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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이 책이 처음 발간될 무렵,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에 작가 박범신이 나와 신간을 낸 소회를 밝히고 있었다. 극 중 주인공의 이름 두 글자로 씌어진 강렬했던 제목이 뇌리에 남았고, 그 소설은 이제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을 앞두고 있다. 어찌보면 굉장히 자극적이게 들릴 수 있을만한 소재 때문이었을까. 읽는 내내 영화로 만들어지면 흥행하겠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들의 흥행코드로 "70대 노시인 이적요와 열일곱 소녀의 치정극"이라고 홍보하면 될 일이었다. 영화 <파주>도 그랬고,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도 그랬고, <오감도>도 그랬다. 이 영화는 과연 어떤 모양으로 소설 속의 시인 이적요와 그의 제자 서지우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을까. 너무나도 숨이가빠 생략하거나 뭉게버리거나 덧씌워버리지는 않을는지. 내가 좋아하는 배우 박해일이 시인 이적요역을 맡았다는 것도 의아했다. 젊었을 때부터 모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60대에서 70대 사이만 연기하는 극중 배우를 왜 젊은 이가 특수분장까지 고집스럽게 해가며 맡았단 말인가. 실제로 60대의 배우가 시인역할을 맡아 스물남짓한 젊은 배우를 욕망하는 내용이 등장하면 관객이 거부감을 가질 수 있어서? 아니면 노년의 배우들 중 흥행의 코드에 맞을만한 배우가 남아있지 않아서? 그 어느쪽도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영화 <시>에서처럼 노년의 배우가 주연을 맡아 감정선을 살리고 베드씬까지도 연기한 예는 얼마든지 있었다. 영화가 개봉하기에 앞서 걱정이 앞서는 이유다.
강우석 감독은 전작이 있는 영화 <이끼>를 찍으면서 전작이 갖는 기대감 때문에 그동안 영화를 찍으며 평생 겪었던 고통을 합친것보다도 훨씬 더 큰 심리적 압박과 부담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는 전작이 있는 영화, 미리 사람들의 기대치가 있는 작품은 찍지 않겠다고 술회한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영화가 어느정도 흥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세간의 입말들이 시끄러운 것은 종이작품과 영상작품이 가지는 본질적인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여백과 호흡을 조절하며 읽는 이가 함께 내용을 구성해 나갈 수 있는 종이작품에 비해 영상작품은 그 여백과 호흡이 만들어내는 사람들에 의해 크게 좌우되는 까닭이다. 이틀간에 걸쳐 천천히 음미하며, 때로는 단숨에 읽어내려가 버린 촘촘하기도 하고 성기기도 한 문장들을 두시간여의 러닝타임안에 복원해 재구성해 낸다는 것은 비단 고달프고도 지난한 작업일테다.
<은교>는 욕망과 본능의 교차점이자 뒤엉켜 제 갈길을 찾지 못하고 우왕자왕하는 전시장이다. 이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은 단 세사람으로 압축되어있고, 그 밖의 인물들은 아주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 이 세사람의 자아가 워낙 왕성하고 거대하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이야기가 짜임새있게 진행되는 까닭이다.
노시인 이적요는 서지우를 자식처럼 여기면서도 성공시키고 싶어하는 욕망 더불어 세속적인 자신의 작품을 제자의 입으로나마 세상으로 내보내고 싶어하던 욕망, 하지만 그에 반대로 자신의 것을 훔치고도 태연한 멍청한 제자에 대한 미움과 사랑하는 그가 은교를 범하고 유린했다는 분노가 뒤엉켜있다. 물론 뒤로 갈수록 후자의 욕망이 커져 마침내 그것은 최후의 울부짖음처럼 살인을 계획하는 악한의 모습으로 터져나온다. 은교를 향해서는 꽃처럼 싱싱하고 새하얀 그녀를 정갈하고 다정하게 사랑하는 마음과 그녀를 가지고 취하고 싶어하는 본능적 욕망이 어지럽게 뒤엉킨다. 이는 서지우도 마찬가지여서, 시인 이적요를 향해서 아버지처럼 모시고 존경하고 살뜰히 아끼는 마음만큼이나 그의 것을 탐하고 싶어하는 욕심과 은교를 사이에둔 질투와 원망의 감정, 더불어 글솜씨가 없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모멸의 심정이 뒤섞여 그를 속이고 뛰쫒고 의심한다. 심리묘사가 세밀하게 되어있지 않은 인물은 오직 은교뿐인데, 열일곱의 여린 가슴속에서 어떤 욕망들이 움틀거렸는지는 쉽게 단정지어지다가도 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충분한 사랑을 담뿍 받지 못하고 자란 가정의 결핍이 그녀를 그렇게 이끌어 왔는지, 그녀는 생각보다도 쉽게 서지우에게 몸을 내어준다. 그리고 몸을 내어 주면서도 영어단어를 암기하거나 그들의 은어를 귀엽게 내뱉는 등 큰 충격이나 내적 갈등은 엿보이지 않는다. 할아버지에게 위태로운 상황을 들키면서도 크게 불쾌해하거나 염려하는 모습조차 그려지지 않는다. 돈과 권력, 그리고 애틋한 사랑마저도 가지고 있는 두 남자 사이에서 영민하고 영악한 듯 움직이던 악녀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를 이렇게 갖고 싶어하는지도 몰랐다구요.'라고 절규하며 짐짓 나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기도 했다.
작가 스스로도 '실제로 나도 모르겠다. 걔가 어떤 앤지.'라고 말하며 은교라는 인물에 대해 사실적이면서도 관념적인 인물이라고 평했다. 은교 자체를 이적요 시인의 갈망의 징표이고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은교가 독자에게 너무 가까우면 안된다고. 글의 제목이기도 하고 이 이야기의 주된 축이기도 한 한은교. 그녀는 어찌보면 깊이 잘 생각하지 않고, 마음내키는 대로 행동하며 그러면서도 자기 생각에 빠져 우울해졌다가 생기있어 통통 튀어오르다가 또 이내 눈물을 흘리면서 절규하고야 마는 우리시대 평범한 여고생의 모습을 그린 듯 싶기도하다. Q변호사의 대사처럼 말이다. 그녀도 그 두사람을 만나면서 3년간 뼈 아픈 성장통을 겪고 이제부터야 안으로 깊어지기 시작할, 덜 익고 내면 성찰이 성긴 평범한 소녀였을 것이다.
오랜만에 단숨에 읽히는 소설을 만났다. 그것은 이 소설이 대중과 통속소설의 범주안에 들어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테고, 그만큼 구성과 필력이 치밀하다는 반증이기도 할 터이다. 글을 읽으며 소설 <도가니>를 읽었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심리적 불편함을 느꼈던 이유는 나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적요 시인의 말처럼 통속 소설과 본격소설을 구분지으려고 하는 못된 위선적 심리가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워졌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
사실이다. 은교는 이제 겨울 열일곱 살 어린 처녀이고 나는 예순아홉 살의 늙은 시인이다. 아니, 새해가 왔으니 이제 일흔이다. 우리 사이에는 오십이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있다. 이런 이유로 나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 변태적인 애욕이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부정하진 않겠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라고 설파한 것은 명저 <팡세>를 남긴 파스칼이고, 사랑을 가리켜 '분별력 없는 광기'라고 한 것은 셰익스피어이다. 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 당신들의 그것도 알고 보면 미친, 변태적인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하고 싶지만, 뭐 상관없다. 당신들의 사랑은 당신들의 것일 뿐이니까. -12p
그는 젊었을 때부터 반역에 대해 알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는 평생 동안 오로지 주인이 주입해준 생각,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짐을 지고 걸어갈 뿐인 '낙타' 같은 존재였다. 니체가 말한바 '낙타의 시기'가 그에겐 영원했고, 따라서 자기반역을 통해 세계를 독자적으로 이해하는 '사자의 시기'는 그에게 도래하지 않았다. '쌍커풀'은 그리하여 육체에 깃든 그의 젊음을 시시각각 먹어치웠다. 그는 젊은 시절에도 '그놈의 쌍꺼풀' 때문에 이미 중년이거나 장년이었다. 평생 그는 허당을 짚고 걸어야 했다. -34p
남자에게 연애는 감각으로부터 영혼으로 옮겨간다.
라고 그 순간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관념적으로 연애를 상상할 때와 너무도 다른 결론이었다. 나는 은교를 만나기 전까지, 참된 연애란 남녀불문하고 영혼으로 시작된다고 믿었다. 감각은 하나의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은교를 통해 내가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실체 없는 관념이었는지 명백히 알게 되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 수준보다 늙은 내 육체가 사실은 얼마나 예민하고 건강하게 제 촉수들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지도. 늙은 육체는 외피에 불과했다. 은교와 만나는 나의 감각들은 몸서리쳐질 만큼 살아 있었다.
-202p
늙는 것, 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참혹한 범죄,
라는 생각이 들었다. 늙은이의 욕망은 더럽고 끔찍한 범죄이므로, 제거해 마땅한 것, 이라고 모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하며 비난하고 있었다. 일회용 면도기가 눈에 들어왔다. 면도칼만 빼내서 팔목 한 번 내려치면 내 안의 더러운 범죄, 그 추악한 욕망들과, 오로지 늙었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하는 끔찍한 모든 굴욕이 다 씻겨나갈 것이다. -20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