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북소리
웨인 W. 다이어 지음, 김성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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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만 더
미치 앨봄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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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어느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유령도 한 사람 등장하니 유령 이야기라고 해도 좋겠다. 하지만 가족 이야기는 모두 유령 이야기인 법이다. 사랑하던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뒤에도 여전히 우리 곁에 앉아 있기 때문에. (p9)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났다.

방금 술에 취한 채 고향에서 자살하려고 총을 갖고 고속도로를 역주행하다 트럭과 부딪치는 사고도 내고 도망쳐 나와 동네 낯익은 물탱크에도 올라가 뛰어내렸지만 죽지 않았다.

한마디로 자살도 제대로 못 해내는 비참한 상태다.

그런 그가 어릴 적 살던 집에 가서 보니 어머니가 계신 것이다.

일상적인 모습으로.

어머니, 지금 이 곳에 있을 수 없는 거잖아요?

어머니는 대체 지금 무엇이란 말인가요?

나는 왜 돌아가신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가요?

그러나 차마 입 밖에 내서 물을 수 없었다.

한때 프로야구 선수로 다음은 세일즈맨으로 그러다 알콜 중독자로 끝내는 이혼당하고 며칠 전 딸의 결혼식마저 초대받지 못한 칙 베네토는 자포자기되어 자살하려는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어떻게 되든 이제 상관없어 보인다.

그리고 어머니와 보낸 하루.

그것이 꼭 스크루지 영감의 하룻밤이 아니어도 칙 베네토로서 과거를 회상하며 지나온 흔적을 더듬고 깨닫는 시간이다.

50년대 이혼한 어머니가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따돌림 속에서도 꿋꿋이 남매를 키워내는 모습은 눈물겹다.

그러나 자신은 성장하면서 점점 어머니에게서 멀어지고 살갑게 대할 수 없었다.

급기야 왜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는지 왜 자살하려고 하는지 ......

어머니의 단 한마디의 질문과 만난다.

“왜 죽으려고 하니?”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는 자식이 있을까?

어떤 대단한 부모라도 자식을 키우는데 수고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부모 앞에 항상 당당한 모습일 수 없는 게 또 자식이다.

근래 내 부모님은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약해지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점점 허물어지는 모습을 발견한다.

적이 난 순간순간 당황스럽다.

그리 애틋하고 곰살맞게 표현할 줄 모르는 나는 무뚝뚝하게 대하지만 이 또한 돌아서면 마음이 불편하고 죄스럽다.

인생이 길지 않다는 걸 이제 외면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기에 마음 한 구석에서 부모님에 대한 불안이 밀려온다.

자신의 실패한 삶에서 오는, 또 어머니께 제대로 못한 죄책감에서 오는 회한이 어찌 칙 베네토에게만 있겠는가?

칙 베네토에게서 나의 그림자를, 칙의 어머니 포지에게서 내 부모님의 자취를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가족과의 화해, 용서의 가치는 경험한 자만이 알 것이다.

가족이란 확장된 자아가 아니던가?

유전인자로 묶여서인가, 나의 파편을 그들 속에서 발견하는 건 기쁨이요 고통일 때가 있다.

못 견디게 싫을 때도 있고, 그들의 상처가 고스란히 나에게 통증으로 전달될 때가 있다.

곧잘 애증으로 점철된 가족을 마주할 때면 내 한계의 얕은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것도 고통이다.

그래서일까 무엇보다 화해와 화목의 시간이 오면 나는 슬쩍 안심하게 된다.

마음의 평안함이 해결의 단순한 보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의 또 다른 자아를 포용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단 하루만 더”....

책을 읽으며 점점 마음이 훈훈해졌다.

칙 베네토가 위안을 얻고 치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나도 그 하루 속에 있기에 위안과 평안이 전해져왔다.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의 힘이며 자아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힘이 아니겠는가?

그리운 사람, 사랑했던 사람과 단 하루만이라도 더 보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이미 그 하루가 주어져 있는 셈이니까요. 오늘 하루, 내일 하루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들의 하루는 누구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쓰라고 주어진 하루입니다. 그러면 매일이 단 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소중해지지요.(p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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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행진 - 3천 년을 이어온 오만한 통치자들의 역사
바바라 터크먼 지음, 조석현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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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도 이미 내가 들은 것과 똑같은 주제가 다시 울려 퍼지리라.

이성적인 사람이 이성적인 목적을 위해서,

또는 미치광이가 어이없는 일과 대참사를 위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지 말란 법은 없다.“

-조지 캠벨, 《신의 가면 : 원시신화학》, <서문>에서

 

윗글은 이 책 [바보들의 행진] 첫 장을 펼치면 만나는 서두를 장식한 글귀다.

참으로 대단한 축복과 저주의 예언처럼 들린다.

 

난 가끔 그런 것이 궁금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저 미국 워싱턴 백악관의 주인은 세계 모든 정보가 모이고 최고의 두뇌에 둘러싸여 있으며 싱크탱크에서 올라오는 그 많은 아이디어, 하다못해 24시간 쉬지 않고 공중을 맴도는 인공위성으로부터 감지되는 세계의 긴밀한 정보들이 쏟아져들 텐데 그 속에서 솎아내고 취합한 내용물들로 판단하고 결정한 정책이란 얼마나 완벽할 것인가?

항상 미래를 예견하며 준비한 시나리오와 시뮬레이션을 통해 어느 정도 검증도 했을 물샐 틈 없는, 세계 최강의 국력으로 빚어낸 미국의 정책이란 분명 이런 결정체일 것이다.

뉴스를 통해 쏟아져오는 부시의, 또는 그 외의 어리석어 보이는 선택들도 사실은 내가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그렇지 바로 미국 스스로의 국익을 위해서는 최상의 계획들일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이건 반대로 우리의 정책이란 어디를 봐도 엉성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졌으리란, 불안감이 감도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모르겠다. 은연중에 조금은 사대주의적이고 아직도 패배주의적인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지도...

 

그런데 이런 차이에 대한 답을 얻는 데 많은 힌트가 될 수 있는 책을 한 권 만났다.

[바보들의 행진].

참 단순하면서도 노골적인 조롱이 이미 제목에서부터 엿보인다.

바로 가로질러 적혀있는 부제목에서 이런 의미는 더욱 확연하게 도드라져 보인다.

“3천 년을 이어온 오만한 통치자들의 역사”

 

그러니까 저자 바버라 터치먼은 3천 년 동안 면면이 이어져온 통치자들의 어리석은 정책 결정과 그것에서 비롯된 실정들로 얼마나 많은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봐왔는지 커다란 네 가지 사건들을 통해 역사적으로 더듬어 밝혀 정리하고 있다.

저자의 조건 기준도 역시 단순하게 출발한다.

철저히 국익에 반한 것.

 

그리고 3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처음으로 언급한 첫 사례는 우리도 잘 아는 트로이 목마다. 지금까지도 많은 예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친 소재로 쓰이는 이 얘기에는 인간의 모순과 문제를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다소 꿰뚫고 있어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심증을 울리며 자극하는 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것이다. 왜 트로이는 전쟁 중인 적 그리스군이 어느 날 갑자기 성 앞에 커다란 목마를 놓아두고 사라졌는데도 의심 없이 그것을 성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을까? 이런 어리석음의 발로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물론 이들 중에도 신중하게 판단하고 의심했던 자들이 있었다. 우리에게도 낯익은 두 아들과 함께 큰 뱀에게 공격받아 고통스런 표정으로 일그러진 라오콘상의 주인공 라오콘이나 카산드라라는 인물들은 경고를 했지만 모두 무시되고 배척당했다.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르네상스 시대 여섯 명의 교황들이다.

당시 여느 나라 세속 왕들보다도 더욱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비종교적 행실로 일관한 교황들은 결국 기독교분리까지 몰고 오는 결과를 낳았다.

 

18세기 북아메리카라는 커다란 식민지를 지배하던 영국은 그들의 안하무인격인 조세제도를 통해 위압적으로 통치하다 결국 독립전쟁으로 미국을 잃는 우를 범해서 극대한의 국익을 상실하고 만다.

 

마지막 미국의 역사를 통틀어 최대의 치욕이자 악몽인 베트남 전쟁을 통해 미국대통령들이 보인 추태와 실정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결국 그들의 공통점은 어리석음과 독선과 아집, 무지가 낳은 인간의 비합리적인 모습이다.

문제는 이들이 한 개인으로서 저지른 실패가 아니라 그들이 통치자라는 위치에 있었기에 빚어진 역사와 현실 속의 참담한 비극적 경험이다.

왜 그들은 역사 속에서 저지른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가?

왜 그들은 역사 속에서 배우려 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가?

이것이 저자가 58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남긴 통렬한 의문이자 과제다.

통치자로서 그들과 그들에게서 통치 받는 일반 국민들로서 우리는 또한 과연 자유로울까?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우리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함께 묶이고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나는 다시금 심사숙고하며 역사를 바라보고 현재를 살아갈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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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경제학
유병률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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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평소 여자들의 경제관이 얼마나 불만이었는지 참 할 말이 많았었나보다.

시종일관 충고하는 데 책의 대부분을 할애했다.

 

Why? 왜 여자가 경제를 더 알아야 할까?

What? 경제 마인드로 세상을 바라보자.

How? 경제를 알아야 돈의 흐름이 보인다.

모두 3장으로 이루어진 소제목에서도 보여지듯이 저자의 주장은 단순명쾌하면서 일관성 있게 제시되었다.

 

세계화와 무한경쟁 시대로 돌입한 지금 실력의 차이에 의한 경제적 양극화로 그동안 경제적인 면을 등한시해온 여자들로서는 특히 치명적인 환경에 놓여 질 수 있다.

더욱이 남자보다 수명이 길고 미혼, 이혼, 사별 등으로 독신의 시간이 그만큼 길어졌기 때문에 경제적인 측면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자들은 경제적 개념부터 부족하고 결혼 전 목표는 결혼 비용을 남자는 주택 자금마련을 위한 재테크 활용이라는 차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초점부터가 다르다.

자신의 경제 마인드를 바로 잡고 경제의 흐름에 관심을 가지면서 스스로의 가치 효용을 길러 경제적으로 당당하게 홀로서기에 성공할 때만이 비로소 시대의 제물로 전락하지 않을 것이다.

 

신문을 봐도 경제면은 소홀히 읽는 나는 저자의 지적이 듣기 거북하면서도 왠지 뜨끔했다.

대체 경제하면 어디부터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용어부터가 모두 생소하고 어려워서 슬쩍 외면하기 일쑤였다.

이것저것 재테크 관련 서적에 시선을 돌려보지만 참 엄두가 안 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에 대한 현실의 중요성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경제학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라는 저자의 설명처럼 이제 막연함보다 구체적으로 집중력을 가지고 흐름을 배우고 살펴봐야겠다.

무지하기 때문에 과용을 부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더 큰 공포로 과장되게 상황을 파악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경제학에 여자와 남자가 따로 있을 수 있겠냐만 물론 “여자경제학” 안에 경제의 모든 것이 들어있지는 않다. 오히려 극히 기초적일 뿐이다.

단, “여자”와 “경제학”의 접근을 간절히 모색하고자하는 저자의 바램은 돋보인다.

얇고 편한 설명으로 물가까지 인도하고 있지만 이제 물을 마시려는 구체적인 방법과 행동은 여자들의 몫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경제학”은 좋은 시작을 함께 할 수 있는 자극은 될 것 같다.

 

“여자들이여, 남자보다 경제학을 믿어라!”

어쩌면 이 한 마디가 전체를 아우르는 시작이고 과정이며 결론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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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인간 1 - 북극성
조안 스파르 지음, 임미경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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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인간]은 우화, 역사, 전설, 종교, 철학, 판타지 등이 살짝 버무려져 있다. 그림소설로서 나무인간을 처음 펼쳤을 때 마치 배추인형처럼 생긴 나무인간의 모습과 그림을 보고 아기자기한 얘기려니 짐작하고 그리 기대했다. 그런데 웬결, 앙증맞은 얘기대신 피가 튀기고 복수와 증오가 페이지 곳곳에 배어있으며 죽음과 욕망이 생생히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두운 요소마저 그대로 담아, 몽환적일 것 같은 이야기는 현실과 맥이 닿아 독특한 느낌을 안겨준다.

밝게 빛나는 북극성을 지키는 알리트바라이 종족의 왕은 아틀라스 떡갈나무를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무를 쓰러뜨리려고 한다. 이유는 그 나무가 왕이 사는 성보다 훨씬 커서 아래를 내려다보기 때문이다. 급기야 불붙은 포탄을 쏘며 떡갈나무를 공격하는데 그 와중에 나무인간의 친구들마저 잡혀가고 만다. 나무인간의 친구들이란 유대 카발라 신비학자인 엘리아우 할아버지와 엘리아우가 만든 진흙인간 골렘, 그리고 아틀라스 떡갈나무를 찾다가 우연히 만나 얼떨결에 친구가 된 떡갈나무 수호정령 땅도깨비 카우카스 카카다. 나무인간은 그들을 구하러 떠났다가 역시 잡혀 갇히게 되는데 그로부터 오랜 시간 잠을 자게 된다. 잠을 깬 세상,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짐작조차 안 되는 때 주위는 분명 굉장한 일들이 있었던 거 같다.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어둡고 축축한......알리트바라이 종족은 죽어 시체로 쌓아있고 유령으로 떠도는..........대체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이야기 곳곳에는 왠지 낯익은 이야기 그림자를 만난다. 피리를 불어 꼬마 알리트바라이 유령들을 불러 내는 대목에서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언뜻 떠오르고 자신의 혀를 잘라 자연의 야만적 모습으로 살아가는 괴물들에게 언어를 가르쳐야 하는 사명을 받아 끝내 그들에게서 갈가리 찢기는 죽음을 맞는 카카에게는 선지자적 운명 그대로였다. 그 뿐인가? 자고 일어나니 성장해서 변화를 느낀 카카는 자신의 커진 성기를 보며 좋아 어쩔 줄 몰라 한다. 즉, 제대로 싸워 본 적도 없으면서 자신은 강한 전사라는 믿음이 솟구치는데 그야말로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하고 정의내리는 일반적인 남성성을 상징하는 듯하다. 역시나 여성성은 어떤 모습으로 비치나? 나무인간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들을 도와주는 무리는 바로 늙은 요정들이다. 특히 그를 끝까지 떠나지 않고 맴돌며 돕다 생을 마감하는 늙은 요정은 처진 가슴과 볼품없는 날개를 지닌 할머니다. 육체는 사그라지고 간신히 제 기능을 유지하더라도 모성애만은 애틋하게 불을 밝히나보다. 혹, 작가가 세 살 때 엄마를 잃었다는 대목을 보면, 그를 돌 본 존재는 젊고 건강한 어머니가 아닌 그런 할머니였을 것 같다는 추측도 가능하리라 본다.

나무인간의 매력적인 요소라고 할지 교훈이라고 할지 딱히 결론내리기는 어렵지만 나무인간에게는 세상의 법이며 규칙, 역사, 철학 따위는 어렵고 복잡하며 그래서 관심이 없다. 그냥 엘리바우가 선물한 기타를 치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면, 자기의 취미인 죽은 나무 조각을 주워 다가 상상력을 발휘해 세상에 하나뿐인 가구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선사할 수 있다면 (아쉽게도 그가 선물한 가구에 친구들은 반응이 없다. 당연하다. 말을 아예 못하고 나무들에게 특별히 가구가 필요하지도 않으니 어떻게 표현을 하겠는가?), 식사 때가 되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친구들과 나누어 먹고 나른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비록 느리기는 해도 엘리바우가 빌려주는 책을 읽고 그 재미나는 카달로그 속에 푹 빠져 세상 물건들을 상상할 수만 있다면 더한 행복이 없다. 어쩌면 작가는 인간이 나무처럼 살기를 바랬던 건 아닐까? 그래서 나무의 속성을 닮은 나무인간을 만들어 그들처럼 사는 단순함 속에도 얼마든지 평화로운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우화를 우리에게 넌지시 속삭이는 건지 모르겠다. 그의 멋들어진 그림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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