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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처럼
김경욱 지음 / 민음사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결혼이라는 환상에 대해 이처럼 가까이서 열렬히 탐구하고 있는 책이 있을까? 그것은 픽션이었지만 허구가 아니었고, 장미와 명제의 대화는 내 삶의 그것과 맞닿아있었다. 상대에 대해 답답하고 좀처럼 이해하고 싶지 않아질 때, 그에게서 들리는 말이 허공에 부딪혀 산산히 부숴지고 있다고 느껴질 때, 그가 나와 다른 세계에서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충고하고 싶어질 때, 내 삶의 단편적인 풍경들을 이 책은 낱낱히 복원하고 있었다.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와의 언어에서 세상의 끝에서 끝만큼이나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질감을 발견할 때 우리는 불소통을 경험한다. 그 불소통의 종류가 단순히 생각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 서로 다른 '언어'에서 발생한다고 느껴질 때 그 골을 좁히는 길은 너무나도 험난하게 다가온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그래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는 경지. 정확하게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짚어 준다면 타협의 여지가 생길터지만 '언어'의 차이는 이런 타협의 여지를 불식시킨다. 더욱 갑갑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언어'의 차이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설명하기 조차 어려워져 다른 누군가에게 공감을 얻을 수도 없는 형태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 안타까움의 지점을 <동화처럼>의 김경욱 작가는 정확하게 짚어낸다.
알다가도 모를 게 부부 사이였다. 장미가 집을 나온 후 남자는 태도가 돌변했다. 매일 전화해서 안부를 물었고 주말마다 찾아왔다. 장을 봐 와 냉장고를 가득 채웠고 요리를 해 주기도 했다. 돌아갈 때는 언제 들어올 거냐는 물음을 빠뜨리지 않았다. 남자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여전히 몰랐다. 두 달도 채 안 돼 사흘이 멀다 하고 전화로 다투게 된 것도 이기심이 아니라 무지 때문일 터였다.
-난 바람 쐬러 나온 게 아니야.
-잘하겠다고 했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
-그쯤 했으면 됐잖아.
-우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것 같아.
-이러는 진짜 이유가 뭐야?
남자는 스무고개라도 하는 것처럼 답만 찾으려 했다. (중략)
질투도 분노도 느끼지 않는 자신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에게서 떠난 것은 몸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중략)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것 같다는 여자의 말을 듣고서야 명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여자의 안에서 죽은 것은 명제였고 명제의 언어였다. 명제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여자는 밥이 탔다며 울상이 될 것이고 명제가 배고프다고 하면 여자는 비가 올 것 같다고 대꾸할 것이었다. 아집과 몰이해와 이기심이 모든 것을 죽였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직 침묵뿐이었다. -298
우리는 어떤 사랑을 꿈꾸었어야 했던 것일까. 서로 다른 별에서 와 한 집에서 일상을 공유하는 엄청난 일을 감행하면서, 이런 파열음들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의 어리석음이었을까. 똑같이 새벽이면 불이 밝아오고, 밤이면 불이 꺼지는 저 수많은 가정집들 안에서도 지금, 여기와 같은 균열들이 존재할까. 나는 때로는 너무나도 생각이 많고 섬세한 '그' 때문에 여기만 안갯 속 같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남들은 조금 더 '구체적'인 것으로, 그리고 '단순한' 것으로 흔들리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
하지만 이 책의 책장을 넘기며 이것이 상대를 받아들이는 '어린 어른'들의 성장통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내 안을 들여다보는 노력을 통해 차곡차곡 쌓이게 될 상대를 향한 공간. 이제는 20대의 때처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던 사랑만 할 수는 없기에, 그리고 나에게는 그 때 사랑의 시간들이 이미 내 삶 속에서 충분한 삶의 빛깔을 빚어주고 있기에. 지난 사랑을 기억하며 추억하는 것만으로 현재를 지탱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는 아직도 더 많은 성장통의 아픔의 시간들이 남았음을 느낀다.
아버지가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준 적 없듯 아버지에게 그 말을 건넨 적 없었다. 하지만 받지 못한 사랑만 크게 느껴졌다. 사랑에 관한 늘 피해자를 자처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으니까. 깨달음은 또 다른 깨달음을 불러냈다. 여자에게 짐이 되기 싫어 결별을 결심했다고 믿었지만 거짓이었다. 여자가 짐스러워 헤어지려 했고, 그래서 후련했던 것이다. 명제는 스스로를 속여 온 자신이 가증스럽고 부끄러웠다. 더불어 너무 늦게 도착한 깨달음을 한탄했다. 영원한 추억은 없다. 시간은 힘이 세니까. 그러나 마지막 추억마저 어둠에 묻혀도 깨달음의 빛은 언젠가 찾아온다. 사랑도 힘이 세니까. -214
고독은 깨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깨는 것이다. 따라서 김경욱의 <동화처럼>은 한 번쯤 연애를 해 본 사람들에게는 재미있는 소설이 될 테고, 두세 번쯤 연애의 실패를 맛본 사람들에게는 위안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이란 나를 비우는 지경임을 경험해 본 자들에게는 애틋한 성장소설로 읽힐 것이다. 지독히 상처받은 만큼 자라는 아이처럼 열렬히 사랑하는 만큼 성장한다. 세상은 흉터만큼의 공간을 허락한다. (중략)
김경욱의 소설 <동화처럼> 안에는 진짜 결혼과 연애가 들어 있다. 주말마다 마트에 가고 간혹 멀티플렉스에서 보는 심야 영화를 충전 삼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의 남루한 삶에 대한 애잔한 공감이 소설 전반에 녹아 있는 것이다. _작품해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