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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지 마! 왕재미 1 - 지구 온난화는 진짜야? 가짜야? ㅣ 속지 마! 왕재미 1
다영 지음, 유영근 그림 / 창비 / 2024년 4월
평점 :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창비 청소년 소설 시리즈로 가득 채워진 책장이 있었다. 조금씩 그것들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이야기에 흠뻑 빠지곤 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그렇게 깨닫게 되면서 나는 그보다 더 큰 세계와 조우할 준비를 마쳤던 것 같다. 어른이 된 지금 그것들은 가물가물한 기억으로나마 겨우 내 머릿속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창비를 떠올릴 때마다 알듯 말듯 한 애틋함으로 반가워지곤 한다.
내가 어릴 때에도 어린이를 겨냥한 동화 시리즈가 많았다. 가령 『윔피키드』 시리즈가 그런데 점심을 먹고 난 뒤 도서관에 가면 아이들이 이미 다 빌려 가고 내가 볼 것은 남아 있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이후로 시간이 지났다. 나는 어른이 되었고 어른이 쓴 '그냥 소설'을 읽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동화는 읽을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대다수의 어른이라면 나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어른인 내게 동화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재미'의 영역이다.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심각하게 받아들일 내용들도 많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책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 구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선했기 때문이다.
『속지 마! 왕재미』(2024)는 실제로 초등학교 교사인 작가가 쓴 신작 동화 시리즈다. 학습 만화와 줄글 형식이 혼합되어 있어 아이들의 관심을 모으기 꽤 적합한 것 같다. 유영근 작가의 그림체도 정말이지 아기자기하고 글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머러스함도 책의 재미에 한몫을 한 것 같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학습 만화와 '왕재미의 수사 일지'와 같은 특별 정보문은 '왕재미가 악당 개구라를 찾아 떠난다'라는 단순한 스토리텔링이 가지는 구조적 단순성에 구멍을 메워 이야기의 완성도를 높였다. 아이들은 탄탄한 스토리 라인과 인물 특성 그리고 곳곳에 배치된 정보문과 카툰을 보면서 작가가 전달하고픈 내용인 '지구 온난화에 관한 가짜 뉴스 파헤치기'를 유심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판적 사고력과 과학적 탐구력은 물론 기후 변화에 관한 구체적 정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여 크고 작은 정보들로 혼탁해진 시대에서 스스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다.
『속지 마! 왕재미』에는 인간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동물과 곤충의 일이다. 다만 모든 사물과 현상이 인간 사회의 그것으로 치환할 수 있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이를테면 라이어 시티 경찰서를 살펴볼 수 있다. 라이어 시티 경찰서에는 주로 몸집이 큰 동물들이 많다. 하마, 코끼리가 그렇다. 이들은 환경 문제에 둔감하고 사무 공간을 청소해 주는 곤충 청소부에게 일말의 고마운 감정 따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까 라이어 시티에서도 위계가 있다는 논지인데, '왕재미'가 불시착한 지구에는 인간이 아닌 동물과 곤충들만이 실거주민이었고 곤충은 하층민에 불과한 설정인 것이다. 곤충은 작아도 너무 작아서 그들의 민원은 제대로 접소조차 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몸짓은 경찰서 소속 청소부가 되어 동물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뿐이다.
'왕재미'라는 캐릭터는 강인한 캐릭터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개구라'에게 우주 반지를 빼앗기는 모욕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늠름했던 신체가 작고 볼품없는 '개미'로 바뀌어 버리는 굴욕까지 당한다. 그러나 '왕재미'는 전혀 굴하지 않는다. 노을을 보며 새롭게 다짐한다. 작아진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무엇이든 해내겠다고. 이 대목은 여러모로 중요해 보인다. 어른인 나로선 몸집이 작아진 '왕재미'가 얼른 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게 전부지만 아이들은 조금 다르게 생각할 것 같아서였다. 작아진 신체는 아이들과 닮아 보인다. 작은 몸으로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왕재미'가 라이어 협정을 파기시키기 전 경찰서에서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사무실에 가득 쌓인 먼지를 터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왕재미'가 구름처럼 일어난 먼지 떼에 둘러싸여 빗자루를 떨어트리고 주저앉아 연신 기침을 하는 장면이 후속할 사건을 예견하는 복선으로 등장했다는 점은 물론 그러한 장면에서 인간 사회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왕재미'는 동물 경찰들이 떨어트린 과자 부스러기 하나에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위태로운 작업을 하고 있다. 어른들은 이미 지나왔기에 이해할 수 없는 어린이들의 세계처럼 복잡하다. 동물 경찰들은 곤충들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 자신들에게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알아도 못 본 척할 뿐이다. 다만 작은 곤충들에게는 커다란 사건이다.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위태로운 세계를 가지고 있듯 '왕재미'와 곤충 친구들 역시 전쟁 같은 사무실 안에서 매일같이 모래바람을 맞으며 소임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칭찬해 주지 않는 세상에서 말이다.
강인한 정신력에 더해 '왕재미'라는 캐릭터의 매력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면모가 있다면 바로 '다정함'일 것이다. '왕재미'는 사기꾼 '개구라'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인 연구원 '청설모'와 동물청렴위원회장 '고영희'로부터 개구리 반지를 회수한다. 개구리 반지가 벗겨지면 번뜩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피게 되는데 이것은 이들이 '개구라'의 꼬임과 세뇌로 정신이 조종되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건 '왕재미'의 태도다. '왕재미'는 반지가 벗겨지는 과정에서 이들이 다치지 않았는지 살피며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들의 식은땀을 닦아 주기까지 한다. 나아가서 '왕재미'는 자책하는 그들에게 사기 피해가 그들의 잘못이 아님을 똑똑히 일러준다. 같은 방식으로 '개구라'에게 사기당한 자신의 모습을 그들을 통해 엿보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소설은 화자 '왕재미'의 말과 행동(태도)으로써 진실을 향해 전진하는 용감함을 가르쳐 주면서 그와 동시에 어떤 태도로 사건의 피해자를 다루어야 하는지까지 잘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의 가장자리에 있는 이름 모를 캐릭터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싶다. 바로 '친절한 (버스) 운전기사'의 일면이다. 버스 기사는 동물들로 꽉 찬 버스 안에서 교통카드가 없어 어쩔 줄 몰라 두리번거리 '왕재미'를 위해 무료로 탑승을 허용하는 것은 물론 두 번씩이나 그만을 위해 안전한 좌석을 마련해 주는 등 선행을 베푼다. 소소하지만 버스 기사의 친절함이 묻어 나온 대목을 읽으며 나는 조금이나마 편안해졌다. 이 글을 읽는 아이들이 어둠 속에서도 햇살 같은 누군가의 친절을 발견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속지 마! 왕재미』는 흥미로운 과학 동화 시리즈이다. 아직 첫 번째 이야기를 읽은 게 전부지만 기회만 된다면 후속 편까지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술술 읽히는 문장들과 위트 넘치는 묘사 그리고 재미있는 만화까지 놓칠 게 없는 과학 동화 『속지 마! 왕재미』를 강력 추천하며 서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