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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 - 2008년 문학수첩작가상 수상작
주영선 지음 / 문학수첩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오랫만에 숨가쁘게 읽어간 소설을 만났다. 캐릭터의 형상화가 너무나도 생생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보건진료소장과 그녀를 둘러싸고 음험한 인간의 야만적 속성을 드러내는 세 명의 할머니는 이 세상 어디에선가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인 것만 같았다. 예전에 농촌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던 향토적이고 아름다운 공동체의 기억은 이 소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폐쇄적인 마을 사람들과 그 속에서 서로를 헐뜯고 이간질 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진 야비한 본성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마지막 구절에 보면 보건진료소장 스스로가 이 마을로 부터 '아웃'됨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만이 아웃의 유일한 대상일까? 이 작품 속에서 품고 있는 아웃은 그녀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워졌다. 강직하고 고지식한 성격의 그녀가 이미 그런 방식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견고한 질서가 있던 마을 사람들을 자신의 삶 속에서 아웃시킨 것일 수도. 혹은 첨예하게 대치하던 그녀와 마을 사람들의 긴장관계가 민원을 두려워하는 관료사회의 정적인 특성에 의해 그 마을에서 동시에 아웃당한 것일 수도. 혹은 그 이상의 무엇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수첩은. 어찌보면 인간세계의 저열한 면들을 드러내는 무거운 소설을 왜 이렇게 동화같은 표지로 장식해 두었을까. 겉표지의 장식된 그림만 보면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는 한 소녀의 내밀한 자아를 아름답고 꿈같이 그리고만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 수록 찾아오는 아뜩한 느낌은 기대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생경한 경험을 선사했다.
'공무원은 민원을 이길 수 없다.'라는 말을 얼마전 친구에게서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친구는 보훈원 민원과에서 일을 했었는데 매일 매일 찾아오는 주민들의 민원과 항의가 두려워 어떤 날은 출근을 하는 것 조차 겁이나기도 했었다고. 컴퓨터가 부숴지고 흉기를 들고 찾아오는 주민들까지 생겨나자 그 친구는 결국 일을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찾아야만 했다. 부조리와 불합리가 분명히 존재하는 데에도 그것을 개선할 수 없는 것이 관료사회가 가진 구조적 문제일 것이다. -그 주민은 또 어쩌다가 그 지경까지 오게 되었을까. 국가를 위해 몸을 바쳤다고 생각했는데, 그에 대한 댓가가 마뜩치 않았을 때, 혹은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 박탈감의 화살은 정부라는 추상적인 거대한 대상보다는 손쉬운 내 앞의 어린 공무원에게 겨누기가 쉽지 않았을까. 누구를 탓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것은 양쪽 모두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안겨 준다. 민원을 올바른 방법으로 넣었을 때에는 문제가 도통 시정되지 않는 정부기관이나, 자신들의 관할이 아닐 때에는 해결하기를 꺼려하는 공무원들의 문제나, 한 쪽의 입장에서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분명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극히 협소한 문제일 터였다.
상생하는 공동체라는 아름다운 이상은 현실에서는 요원한 일인가, 반문해보게 된다. 얼마전 늘 동경해 마지않던 수유너머 공동체가 내부의 복잡한 문제들로 잘게 쪼개져 나갔다. 어떤 집단이던지 비대, 거대화 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동반하는 일일까. 분열을 최소화 하면서 상생한다는 것은 이상주의적인 이야기일까.
아웃이라는 길지 않은 소설 속에서 인간 관계의 부조리함과 그 인간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까지도 넘나들며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았다. 상대방의 야만성까지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삶의 방법인 것인지. 나는 나 스스로 내 주변의 그렇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배제시키며 살아왔는데, 이런 내 속성마저도 또 다른 의미의 야만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에 대한 어떤 대책은 없었다. 오직 한 가지, 나는 더 이상 그런 분위기에서 하루 일과를 열 수는 없었다. 내게도 그럴 권리는 있을 것이다. 틀니 밑에서 마모되고 있는 잇몸의 악취와 천박한 입놀림, 말을 할 때마다 시종일관 유지하는 삿대질...... 명분도, 한계도 없는 저 마귀의 횡포에 나는 결코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나를 지켜 줄 힘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곧 반격의 창을 들고 박도옥을 향해 달려갈 계획이었다. 내가 여기서 무릎을 꿇는다면, 시체에 파리들이 들끓듯 마을의 모든 벌레들이 나를 파먹기 위해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176
나는 말없이 창밖의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나무처럼 그 자리에서 혼자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세상, 무리를 짓지 않으면 떼로 몰려들어 밟는 것이 인간 세상이었다. -196
나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시 보건소 쪽이 나를 상대로 언쟁을 하며 이 시점에서 '우리'라는 표현을 거듭 쓴다면 나는 어떤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누구일까.
"어떻게 알다뇨? 그건 기본이죠. 공무원이 근무 중에 출장을 나가면 당연히 고지를 하잖아요. 그동안 산행을 할 때는 업무 보조원이 보건진료소를 지켰어요. 그런데 알다시피 그거 죽기 살기로 방해하는 사람이 있어서 오늘 처음 문 닫고 갔어요. 그런데 바로 이런 일이 벌어졌어요." -215
사람들이 진술과 사실을 구별하지 않기 시작했다. 박도옥과 장달자보다 더 무서운 건 악의에 찬 그들의 진술과 사실을 구별하지 않으려 하는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인 것이다. 거짓된 진술이 의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기정사실이 되고 그것이 마을을 돌며 서서히 독을 뿜기 시작했다. 주기적으로 마을을 찾아오는 그런 기운이 때로는 주민들 모두를 가해자로, 때로는 피해자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독의 전령사를 자처하고 있었다.
"그 말들을, 모두 믿으세요?" -221
"말 같잖은 소리 말고 돌아가. 이 세상 사람들한테 물어봐. 주민들하고 공무원이 싸웠다면 다 공무원을 욕하지 주민들을 욕하지 않아. 우리는 심부름꾼이라고. 시장님은 정치인이고. 정치인은 자기 표를 갉아먹는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아. 옳고 그르고는 중요하지 않단 말이지. 우리는 무조건 복종하면 돼. 그리고 한 가지 더 충고하겠는데 두루두루 좀 잘해. 한쪽에만 잘한다고 다 되는 거 아니야. 소홀히 하는 쪽에서는 꼭 누수가 생긴단 말이지. 알아들었으면 가서 근무나 열심히 하라고. 언제까지 주민들하고 쌈질할 거야? 출근해서 주민들하고 쌈질이나 하라고 월급 주는 거 아니잖아?" -238
행정계장이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그냥 말입니다. 무조건 조용히, 조용히 지냈으면 합니다. 제 신조는 말없이, 잘하지도 말고, 못하지도 말고 그렇게 없는 듯 있는 듯 지내자는 겁니다. 물론 그래서 내가 아직 이 나이에 이 자리에 있는지는 몰라도 제발...." -242
온통 내가 동조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지만 모두가 확신에 찬 얼굴로 일제히 희망의 행렬에 가담했다. 내가 말하는 것을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그들이 느끼는 것을 내가 느끼지 못한다는 것, 나도 어쩌면 다락방에 갇혀 소통 부재의 이 세상에서 자폐증을 앓아 왔는지도 모른다. -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