어 통통 튀어오르다가 또 이내 눈물을 흘리면서 절규하고야 마는 우리시대 평범한 여고생의 모습을 그린 듯 싶기도하다. Q변호사의 대사처럼 말이다. 그녀도 그 두사람을 만나면서 3년간 뼈 아픈 성장통을 겪고 이제부터야 안으로 깊어지기 시작할, 덜 익고 내면 성찰이 성긴 평범한 소녀였을 것이다.

 

  오랜만에 단숨에 읽히는 소설을 만났다. 그것은 이 소설이 대중과 통속소설의 범주안에 들어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테고, 그만큼 구성과 필력이 치밀하다는 반증이기도 할 터이다. 글을 읽으며 소설 <도가니>를 읽었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심리적 불편함을 느꼈던 이유는 나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적요 시인의 말처럼 통속 소설과 본격소설을 구분지으려고 하는 못된 위선적 심리가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워졌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

사실이다. 은교는 이제 겨울 열일곱 살 어린 처녀이고 나는 예순아홉 살의 늙은 시인이다. 아니, 새해가 왔으니 이제 일흔이다. 우리 사이에는 오십이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있다. 이런 이유로 나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 변태적인 애욕이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부정하진 않겠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라고 설파한 것은 명저 <팡세>를 남긴 파스칼이고, 사랑을 가리켜 '분별력 없는 광기'라고 한 것은 셰익스피어이다. 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 당신들의 그것도 알고 보면 미친, 변태적인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하고 싶지만, 뭐 상관없다. 당신들의 사랑은 당신들의 것일 뿐이니까. -12p

 

그는 젊었을 때부터 반역에 대해 알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는 평생 동안 오로지 주인이 주입해준 생각,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짐을 지고 걸어갈 뿐인 '낙타' 같은 존재였다. 니체가 말한바 '낙타의 시기'가 그에겐 영원했고, 따라서 자기반역을 통해 세계를 독자적으로 이해하는 '사자의 시기'는 그에게 도래하지 않았다. '쌍커풀'은 그리하여 육체에 깃든 그의 젊음을 시시각각 먹어치웠다. 그는 젊은 시절에도 '그놈의 쌍꺼풀' 때문에 이미 중년이거나 장년이었다. 평생 그는 허당을 짚고 걸어야 했다.  -34p

 

남자에게 연애는 감각으로부터 영혼으로 옮겨간다.

 

라고 그 순간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관념적으로 연애를 상상할 때와 너무도 다른 결론이었다. 나는 은교를 만나기 전까지, 참된 연애란 남녀불문하고 영혼으로 시작된다고 믿었다. 감각은 하나의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은교를 통해 내가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실체 없는 관념이었는지 명백히 알게 되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 수준보다 늙은 내 육체가 사실은 얼마나 예민하고 건강하게 제 촉수들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지도. 늙은 육체는 외피에 불과했다. 은교와 만나는 나의 감각들은 몸서리쳐질 만큼 살아 있었다.

-202p

 

늙는 것, 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참혹한 범죄,

 

라는 생각이 들었다. 늙은이의 욕망은 더럽고 끔찍한 범죄이므로, 제거해 마땅한 것, 이라고 모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하며 비난하고 있었다. 일회용 면도기가 눈에 들어왔다. 면도칼만 빼내서 팔목 한 번 내려치면 내 안의 더러운 범죄, 그 추악한 욕망들과, 오로지 늙었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하는 끔찍한 모든 굴욕이 다 씻겨나갈 것이다.  -2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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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사계절 1318 문고 36
라헐 판 코에이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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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인간이고 싶다

- 라헐 판 코에이,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사계절, 2005

 

김진영 /  http://2459466.blog.me/

 

1. 팩션[Faction] 은 역사의 왜곡인가, 상상력의 확대인가?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새로운 장르.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신조어로써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인물의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사실을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를 가리킨다. 주로 소설쓰기의 한 기법으로 사용되었지만 영화, 텔레비전드라마, 연극 등으로도 확대되는 추세이며 문화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에서 팩션이 문화현상의 하나로까지 인식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댄 브라운(Brown, Dan,)의 소설《다빈치 코드》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부터이다. 그 밖에도 《천사와 악마》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등의 팩션 소설이 번역 출간되며 출판계의 키워드로 자리 잡기도 하였다.

  출판계뿐 아니라 영화와 텔레비전드라마 등에도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가미한 작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황산벌》과 《실미도》, 《역도산》 등이 팩션 형식의 작품들이다. 또 텔레비전드라마 《다모》와 《성균관 스캔들》, 《뿌리 깊은 나무》 등도 팩션이 대중문화의 한 조류로 등장하는 데 이바지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팩션은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상상력을 결합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재해석함으로써 펙트와 픽션의 장점인 역사성과 오락성을 함께 구현한다는 장점을 갖는다. 그러나 화제(話題)를 만들기 위해 오락성만 좇아 역사를 왜곡한다는 비판도 있다. 이 작품 속에서 작가는 태어날 때부터 정략결혼의 희생자로 22살의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한 마르가리타 공주를 매우 철없고도 막되 먹은 어린 권력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그녀의 어릴 적 삶은 어떠했을까. 그림 속의 개를 인간 개였다고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시대의 어둠은 뿌리 깊었던 것일까.

 

2.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체화된 시대

  아버지 후안은 제왕적 권위와 더불어 신분적 권위에 순종하는 인물이다. 공주님의 마부로서 살아가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높으신 분들과 안면을 트고 살아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불합리한 대우를 받더라도 저항할 줄 모르고 공주님이 자신의 아들을 놀이개로서 원하자 한 마디 불평 없이 깨끗이 목욕을 시켜 공주님 앞에 진상(?)한다. 후안이 장애를 가진 아들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끊임없이 등장한다. 아들을 처음에 도시로 데려가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나, 자신에게는 아들이 하나뿐이라고 말하는 장면, 데려온 후에도 방 안에만 가두어 두는 등의 행동이 그것이다. 하지만 아들이 궁중 안에서 비인간적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들을 구하고자 노력한다. 아들을 구하는 방법이 정면으로 권위에 저항하는 것이 아닌 마술을 이용한 눈속임이긴 하지만. 여기서야 비로소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했었다는,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바르톨로메의 어버니 이사벨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한 여성으로 등장하나 그 역시도 가부장제라는 권위에 순종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아들을 적극적으로 아끼고 지원하다가도 중요한 순간에는 여성으로서 후안의 권위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복종이 단순한 체념으로서가 아닌 응당 자신이 따라야할 당위적인 모습으로서 그려지고 있다는 면에서 제왕적 권위만큼이나 가부장적 권위 역시 사람들의 정신세계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귄위에 굴종하는 것이 체화된 시대. 사회적 권위가 인간성을 압도하는 사회에서는 이미 모두가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시대에 반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톨로메가 스스로 ‘나는 개가 아니다.’라고 울부짖은 외침은 개인적 성찰을 뛰어넘어 사회 구조 전체를 부정하는 메시지였을 것이라 본다.

 

3. 억압과 차별을 감내하면서도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노력

  작품 속에 등장하고 있는 중세 사회에서 장애인을 대하는 방식과 현재의 그것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당연히 길거리에서 구걸을 해야 하는 모습은 아닐지라도 방안에 갇혀 하루 종일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했을 처지는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바르톨로메가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목받는 이유가 글을 매우 빨리 깨우친다거나 그림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까닭으로 설정되는 이야기의 전개는 결국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을 뛰어넘을 만한 어떤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태어나 더 많이 참고(궤짝 속에 들어가 그 오랜 시간 견디고) 더 적게 욕망해도(온전한 화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비장애인과는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음을 역으로 이 작품은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 바르톨로메는 끊임없는 억압과 차별을 감내하면서도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보였다. 자신을 고향에 남겨두고 가려는 아버지에 대항해 어떤 차별 속에서도 가족들과 함께 따라가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집에 남겨져 고독과 싸우면서도 글을 배워 꼭 성공한 삶을 살게 되리라 다짐했다. 형이 도제로 들어가 더 이상 수사에게 가지 못하게 된 뒤에도 끊임없이 공부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궁중에 인간 개로 들어가서도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바르톨로메는 한참 동안 개를 관찰했다. 개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다만 평화롭게 니콜라시토의 발밑에 누워있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머릿속이 환해지면서 벨라스케스의 말뜻을 깨달았다. 개의 힘을 느낀 것이다. 진갈색의 매끄러운 가죽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강인한 근육이 느껴졌다. 니콜라시토가 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가 니콜라시토의 콧대 높은 자세를 의연하게 참아내고 있었다. 이 개가 지금은 이러고 있지만, 언제라도 벌떡 일어나 니콜라시토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응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인내와 굴복은 명백히 다르다. 바르톨로메는 그림 속 개에게서 인내하나 굴복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 책은 그런 이들을 위한 책이다. 비단 장애를 가진 사람 뿐 만이 아닌 이 시대에 억압과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모든 약한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 그들의 인내를 칭찬하면서도 끝까지 그들이 잘못된 세계에 굴복하지 않기를, 인간다움을 끝끝내 고결하게 지켜나가기를 요구하고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 생각해 볼 문제

 

1) 책 내용과 관련된 분석 논제(論題)

 

바르톨로메의 아버지는 바르톨로메를 마을에 두고 가려 했으며, 마드리드에 도착해서도 아들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애쓴다. 이와 같은 아버지의 행동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 바르톨로메는 크리스토발 수사에게서 글을 배우면서 그 즐거움에 정신없이 빠져든다. 바르톨로메에게 글을 배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 인간개가 되는 것을 거부했던 바르톨로메는 공주를 만난 후 공주의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 또한 난쟁이 니콜라시토에게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끼기도 한다. 왜 일까?

 

바르톨로메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어인인 파레하이다. 그는 실제로 벨라스케스의 노예였으며, 그의 재능을 높이 산 벨라스케스에 의해 자유의 몸으로 화가가 되었다. 벨라스케스와 파레하, 그리고 바르톨로메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2) 현실 상황과 관련된 논제(論題)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이 장애를 가진 바르톨로메를 대하는 태도는 각기 매우 다르다. 내가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는 소설 속 인물 중 누구와 가장 가까운가? 이 소설을 장애인 문제와 더불어 생각해 보자.

 

■ 이 작품 속 바르톨로메가 상징하는 것은 이 시대의 어떤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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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 - 2008년 문학수첩작가상 수상작
주영선 지음 / 문학수첩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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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랫만에 숨가쁘게 읽어간 소설을 만났다. 캐릭터의 형상화가 너무나도 생생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보건진료소장과 그녀를 둘러싸고 음험한 인간의 야만적 속성을 드러내는 세 명의 할머니는 이 세상 어디에선가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인 것만 같았다. 예전에 농촌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던 향토적이고 아름다운 공동체의 기억은 이 소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폐쇄적인 마을 사람들과 그 속에서 서로를 헐뜯고 이간질 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진 야비한 본성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마지막 구절에 보면 보건진료소장 스스로가 이 마을로 부터 '아웃'됨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만이 아웃의 유일한 대상일까? 이 작품 속에서 품고 있는 아웃은 그녀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워졌다. 강직하고 고지식한 성격의 그녀가 이미 그런 방식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견고한 질서가 있던 마을 사람들을 자신의 삶 속에서 아웃시킨 것일 수도. 혹은 첨예하게 대치하던 그녀와 마을 사람들의 긴장관계가 민원을 두려워하는 관료사회의 정적인 특성에 의해 그 마을에서 동시에 아웃당한 것일 수도. 혹은 그 이상의 무엇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수첩은. 어찌보면 인간세계의 저열한 면들을 드러내는 무거운 소설을 왜 이렇게 동화같은 표지로 장식해 두었을까. 겉표지의 장식된 그림만 보면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는 한 소녀의 내밀한 자아를 아름답고 꿈같이 그리고만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 수록 찾아오는 아뜩한 느낌은 기대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생경한 경험을 선사했다.
 
   '공무원은 민원을 이길 수 없다.'라는 말을 얼마전 친구에게서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친구는 보훈원 민원과에서 일을 했었는데 매일 매일 찾아오는 주민들의 민원과 항의가 두려워 어떤 날은 출근을 하는 것 조차 겁이나기도 했었다고. 컴퓨터가 부숴지고 흉기를 들고 찾아오는 주민들까지 생겨나자 그 친구는 결국 일을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찾아야만 했다. 부조리와 불합리가 분명히 존재하는 데에도 그것을 개선할 수 없는 것이 관료사회가 가진 구조적 문제일 것이다. -그 주민은 또 어쩌다가 그 지경까지 오게 되었을까. 국가를 위해 몸을 바쳤다고 생각했는데, 그에 대한 댓가가 마뜩치 않았을 때, 혹은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 박탈감의 화살은 정부라는 추상적인 거대한 대상보다는 손쉬운 내 앞의 어린 공무원에게 겨누기가 쉽지 않았을까. 누구를 탓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것은 양쪽 모두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안겨 준다. 민원을 올바른 방법으로 넣었을 때에는 문제가 도통 시정되지 않는 정부기관이나, 자신들의 관할이 아닐 때에는 해결하기를 꺼려하는 공무원들의 문제나, 한 쪽의 입장에서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분명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극히 협소한 문제일 터였다.
 
  상생하는 공동체라는 아름다운 이상은 현실에서는 요원한 일인가, 반문해보게 된다. 얼마전 늘 동경해 마지않던 수유너머 공동체가 내부의 복잡한 문제들로 잘게 쪼개져 나갔다. 어떤 집단이던지 비대, 거대화 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동반하는 일일까. 분열을 최소화 하면서 상생한다는 것은 이상주의적인 이야기일까.
  아웃이라는 길지 않은 소설 속에서 인간 관계의 부조리함과 그 인간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까지도 넘나들며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았다. 상대방의 야만성까지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삶의 방법인 것인지. 나는 나 스스로 내 주변의 그렇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배제시키며 살아왔는데, 이런 내 속성마저도 또 다른 의미의 야만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에 대한 어떤 대책은 없었다. 오직 한 가지, 나는 더 이상 그런 분위기에서 하루 일과를 열 수는 없었다. 내게도 그럴 권리는 있을 것이다. 틀니 밑에서 마모되고 있는 잇몸의 악취와 천박한 입놀림, 말을 할 때마다 시종일관 유지하는 삿대질...... 명분도, 한계도 없는 저 마귀의 횡포에 나는 결코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나를 지켜 줄 힘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곧 반격의 창을 들고 박도옥을 향해 달려갈 계획이었다. 내가 여기서 무릎을 꿇는다면, 시체에 파리들이 들끓듯 마을의 모든 벌레들이 나를 파먹기 위해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176


나는 말없이 창밖의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나무처럼 그 자리에서 혼자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세상, 무리를 짓지 않으면 떼로 몰려들어 밟는 것이 인간 세상이었다. -196

 

나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시 보건소 쪽이 나를 상대로 언쟁을 하며 이 시점에서 '우리'라는 표현을 거듭 쓴다면 나는 어떤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누구일까.

"어떻게 알다뇨? 그건 기본이죠. 공무원이 근무 중에 출장을 나가면 당연히 고지를 하잖아요. 그동안 산행을 할 때는 업무 보조원이 보건진료소를 지켰어요. 그런데 알다시피 그거 죽기 살기로 방해하는 사람이 있어서 오늘 처음 문 닫고 갔어요. 그런데 바로 이런 일이 벌어졌어요."  -215

 

사람들이 진술과 사실을 구별하지 않기 시작했다. 박도옥과 장달자보다 더 무서운 건 악의에 찬 그들의 진술과 사실을 구별하지 않으려 하는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인 것이다. 거짓된 진술이 의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기정사실이 되고 그것이 마을을 돌며 서서히 독을 뿜기 시작했다. 주기적으로 마을을 찾아오는 그런 기운이 때로는 주민들 모두를 가해자로, 때로는 피해자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독의 전령사를 자처하고 있었다.

"그 말들을, 모두 믿으세요?"  -221

 

"말 같잖은 소리 말고 돌아가. 이 세상 사람들한테 물어봐. 주민들하고 공무원이 싸웠다면 다 공무원을 욕하지 주민들을 욕하지 않아. 우리는 심부름꾼이라고. 시장님은 정치인이고. 정치인은 자기 표를 갉아먹는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아. 옳고 그르고는 중요하지 않단 말이지. 우리는 무조건 복종하면 돼. 그리고 한 가지 더 충고하겠는데 두루두루 좀 잘해. 한쪽에만 잘한다고 다 되는 거 아니야. 소홀히 하는 쪽에서는 꼭 누수가 생긴단 말이지. 알아들었으면 가서 근무나 열심히 하라고. 언제까지 주민들하고 쌈질할 거야? 출근해서 주민들하고 쌈질이나 하라고 월급 주는 거 아니잖아?"  -238

 

행정계장이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그냥 말입니다. 무조건 조용히, 조용히 지냈으면 합니다. 제 신조는 말없이, 잘하지도 말고, 못하지도 말고 그렇게 없는 듯 있는 듯 지내자는 겁니다. 물론 그래서 내가 아직 이 나이에 이 자리에 있는지는 몰라도 제발...."  -242

 

온통 내가 동조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지만 모두가 확신에 찬 얼굴로 일제히 희망의 행렬에 가담했다. 내가 말하는 것을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그들이 느끼는 것을 내가 느끼지 못한다는 것, 나도 어쩌면 다락방에 갇혀 소통 부재의 이 세상에서 자폐증을 앓아 왔는지도 모른다.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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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처럼
김경욱 지음 / 민음사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결혼이라는 환상에 대해 이처럼 가까이서 열렬히 탐구하고 있는 책이 있을까? 그것은 픽션이었지만 허구가 아니었고, 장미와 명제의 대화는 내 삶의 그것과 맞닿아있었다. 상대에 대해 답답하고 좀처럼 이해하고 싶지 않아질 때, 그에게서 들리는 말이 허공에 부딪혀 산산히 부숴지고 있다고 느껴질 때, 그가 나와 다른 세계에서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충고하고 싶어질 때, 내 삶의 단편적인 풍경들을 이 책은 낱낱히 복원하고 있었다.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와의 언어에서 세상의 끝에서 끝만큼이나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질감을 발견할 때 우리는 불소통을 경험한다. 그 불소통의 종류가 단순히 생각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 서로 다른 '언어'에서 발생한다고 느껴질 때 그 골을 좁히는 길은 너무나도 험난하게 다가온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그래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는 경지. 정확하게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짚어 준다면 타협의 여지가 생길터지만 '언어'의 차이는 이런 타협의 여지를 불식시킨다. 더욱 갑갑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언어'의 차이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설명하기 조차 어려워져 다른 누군가에게 공감을 얻을 수도 없는 형태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 안타까움의 지점을 <동화처럼>의 김경욱 작가는 정확하게 짚어낸다.  

 

알다가도 모를 게 부부 사이였다. 장미가 집을 나온 후 남자는 태도가 돌변했다. 매일 전화해서 안부를 물었고 주말마다 찾아왔다. 장을 봐 와 냉장고를 가득 채웠고 요리를 해 주기도 했다. 돌아갈 때는 언제 들어올 거냐는 물음을 빠뜨리지 않았다. 남자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여전히 몰랐다. 두 달도 채 안 돼 사흘이 멀다 하고 전화로 다투게 된 것도 이기심이 아니라 무지 때문일 터였다.

-난 바람 쐬러 나온 게 아니야.

-잘하겠다고 했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

-그쯤 했으면 됐잖아.

-우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것 같아.

-이러는 진짜 이유가 뭐야?

 

남자는 스무고개라도 하는 것처럼 답만 찾으려 했다. (중략)

질투도 분노도 느끼지 않는 자신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에게서 떠난 것은 몸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중략)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것 같다는 여자의 말을 듣고서야 명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여자의 안에서 죽은 것은 명제였고 명제의 언어였다. 명제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여자는 밥이 탔다며 울상이 될 것이고 명제가 배고프다고 하면 여자는 비가 올 것 같다고 대꾸할 것이었다. 아집과 몰이해와 이기심이 모든 것을 죽였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직 침묵뿐이었다. -298

 

  우리는 어떤 사랑을 꿈꾸었어야 했던 것일까. 서로 다른 별에서 와 한 집에서 일상을 공유하는 엄청난 일을 감행하면서, 이런 파열음들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의 어리석음이었을까. 똑같이 새벽이면 불이 밝아오고, 밤이면 불이 꺼지는 저 수많은 가정집들 안에서도 지금, 여기와 같은 균열들이 존재할까. 나는 때로는 너무나도 생각이 많고 섬세한 '그' 때문에 여기만 안갯 속 같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남들은 조금 더 '구체적'인 것으로, 그리고 '단순한' 것으로 흔들리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  

  하지만 이 책의 책장을 넘기며 이것이 상대를 받아들이는 '어린 어른'들의 성장통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내 안을 들여다보는 노력을 통해 차곡차곡 쌓이게 될 상대를 향한 공간. 이제는 20대의 때처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던 사랑만 할 수는 없기에, 그리고 나에게는 그 때 사랑의 시간들이 이미 내 삶 속에서 충분한 삶의 빛깔을 빚어주고 있기에. 지난 사랑을 기억하며 추억하는 것만으로 현재를 지탱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는 아직도 더 많은 성장통의 아픔의 시간들이 남았음을 느낀다.     

 

아버지가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준 적 없듯 아버지에게 그 말을 건넨 적 없었다. 하지만 받지 못한 사랑만 크게 느껴졌다. 사랑에 관한 늘 피해자를 자처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으니까. 깨달음은 또 다른 깨달음을 불러냈다. 여자에게 짐이 되기 싫어 결별을 결심했다고 믿었지만 거짓이었다. 여자가 짐스러워 헤어지려 했고, 그래서 후련했던 것이다. 명제는 스스로를 속여 온 자신이 가증스럽고 부끄러웠다. 더불어 너무 늦게 도착한 깨달음을 한탄했다. 영원한 추억은 없다. 시간은 힘이 세니까. 그러나 마지막 추억마저 어둠에 묻혀도 깨달음의 빛은 언젠가 찾아온다. 사랑도 힘이 세니까. -214 

 

 고독은 깨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깨는 것이다. 따라서 김경욱의 <동화처럼>은 한 번쯤 연애를 해 본 사람들에게는 재미있는 소설이 될 테고, 두세 번쯤 연애의 실패를 맛본 사람들에게는 위안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이란 나를 비우는 지경임을 경험해 본 자들에게는 애틋한 성장소설로 읽힐 것이다. 지독히 상처받은 만큼 자라는 아이처럼 열렬히 사랑하는 만큼 성장한다. 세상은 흉터만큼의 공간을 허락한다. (중략)

 

김경욱의 소설 <동화처럼> 안에는 진짜 결혼과 연애가 들어 있다. 주말마다 마트에 가고 간혹 멀티플렉스에서 보는 심야 영화를 충전 삼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의 남루한 삶에 대한 애잔한 공감이 소설 전반에 녹아 있는 것이다.           _작품해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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