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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끝에 사람이
전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평점 :
전혜진 작가의 신작 『바늘 끝에 사람이』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현대를 살아가는 ‘나’고, ‘너’고, ‘우리’였다. 작가는 아프고 어두운 그래서 과중할 수 있는 주제를 무겁지 않게 세상에 내놓았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억울하게 고통받은 사람들의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라고 했던 기타노 다케시 말이 떠올랐다. 여기에 일어나는 죽음 역시 그러하다.
사죄하고 반성한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별일 없이 사는 듯하다가도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작가처럼 책을 읽다 보면 부끄러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복수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바늘 끝에 사람이
기계가 몸의 7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지만, 나와 내 동료들은 여전히 사람이라고. 짓밟고, 무시하고, 때려잡고, 굶겨 죽이고, 사람을 절망의 궁지로 몰아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어도 우리 모두는 너희와 같은 사람이라고.(p53)
-지상에서 7만 2천 킬로미터 위, 카운터웨이터 꼭대기에 내가 남아 있다. 기계가 몸의 75퍼센트를 차지한 몸으로 부당 해고에 맞서 농성 중인 내가 8개월째 있다.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말라죽어가지 않기 위해, 떨어지고 깔리고 끼이고 부서지며 그렇게 죽어가는 일이 없도록 살기 위해 지구 밖에서 궤도 엘리베이터 공사현장에서 일했던 내가 버티고 누워 있다. 무언가의 상징이 되는 일에는 흥미가 없었다.(p49) 그럼에도 세상이 투사로 만든 내가 이곳에 있다.
안나푸르나
인도나 네팔이나 다른 성지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적어도 어떤 안부는 이런 식으로라도 전해 야만 한다고, 윤선은 생각했다.(p101)
- “닫힌 교문을 열며”라는 모토로 참교육을 하고자 하는 초등학교 선생님인 윤선에게 자신의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카라비러를 건네며 안나푸르나에 가겠다던 선생님이 계셨다. 안나푸르나에는 갔으나 등반에 성공하지 못했던 참 교육자였던 선생님들이 안나푸르나에는 계시다.
할망의 귀환
살아라, 살아, 살아라, 혼아, 살아라, 그렇게 저승꽃 뿌리면서 일으켜 세우면 이 섬이며 해군 기지며 뭍놈들이며, 피로 얼룩진 땅 위로 새하얗게 바닷물이 뒤덮을 거야."(p136)
-돌부처가 피를 흘리니 홍수가 나고 해일이 일었다는 설이 제주에 있다. 가난해서 치마 한 벌 해 입을 수 없었던 설문대할망. 오백 명의 아들들을 먹여 살리려고 죽을 끓이다가 죽 솥에 빠져 죽은 할망을 살리려던 설문대할망의 오백 명 아들 중 한 명을 자처한 고주사. 저세상으로 돌아간 거대한 존재를 이승으로 불러내려했던 고주사를 말리려던 박 경장이 제주에 있다.
단지
막 동이 트는 아침 햇살 아래, 썩어가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마을을 집이란 집은 전부 불타 무너지고 길가 아무 데나 사람들이 피와 내장을 쏟은 채 죽어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을 한복판에 소화가 있었다. 작은 단지 하나를 품에 꼭 안은 채로.(p189)
-제주 살이를 하고 있는 주연과 하린이 계곡에서 호기심에 열어 본 단지에는 제주 4.3 사태 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혼이 있었다. 세린의 이모할머니 순희. 만신 송자의 신 딸인 순희가 겪었던 이야기가 단지에 있다.
내가 만난 신의 모습은
삼준은 마치 이날까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비밀을 다 풀어놓고 빈 껍데기가 된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을 그 신의 비밀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p241)
-자신이 학도병 시절 만났던 죽령의 산신 다자구 할머니 이야기를 며느리 진숙에게 들려주는 여든다섯의 노구의 몸을 한 삼준이 있다.
창백한 눈송이들
그 눈에 닿을 때마다 여자들 하나하나가 마치 눈송이처럼 녹아내렸다. 유진 은 그 눈을 맞으며 울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바로 자신이 고 자신의 친구들 같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들 같았다.(p304)
-달빛 아래 하늘에 뜬 달보다도 더 희고 창백한 얼굴로 활주로 위 군복을 입고 나타난 여자들과 단발머리의 김소위. 젊은 나이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울부짖음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의 눈송이가 되어 흩뿌리는 곳에 유진은 서 있었다.
너의 손을 잡고서
누군가 손을 잡아주어야 하는 일이 생기면 그저 한 사람이라도 더 보탠다는 마음으로 찾아가 나란히 섰다. 손을 잡았다.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리고 수현을 다시 만났다.(p340)
-간호사 출신 양호 교사 미경과 꾀병을 부리며 양호실로 쉬겠다고 오는 수현이 있다. 일련의 일로 학교를 그만두고 부지런히 살면서 쉬는 날엔 거리로 나갔다. 누군가 손을 잡아주어야 하는 일이 생기면 그저 한 사람이라도 더 보태다는 마음으로 찾아가 나란히 섰다. 손을 잡았다. 할 수 있을 했다. 그리고 다시 수현을 만났다. 세월호 추모 집회에서, 강남역 추모 집회에서, 홍콩 민주화 지지자 집회에서 그리고 또 다른 집회에서 손을 잡은 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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