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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깨비 신이 돌아오도다 도트 시리즈 4
위래 지음 / 아작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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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작' 도트 시리즈! 네 번째 이야기. 위래 작가의 『허깨비 신이 돌아오도다』(2024)를 읽었다. 서평단으로 참여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작품이기도 했는데 일단 표지부터 노란색이라 마음에 들었다. 귀여운 도깨비 픽셀까지. 사실 이 작품이 궁금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허깨비 신'이라는 게 대체 무엇일까, 감조차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목은 참 발랄한데 내용은 심오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노란색에 안심하지 말걸 그랬나! 생가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었다.

작가의 말을 보면 '되먹음 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내용 상에 등장하는 바가 있으나…… 작가가 다소간 신경을 쓴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사실 '되먹음 말'에 관해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소설 속에서 '감응관'으로 등장하는 초점 화자 '시운'의 기능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다. 시공간의 기억을 읽는다는 설정의 '감응관'이라는 존재부터 재미있다. 어쩐지 '치트키'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놓칠 수 없는 재미 포인트. '시운'은 이것으로 인해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받기 때문이다.

'시운'이 감응할 때마다 묘사되는 장면이 재미있었다. 작가의 작법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미리 장면을 전개해놓고 그것을 뒤엎는 방식으로 썼을까? 그것이 아니면 처음부터 뒤엎어 놓은 채로 쓰기 시작했을까? 읽는 데에 약간의 수고로움이 있기는 하지만 불편한 독서 경험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었다. 되먹음 말처럼 문자를 되감아 읽는 신선함 때문일까? 읽고 싶은 텍스트의 향연이었다.

'시운'과 '나연'이 쫓기는 대목은-과장 보태서-숨을 헐떡거리며 볼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여기저기서 총성이 울려 퍼지고 공안들이 픽픽 쓰러지는 장면을 상상하니까 현장감이 느껴져서 좋았다. 다 좋았지만…… 나에겐 딱 한 가지 아쉬움이 남았다. 나는 '이도'라는 캐릭터가 너무 좋았는데. '나연'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도'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앞서 '이도'와 '시운'이 쌓아온 유대감이 무색할 정도로 일순간 일이 발생했던 터라 어떻게 수습할 수는 없겠으나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헛헛함이 들었던 캐릭터 갈무리였던 것 같다.

여러 인상적인 장면들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간다. 소설의 결말 부분이 특히나 강렬하게 여운을 남겼다. 소설에서 '되먹음 말'이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시운'과 상황과 다른 인물들이 수거되며 자리를 찾아가는 마무리가 인상적이었다. 아주 오래 고민하여 쓴 느낌이 들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비록 이 소설을 100%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조금 더 길게 소설을 볼 수 있었으면 충분히 그렇게 했을 것 같다는 생각 역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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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디 인 더 미러 도트 시리즈 3
황모과 지음 / 아작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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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작' 도트 시리즈 세 번째 이야기. 황모과 작가의 『노바디 인 더 미러』(2024)를 읽었다. 흠, 황모과 작가의 이름은 내게 익숙한 편이다. 『서브플롯』(2023)이나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2023) 등 다양한 SF적 실험을 한 작가로 알고 있다. 이것을 '실험'이라고 재단해도 될는지 알 길은 없겠으나…… 황모과 식의 SF는 과감할 정도로 '약한 것들'의 편이라서 재미있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영문(텍스트 자체는 그렇지 않지만) 제목을 선택했는지에의 의문은 일지만. 아무튼. 표지부터 끌렸던 작품이고 내용 역시 범상치 않았다.

많은 이야기가 나눠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중 인격 서사일까 의심하기도 했는데 내 기대 이상으로 복합적인 서사를 다루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렇게까지 많은 이야기를 200페이지 안으로 할 수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명료하고 흥미진진했다.

여성 서사로 읽을 수 있다. 작품은 삶에의 의욕을 잃은 연구원 '이혜'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뇌사 판정 이후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남편 '영일'을 달가워하지 않는 듯 보이는 이 여성은 뒤로 갈수록 대담한 행보를 보인다. '영일'의 뇌사 판정에 연구원으로서 그녀가 개입되었다는 점도 등골이 으스스해지는데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뇌사 이전의 '영일'은 작품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타인과 '공존'하기로 결심한 '이혜'의 그릇과 회복 이후 '제삼'이 된 '영일'이다. 정확히는 '영일'이었던 '제삼'이겠지만.

나는 작품이 '존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 거울에 있는 내가 '나'가 아닌 어떤 것, 어쩌면 내가 선택한 '다른 모든 존재'라면? 나의 인격은 사본에 불과하다면? 어지러운 문제다. 사실 실제로 작품 속 사건과 닮은 일이 벌어진다면 사회는 당연히 엉망진창이 될 테지만 소설 속에서나마 그릴 수 있다면 상황은-관망하기로서는-재미있다. 작품이 자꾸만 중요하다고 짚어주는 것을 우리는 놓치면 안 되는데, 소설이 짚어주는 '중요함'에는 이런 것도 있다. '사본과 원본으로서의 인격'이 그렇다. 복잡하지만 이건 꽤 생각할거리인 것 같다. '독립된 사본'이라는 개념이 영 낯설긴 해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삶을 '선택'하는 과정이 사본의 주체적 의지로 작용한다는 설정이 괜찮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혜'처럼 누군가와 공존하며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시작은 어땠을지 몰라도 '내가 무엇이 됨'은 내가 정할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이혜'와 '주희'의 관계가 좋았다. '제삼'의 선택들을 관찰하는 여정 역시 재미있었지만 작디작은 설정들은 뒤로하고…… 나는 연구원이었던 '이혜'와 버려진 카데바였던 '주희'가 맺는 연결감이 인상적이었다. '이혜'는 내적으로 자아가 버려진 상태였고 '주희'는 외적으로 그것이 버려진 상태였다는 점, 둘은 서로의 의지로 인해 연결되었고 종내 '공존'하기를 선택했다는 점이 말이다. 이렇게 따뜻한 여자들의 이야기라니. 자아를 공유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건 독자인 나 역시 이들과 함께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착취하지 않고 그릇됨 없는 테두리 안에 존재하며 서로의 존재를 독립적으로 인정하는 것. 그렇게 공존하기를 약속하는 사회. 약자들이 꿈꾸는 세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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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턴 익스프레스 실버 딜리버리 도트 시리즈 1
이경 지음 / 아작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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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작' 도트 시리즈 첫 번째 이야기. 이경 작가의 『웨스턴 익스프레스 실버 딜리버리』(2024)를 읽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형광 컬러의 표지가 인상적이다. 처음에는 몰랐다. 우측 상단의 픽셀이 손전등이 아니라 '분유'였다는 사실을! 책을 뒤집어 시놉시스를 보면 더 재미있다. "의족을 끼고 매일 저녁 필라테스를 수강하는 71세 실버 택배원. 24년 무사고 택배 경력을 자랑하는 귀자는 과연 오늘 밤 아기를 무사히 배달할 수 있을까?"라니. 생뚱맞다고 느껴질 정도로 읽기 전에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귀자'는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 '선희'의 손녀 '다인'가 아프자 갓난아기인 '다인'을 가까운 도심 병원으로 데려다 주기로 한다. 문제는 오늘이 '마적'들이 활개를 칠 정도로 어두운 '그믐'인데다 경찰 인력이며 소방 인력이며 도심에서 발생한 모종의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그들 중 누구도 두메 산골의 응급 사건에는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귀자'는 대기업 '웨스턴 익스프레스'의 '실버 딜리버리' 배달 기사로서 자신의 트럭을 한 대 보유하고 있었다. 비록 할부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귀자'는 대기업의 기술로 안전을 보장하는 트럭 안에 '다인'을 싣고 멀고 험난한 길을 떠난다. 그러던 중 '귀자'는 각종 사건 사고에 휘말리게 된다.

'귀자'의 스펙타클한 모험이 누군가에게는 게임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다. 실제로 소설은 그녀의 험난한 여정을 매우 아찔하게 묘사하곤 했다. 그렇다고 작품이 마냥 유희적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노인 화자 '귀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아기 '다인'을 응급실로 데려가고자 노력한 과정에서 인물의 집요함이 휴먼 다큐처럼 억척스럽기도 했기 때문이다.

'귀자'는 '다인'이 자신의 손녀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생존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자신이 맡은 소임을 다하려는 '귀자'의 모습은 어쩐지 약자를 보호하려는 약자의 표상처럼 느껴져 애처롭다. 그렇다면 '귀자'는 무엇을 지키려고 이렇게 애를 썼던 걸까? 색이 바래고 물렁해질 정도로 줄기차게 쓰고 다닌 '귀자'의 웨스턴 익스프레스 빨간 모자를 떠올려 본다. 그녀가 지키고자 한 것은 쓸모를 위한 삶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교육 강사가 내던진 토끼를 안쓰러워한 시점부터 그것은 시작되었다고.

'귀자'는 직접적으로 그러한 상황을 겪기도 한다. 난데없이 야생 동물을 만나거나 마적의 공격을 받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 작가의 말에서 보았는데 작가는 '영웅'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소설을 다 읽고 보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귀자'는 약자들의 영웅이었다. 본인도 약자이면서 말이다.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얻어내고 싶은 최소한의 삶. 스포츠 스타 '톰 고든'의 사인이 담긴 모자는 '귀자'가 누군가를 구할 새로운 영웅임을 예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에게 당도했다.

노인 화자를 내세워 이야기를 쓰는 건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해당 소설은 노인 화자 영웅담을 잘 담아내려고 노력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정확히 평가하기는 힘들지만…… 확실한 건 독자인 내가 '귀자'의 위험천만한 여정을 함께 걱정하고 동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 정도. 안전하게 '다인'을 병원에 데려가겠다는 '귀자'의 의지와 함께하게 되었다는 것. 이미 거기서부터 나는 '귀자'의 팬이 되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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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지 마! 왕재미 1 - 지구 온난화는 진짜야? 가짜야? 속지 마! 왕재미 1
다영 지음, 유영근 그림 / 창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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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우리 집에는 창비 청소년 소설 시리즈로 가득 채워진 책장이 있었다. 조금씩 그것들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이야기에 흠뻑 빠지곤 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그렇게 깨닫게 되면서 나는 그보다 더 큰 세계와 조우할 준비를 마쳤던 것 같다. 어른이 된 지금 그것들은 가물가물한 기억으로나마 겨우 내 머릿속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창비를 떠올릴 때마다 알듯 말듯 한 애틋함으로 반가워지곤 한다.

내가 어릴 때에도 어린이를 겨냥한 동화 시리즈가 많았다. 가령 『윔피키드』 시리즈가 그런데 점심을 먹고 난 뒤 도서관에 가면 아이들이 이미 다 빌려 가고 내가 볼 것은 남아 있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이후로 시간이 지났다. 나는 어른이 되었고 어른이 쓴 '그냥 소설'을 읽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동화는 읽을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대다수의 어른이라면 나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어른인 내게 동화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재미'의 영역이다.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심각하게 받아들일 내용들도 많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책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 구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선했기 때문이다.

『속지 마! 왕재미』(2024)는 실제로 초등학교 교사인 작가가 쓴 신작 동화 시리즈다. 학습 만화와 줄글 형식이 혼합되어 있어 아이들의 관심을 모으기 꽤 적합한 것 같다. 유영근 작가의 그림체도 정말이지 아기자기하고 글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머러스함도 책의 재미에 한몫을 한 것 같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학습 만화와 '왕재미의 수사 일지'와 같은 특별 정보문은 '왕재미가 악당 개구라를 찾아 떠난다'라는 단순한 스토리텔링이 가지는 구조적 단순성에 구멍을 메워 이야기의 완성도를 높였다. 아이들은 탄탄한 스토리 라인과 인물 특성 그리고 곳곳에 배치된 정보문과 카툰을 보면서 작가가 전달하고픈 내용인 '지구 온난화에 관한 가짜 뉴스 파헤치기'를 유심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판적 사고력과 과학적 탐구력은 물론 기후 변화에 관한 구체적 정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여 크고 작은 정보들로 혼탁해진 시대에서 스스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다.


『속지 마! 왕재미』에는 인간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동물과 곤충의 일이다. 다만 모든 사물과 현상이 인간 사회의 그것으로 치환할 수 있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이를테면 라이어 시티 경찰서를 살펴볼 수 있다. 라이어 시티 경찰서에는 주로 몸집이 큰 동물들이 많다. 하마, 코끼리가 그렇다. 이들은 환경 문제에 둔감하고 사무 공간을 청소해 주는 곤충 청소부에게 일말의 고마운 감정 따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까 라이어 시티에서도 위계가 있다는 논지인데, '왕재미'가 불시착한 지구에는 인간이 아닌 동물과 곤충들만이 실거주민이었고 곤충은 하층민에 불과한 설정인 것이다. 곤충은 작아도 너무 작아서 그들의 민원은 제대로 접소조차 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몸짓은 경찰서 소속 청소부가 되어 동물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뿐이다.

'왕재미'라는 캐릭터는 강인한 캐릭터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개구라'에게 우주 반지를 빼앗기는 모욕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늠름했던 신체가 작고 볼품없는 '개미'로 바뀌어 버리는 굴욕까지 당한다. 그러나 '왕재미'는 전혀 굴하지 않는다. 노을을 보며 새롭게 다짐한다. 작아진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무엇이든 해내겠다고. 이 대목은 여러모로 중요해 보인다. 어른인 나로선 몸집이 작아진 '왕재미'가 얼른 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게 전부지만 아이들은 조금 다르게 생각할 것 같아서였다. 작아진 신체는 아이들과 닮아 보인다. 작은 몸으로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왕재미'가 라이어 협정을 파기시키기 전 경찰서에서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사무실에 가득 쌓인 먼지를 터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왕재미'가 구름처럼 일어난 먼지 떼에 둘러싸여 빗자루를 떨어트리고 주저앉아 연신 기침을 하는 장면이 후속할 사건을 예견하는 복선으로 등장했다는 점은 물론 그러한 장면에서 인간 사회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왕재미'는 동물 경찰들이 떨어트린 과자 부스러기 하나에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위태로운 작업을 하고 있다. 어른들은 이미 지나왔기에 이해할 수 없는 어린이들의 세계처럼 복잡하다. 동물 경찰들은 곤충들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 자신들에게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알아도 못 본 척할 뿐이다. 다만 작은 곤충들에게는 커다란 사건이다.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위태로운 세계를 가지고 있듯 '왕재미'와 곤충 친구들 역시 전쟁 같은 사무실 안에서 매일같이 모래바람을 맞으며 소임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칭찬해 주지 않는 세상에서 말이다.

강인한 정신력에 더해 '왕재미'라는 캐릭터의 매력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면모가 있다면 바로 '다정함'일 것이다. '왕재미'는 사기꾼 '개구라'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인 연구원 '청설모'와 동물청렴위원회장 '고영희'로부터 개구리 반지를 회수한다. 개구리 반지가 벗겨지면 번뜩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피게 되는데 이것은 이들이 '개구라'의 꼬임과 세뇌로 정신이 조종되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건 '왕재미'의 태도다. '왕재미'는 반지가 벗겨지는 과정에서 이들이 다치지 않았는지 살피며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들의 식은땀을 닦아 주기까지 한다. 나아가서 '왕재미'는 자책하는 그들에게 사기 피해가 그들의 잘못이 아님을 똑똑히 일러준다. 같은 방식으로 '개구라'에게 사기당한 자신의 모습을 그들을 통해 엿보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소설은 화자 '왕재미'의 말과 행동(태도)으로써 진실을 향해 전진하는 용감함을 가르쳐 주면서 그와 동시에 어떤 태도로 사건의 피해자를 다루어야 하는지까지 잘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의 가장자리에 있는 이름 모를 캐릭터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싶다. 바로 '친절한 (버스) 운전기사'의 일면이다. 버스 기사는 동물들로 꽉 찬 버스 안에서 교통카드가 없어 어쩔 줄 몰라 두리번거리 '왕재미'를 위해 무료로 탑승을 허용하는 것은 물론 두 번씩이나 그만을 위해 안전한 좌석을 마련해 주는 등 선행을 베푼다. 소소하지만 버스 기사의 친절함이 묻어 나온 대목을 읽으며 나는 조금이나마 편안해졌다. 이 글을 읽는 아이들이 어둠 속에서도 햇살 같은 누군가의 친절을 발견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속지 마! 왕재미』는 흥미로운 과학 동화 시리즈이다. 아직 첫 번째 이야기를 읽은 게 전부지만 기회만 된다면 후속 편까지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술술 읽히는 문장들과 위트 넘치는 묘사 그리고 재미있는 만화까지 놓칠 게 없는 과학 동화 『속지 마! 왕재미』를 강력 추천하며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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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계간 창작과비평 1년 정기구독 (2024. 봄 ~ 2024. 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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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민정, 「왜 귀신의 공공성인가?」- 다산과 우리 담론의 모색

'K-담론을 모색한다' 첫 번째 이야기. 가톨릭대 철학과 백민정 교수의 논고를 읽었다. 정약용 철학을 깊이 있게 다루었다고 말하기에는 내가 아는 바가 적어 함부로 이를 수 없다. 그러나 논고에서 저자가 중요시한 논지가 무엇인지는 대략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논고를 읽으며 서구 근대성의 폭력 전혀 예감하지 못했던 다산이 서학을 기반한 실학자이면서 동시에 상제, 천신 그리고 인귀와 같은 귀신에 집중했다는 저자의 포착이 흥미로웠다. 다산에게 '인귀'란 조상의 혼령을 의미하는데 핵심은 "그가 염두에 둔 상제와 귀신은 단순히 개인적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 국가의 제사의례에서 섬김과 공경을 받는 대상이라는 점"이며, "(다산의) 귀신설은 왕조의 정치적 기획 및 운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즉, 결과론적으로는 보수적인 관점에서의 해석이었다는 점이다. 다산이 생각한 상제를 비롯한 천신 그리고 인귀는 군주(군목)과 신민과 대응하며 이것은 천상의 세계와 세속적 조정이 일종의 은유가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저자가 지적한 "귀신의 공공성"이다. 즉, 다산이 귀신을 수단화함은 그것의 "공적 가치"를 헤아렸기 때문이다. 다산은 "상제가 명령한 공과 덕을 천신(들)이 수행하듯이, 지상의 군목도 그러한 공덕을 수행함으로써 천신과 상제에 배향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산의 귀신설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던 나는 그의 논지가 매우 설득력 있으면서도 정통적 의미의 보수적 개혁론자의 주장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에서 언급한 주장의 핵심을 제외하고서도 다산은 기타 두 가지 사항을 추가로 강조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의례에서 공경 받는 귀신은) "섬길 만한 (공덕을 갖춘) 귀신"이어야 하며 둘째, 제사의 주관자들인 군목과 후손들 역시 "스스로 공덕을 쌓아야 제사에 임할 수 있다".

p326-327 참고.

까다롭다고 느껴지기까지 한 조건은 아이러니하게도 불가해한 영역으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다산에게 있어 귀신은 전술했듯 현실의 정치적 운영을 수리하기 위한 공적인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제사는 가장 공적인 존재인 천, 즉 상제와 상제의 명령을 수행하는 천신들 그리고 인귀들의 덕성과 공로를 공적으로 기리는 의례"로, "인간에게 제사는 가장 공적이고 덕스러운 귀신의 능력을 본받는 것이며, 후손에게는 이런 공적 존재의 가치를 잊지 않게 교육하는 일이다. 일상 속 제사의례는 모범이 되는 귀신의 공공성을 계승하는 자발적 행위"이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서 나는 다산의 인상적인 사고를 문장으로 남기고 싶다.

다산은 상제가 흠향하는 인간의 덕과 사특함은 모두 형체가 없는 것이며 형체있는 것의 좋은 냄새나 악취는 상제에게는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육신을 가진 인간은 형체있는 것의 모습을 보고 냄새를 맡으나, 상제는 오직 무형한 덕의 향기와 악의 더럽고 역한 악취만 판단할 따름이다. 오직 공덕만이 귀신이 흠향하는 무형의 제물이다.

p326.

관련이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매번 명절이면 제례와 관련해 시끌시끌한 뉴스가 들려왔던 것이 생각난다. 어떤 음식을 올리고 누가 그것을 담당하며 어떻게 진행해야 함에 관한 문제 등등. 조상의 혼을 섬기는 것이 핵심일진대 그것과는 조금씩 먼 여럿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탕국 대신 마라탕을 올리든 멜론 파이를 올리든 유형의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다만 그것을 올리는 우리의 무형한 덕만을 그들이 흠향하리란 사실을 깨우쳐주는 것 같다.

한 가지 더. 다산의 논지에서 재미있었던 점은 그가 "효는 부모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부모의 책무와 함께하는 상호적이고 호혜적인 관계 원리"라 밝힌 점이다. 그는 『다산시문집』 권10에서 이렇게 썼다. "아버지가 자애롭지 않으면 아들이 원망해도 되는가? 아직 안 된다. 그러나 자식이 효를 다했는데 아버지가 자애롭지 않아서 마치 고수가 순임금에게 한 것(*『맹자』에서 순임금의 아버지 '고수'가 살인했을 때 순임금과 그 신하인 '고요'가 이것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묻는 가상의 질문이 등장하는데 순임금은 아버지 고수에게 극진히 효를 다했으나 고수는 그를 자애롭게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학대하고 죽이려고까지 했다.)처럼 한다면 부모를 원망해도 된다. 임금이 보살피지 않으면 신하가 원망해도 되는가? 아직 안 된다. 신하가 충성을 다했는데도 임금이 보살피지 않기를 마치 회왕이 굴평에게 한 것처럼(*전국시대 초나라의 충신 굴평(굴원)은 당시 회왕의 총애를 받던 '근상'의 중상모략으로 인해 축출되었다.) 한다면 임금을 원망해도 된다."(「원원」). 다산은 "유학적 관계 원리"를 부모와 자식이라는 가족 관계에서 군신과 신하라는 사회적 관계로 확장한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흥미를 느꼈다. 덮어놓고 자식이 부모를 섬김을 유교적 정도라고 나는 믿어왔고 그것이 대표적인 유교에의 오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모가 견딜 수 없으리만큼 나를 아프게 한다면 나는 하늘에 나의 불행과 좌절된 운명 그리고 원죄를 읍소할 것이 아니라 나를 아프게 한 그 부모를 원망함이 맞다고 아마도 많은 이를 위로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해서. 한 가지 찝찝한 구석이 있다면 이것이다. 다만, '최선을 다했을 때'라는 전제가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말이다.

다산은 부모와 자식 관계가 "사적 친밀함만의 대상이 아니"며 우리는 본능적으로 부모에게 효심을 느끼지도 않고 똑같이 마음을 베풀어봐야 부모에 대한 효심 역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교를 생각하면 갑갑하기만 했는데 다산의 논지로 들은 그것은 조금 달랐다. 유학자들은 "부모에 대한 효심을 부모에 한정하지 않았"고, 부모에의 효도란 모름지기 "부모가 사랑하던 이들까지 돌보고 살피는 것"이라 말했다는 것이다. "국가의 태학(성균관)에서, 지방 향교에서, 문중에서 노인과 연장자를 돌보고 고아를 함께 먹인 것은, 효제의 가족적 원리를 일상의 공동체로 확장한 사례"라고 한다. 한 마디로 진정한 의미에서 부모를 이해하고 그에게 효를 다하는 것은 부모의 몫을 헤아리며 그것을 몸소 행하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효제 관계가 사적인 친밀함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다산은 정확한 의미의 사회적 공공성을 보이기 위해 효를 가져온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이 논고에서 가장 크게 와닿았다. 우리가 사회에 내보이는 '명덕'은 소소하지만 명확한 의미가 되며 그것은 나를 포함한 모든 사회 구성원이 '함께 누리는 큰 기쁨'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족이란 "단순히 혈연으로 연결된 생물학적 집단이 아니라 좋은 가치를 공유하고 함께 지켜나가는 공동체"라는 것을.

다산은 조상에게 바치는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오직 명덕(明德)만이 향기롭고, 귀신은 오직 명덕만을 흠향한다고 말한다. 이때의 명덕이란 허망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느끼는 큰 기쁨, 환심을 의미한다. 나의 명덕은 곧 귀신이 좋아하고 흠향하는 공덕이다. 귀신이 좋아하는 것은 친애함과 공경함, 보살핌을 확충하여 우리가 함께 기뻐하는 큰 환심이다.

p331.

유교적 근대성론으로 정약용의 논지를 밝힐 수 없음이 저자의 입장이었는데 나는 그보다 이후의 기술이 흥미로웠다. 현실 세계의 입장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해당 논고는 배경지식이 없는 나로선 조금 읽기 힘든 글이긴 했다. 그러나 한 시간 가량 꼼꼼하게 논고를 정독하고 나서 든 생각은 단순하지만 명확했다. 3월에는, 봄에는 이런 글을 읽어 참 좋다. 처음 읽는 계간 창작과 비평에서 이런 글을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고.

2.

이하나, 「보슬피 편집론」 - 김이구, 『편집자의 시간』, 나의 시간, 2023.

p441(촌평)

나는 출판 기획편집자를 희망하는 변방의 문학(호소)인 중 한 명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문예지를 읽어본 적이 거의 없다. 반성할 일인가 싶다가도 못내 반성하게 된다. 편집자라면 다양한 글을 읽어야 할 텐데 쓰고 읽는 사람이면서 많은 걸 놓치고 살았던 것 같아서. 학교에 있을 때는 도서관 측에서 자체 구독하는 문예지(를 포함하여 잡다한 종류의 많은 지면들)를 종종 읽곤 했었다. 문학동네나 과학동아 정도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나의 관심은 한정적이었다. 주로 신작 시 부문만 빠르게 읽고 그만두는 정도. 그게 다였다. 이하나 편집자 겸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의 기고문을 보고 내게도 변혁의 바람(wind of change)이 필요하다는 게 느껴졌다. 언제까지 이 마음을 붙들고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

나에게 존경하거나 닮고 싶은 편집자는 없다. 아는 사람이 없는 건 물론이고 편집자란 본래 크레디트 속 이름들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편집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친절하게 현직자가 관련 업무나 지식을 설명한 출판물을이 많다. 그런 걸 보아도 그렇다. 편집론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보다 더 많이 존재할 편집자는 내 앞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말이다. 아무래도 나는 주로 쓰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닐지도 모르고.

김이구의 해당 저서는 편집 시 교정 지식과 어문규범뿐 아니라 편집자라면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태도와 일상적으로 쓰면서도 무심히 넘겼을 법한 출판 상식이 실려 있다고 한다. 나는 기고문에서 해당 저서와 관련해 실린 인용구가 가장 흥미로웠다. 저자는 『편집자의 시간』에서 김이구 선생이 쓴 문장을 인용했다.

하급 편집자는 문장 전체를 뜯어고치는데, 중급 편집자는 문장 절반을 뜯어고친다. 상급 편집자는 지시 대명사 하나를 추가하거나 조사를 바꾸거나 문장부호 하나를 수정해, 필자의 문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오문을 바로잡고 의미를 명확하게 한다. (…) 상급 편집자의 수정은 편집자가 실토하지 않는 한 심지어 필자가 수정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다.

(본문 48~49면).

저자가 참 똑똑하다고 느껴졌다. 이 인용구를 보고 나서 이 책을 당장 장바구니에 담았으니 말 다 한 셈이다. 나는 어디쯤일까, 하급 편집자라는 명함마저 달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상급 편집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들었던 짧은 인용구였다. 나 역시 누군가 내 글을 고쳤을 때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적이 있었다. 한참 뒤에 알았던 사실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상급 편집자의 자질이 풍부했던 인물이었을지도.

자신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그것을 피력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에 출판 편집자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나 같이 목소리가 작아서 타인이 몇 번이고 되물어야 제대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숨는 게 부끄럽지 않다. 글과 책 속에서 편안하고 어딘가 이름이 남겨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행복이 될 테니까. 나는 쓰는 사람이면서 읽는 사람인데, 읽는 사람이기를 더 호소하는 편이긴 하다. 그래서일까. 쓰면서 자주 부끄러웠던 기억들이 머리를 스친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라는 표현은 부덕해 보인다. 나는 조용히 읽고 싶다. 필자조차도 가장 거대한 독자가 바로 자신의 뒤에 있음을 잊어버릴 수 있도록. 곰 같은 독자가 되고 싶다. 한편으로는 여우처럼 예리함을 숨기지 않고 싶기도 하다.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처럼 시시때떄로 모습을 달리하는 '고성능(?)'의 편집자가 되고 싶다.

3.

박상수,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다, 시 속에서라도」- 민구(『세모 네모 청설모』)와 황유원(『하얀 사슴 연못』)

p417(문학초점)

여러 시집을 읽으며 각 시인의 특성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는 게 내 수준에서 옳은지 잘 모르겠어서 입을 다물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시론을 쓰는 것만큼 시 비평을 쓰는 게 힘들다. 작품이라면 개별적으로 특별함을 입증할 수 있지만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조금 버겁다. 그런데 그것을 해온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은 묘하게 중독적이고 또 납득이 간다. 문학장에서 온갖 풍파를 맞은 사람들의 이야기라 그런지 선조들의 말씀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읽게 되는 게 그것이다. 나는 이 기고문에서 요즘 젊은 시인들의 특징을 언급한 부분이 재미있었다. 말 그대로 '재미'가 있었다. 시집을 읽을 때 별 생각이 없었는데 누군가 콕 집어서 말해주니 나름대로 그 맛이 있다고 해야 하나.

저자는 "'자아의 비현실감' 상태를 지나서 '자아의 가상화'나 '자아의 메타화'로 연결되는 경향이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맞는 것 같기도. 몇 년 전부터 우리는 각종 '부캐'에 노출되어 왔다. 실존적 부캐를 넘어 비실존적 부캐들도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외계인이고 동물이고 가리지 않으며 심지어는 혼종도 발생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미 인간의 범주에서 탈주하기를 거리끼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꾸만 시도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다. '되고 싶다'는 생각은 특히 시에서 유력하게 드러난다. 아무래도 시는 그것 자체로 자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고 다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 혹은 '나'를 '나' 아닌 어떤 대상으로 메타적으로 비출 수도 있는 노릇이다. 내가 '나' 같지 않은 현실 때문일까. 나이기를 포기하는 것, 내가 '나' 같지 않게 어딘지 어색해 보이는 것, '나'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변하고 싶은 것 등등. 그래서 "현실에서 자아의 성장을 위해 무언가를 시도해볼 구체적인 경험의 기회나 가능성이 상당 부분 막혀 있으니 현실감 없이 약화된 자아를 가지고 실감이 흜해진 (그럼에도 리셋과 리플레이가 가능한) 가상공간에서 경험치를 출적하며 유희적으로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았다고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도 일리가 있다. 적어도 시에서는 그런 게 가능하다. 나가서 퍼지게 놀고 싶지만 돈은 없고 제대로 놀 줄도 몰라서 집안에 박혀 시를 쓰는 나처럼 말이다.

'착한 화자'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언젠가부터 '착한 화자'가 유독 많아졌다고. '못된 화자'들은 어디 가고 다른 이들만 남았냐고. 생각해보니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나는 나의 인성과는 별개로 못된 화자를 쓸 용기가 없다. 못 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는 게 정확하겠다. 고약한 말을 할 정도로 낭비적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을 때 받을 시선들이 곤란하기도 하다. 이건 정확히 '어느 정도로 못된' 화자인지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이 기고문에서 상당 부분 공감했다. 이러한 시류의 탄생에는 "'시 속에서라도 예측 가능하고 안전하며 평화롭고 싶다'는 욕망이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는 점을 말이다.

"상실감에서 오는 격렬한 멜랑콜리의 감정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상실감 그 자체에 현혹될 경우, 시적 파토스를 가장 강하게 확장시킬 수 있는 주요한 정서적 에너지원이 된다." 맞는 말 같다. 우리가 시를 쓸 때 가장 손쉽게 휘두르는 기술이다. 저자는 민구의 화자가 이것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며 의미를 되새긴다. "그러니까 시인은 뭔가 꽉 조이는 방식이 아니라 풀어놓는 방식으로 공간을 만들고 시 속에서나마 부담을 덜고 평안하게 존재하기를 선택했다고나 할까" 자아의 비대화는 흥미롭지만 때로는 버거울 때가 있다. 우리는 그처럼 심각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냥 그렇구나. 흐리멍텅하게 존재할 뿐이다. 나는 시를 쓸 때 자아의 비대화를 피하지 못하는 편이라서 이런 점이 오히려 흥미진진했다. 견딜 수 없으면 그냥 놔두자. 팔이 아프면 헬륨 풍선 실 손잡이를 그냥 놓자.

황유원의 시집을 논한 글 역시 재미있었다. 본래 황유원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주의 깊게 읽었다. 특히 저자가 "그의 시 안에서 우리는 현실의 잡다한 소음과 거리를 두고 부드럽게 보호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라고 표현한 부분에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마음 속으로. "그가 그려내는 소리와 이미지들이 편안함과 충족감을 느끼는 쪽으로 산뜻하게 최적화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내가 찾지 못한 표현 같아서 반가웠다. 묵언수행을 하며 "마치 신의 음성을 받아아 적는 수도자처럼 가청 주파수 이하의 작은 소리에 집중"하는 그의 시가 나는 좋다.

"존재의 소음을 '최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화'하는 쪽에 맞춰져" 있는 그의 시가 내게 무사평안하게 느껴진다. 저자가 인용한 황유원 시인의 말을 나도 한 번 실어보고 싶다. 나도 내가 즐거우려고, 휴식하고 싶어서 시를 쓴다고 생각한 적이 간혹 있기에. 안전하고 평화롭고 싶다. 아무도 건드리지 말았으면 좋겠으면서도 나는 조금 특이하고 싶다.

나는 나를 즐겁게 하려고 시를 쓴다.

누가 어디서 내 시를 읽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데, 아마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단 내가 즐거워야 한다.

시를 쓰는 동안만이라도 즐거워야 한다.

황유원, 「사운드 시론 스케치」, 『현대시』 2023년 2월호, 28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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