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각종 명사, 이름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곧 후에니키인은 이집트에 상형문자를 가져다, 알파벳을 만들었듯이, 한자를 가져다, 구개음으로 전해서,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그 초창기에는, 한자에 음을 딴 거도 있었고, 혹은 그 뜻을 딴 거도 있으니, <삼국사기>에 보인 사람에 이름으로는, 마립간을 지칭하던, '소지'. 일명 비처라 하면, 빛에 뜻은 소지로 된거고, 음은 비처로 된거, '소나', 일명, 금천이라 함은 뜻은 금천, 음은 소나로 된거고, 거칠부, 일명 황종이라 함은, 거칠위에 음은 거칠부, 뜻은 황종으로 된거고, '개소문', 일명, '개금'은 '신'에 음은 소문, 뜻은 금으로 된거고, 


'이사부', 일명, 태종은 '잇위'에 음은 이사부, 뜻은 '태종'으로 된거다. 

지명으론, '밀성', '추화'라고도 함은, '밀무'란 음에, 밀성, 뜻은 추화로 된거고, 

'웅산'. '공목달'로함은, '곰대'에 뜻은 웅산, 즉, 공목달로 된거고, '계립령', 일명, 마목령이라 함은 '저름<겨릅>'에 음은 계립, 뜻은 마목으로 된거고, '모성', '막성'이라고도 함은, '어미'에 뜻은 모나 음은 막으로 된거고, '흑양', '금물노'라고도 함은, '거물라'에 '거물'에 뜻은 흑이나, 음은 금물로 된거고, '양'이나 '노'는, 다, '하'에 음을 취한거다. 


관명으로는, '각간을 혹은 발한이라함'은 '불'에 뜻은, 각, 음으로 '발'로 된거고, '간'이나 '한'은 

다 '한'에 음을 취한거나, 부한은 군왕을 일컬었고, '누살'을 혹은 '도사'라 함은, '라'에 뜻은 도나 음에서 누로 된거고, '살'에 뜻은 '사', '음'으로, '사'로 된거니, '라살'은 지방장관을 일컬었고, '말한', '불한', '신한'은 삼신에서 근원한건데, 뜻으론, 천일. 지일. 태일로 되고. 음으론, 마한. 변한. 진한으로 된거고. '도가'. '개가'. '크가'. '소가'. '말가'. 는 다섯 대신에 칭호인데, '도.개.크.소.말' 등은 뜻으론, '가'는 음으론, '저가'. '구가'. '대가'. '우가'. '마가'로 된거다. 


이같은 자질구레한, 고증은 무슨 역사상에 큰 일은 되는가. 이건 자질구레한듯하나. 지지에 잘못도 이로써 바로잡을 수도 있고, 사료에 의혹도 이로써, 보충할 수도 있으며, 고대에 문학에서부터, 모든 생활 상태까지 연구하는 열쇠로 된다. 이를테면, 해모수와 유화왕후는, 만난 압록강은 어디던가. 현재에 압록강 때라 하면, 당시에, 부여에 서울이던 '합이빈'에선 너무 멀리 떨어져있고, 다른 곳이라면, 달리 또 압록은 없어, 그 의문을 깨뜨리진 못했더니, 첫 걸음에, <광개토호태왕>에 '비'에, 현재에, 압록강을 아리수라 하였음을 보고선, 압록에 이름은 '아리'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 


두번째론, <요사>에, '요흥종은 압자하를 혼돈강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 걸 보고선, ''압자'는 곧 '아리'여서, 즉, 대륙, 혼돈강 곧 송화강에 고대에 북압록강인가.'하는 가설을 얻었고, 다음에 <동사강목>, '고이'에, '<삼국유사>에, '요화', 일명, 압록이나 주희에 여진은 일어나, 압록강에 웅거했다.'고 한 걸, 들어서, '세 압록은 있다.'고 했음을 보고선, 송화강은 고대에 한 압록강이었음을 알았고, 따라서, 해모수 부부는 만난 압록강은 곧 송화강임을 굳혔다. 


<마한전>에는, '비리'를, 건륭제에 <삼한정류>에는, 만주에 패륵이나, 같은 관명으로 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삼한에 '비리'는 <삼국지리지>. 백제에 '부리'이니, '비리'나, '부리'는 다 '울'에 취음이고, 도회란 뜻이다. 마한에 비리와 백제에, 부리를 참조해보면, 마한에 '벽비리'는 백제에 '파부리'고, '초산도비리'는 '미동부'리고, '고랍비리'는, '고막부리'니, 비록 이 음은, 저 뜻도, 이역, 다른 해석은 있기는 하지만, 그 대략으론, 얻을 순 있을거고, 따라서, 조선, 관중은 싸우던 때에, 대륙, 산서성이나, 영평부에, '비이'에 '계'를 뒀으니, '비이'는 '비리', 곧, '울'에 대한 번역이다. 이에서 조선 고대에 '울'은 곧 

'산해관', '서족'까지에 이르렀음을 알 순 있겠다. 


그러므로, 자질구레한 고증은, 역사상에, 큰 일은 아니지만, 도리어 역사상에, 큰 일을 발견한 연장이란 하겠다. 만일 한 걸음 더 나아가선, <훈몽자회>. <처용가>. <훈민정음>. 등에선, 옛 말을 연구하고, <삼국유사>에 씌어있던, <향가>에선, 이두문에 용법을 연구해보면, 역사상 허다한 발견이라도, 있긴 할거다. 필자는 일찍, 이에 유의한 바 있었는데, 해외에 나간 후론, 한 권에 책을 얻기란, 도저히, 심히 어려워서, 10년을 두고, <삼국유사>를 좀 보았으면, 했으나, 또한 얻어볼 순 없었다.                                   


4. <위조서>에 판별, 선택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태종에 <분서>와 같은 고대에 진귀한 책을 태워버린 때에는 있었으나. <위조서>를 

조작한 일은 별로 없었으므로, 근래에 와선 <천부경>. <삼일신고>. 등은 처음 출현했으나, 누구에 시비를 가리는 변박도 없이, <고서>로 인정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책은 각 씨족에 족보, 가운데서도, 그 조상에 일을 혹은 위조한게 있던 일, 이외에는, 그다지, 진위에 변별에는 애쓸 필요는 없었거니와, 우리와 이웃해 있는 대륙, 니폰, 두 나라는 전통에 대한 예로부터, 교제는 빈번했으니, 따라서, 우리 역사에 참고될 책은 적지 않지만, <위조서> 많기론, 대륙 같은 나라도 드물거니, <위조서>를 분간하지 못하면, 인용하지 않을 기록까지, 우리 역사에선, 인용하는 착오를 저지르기란 쉽다.


그렇지만, 그 거짓에는 구별은 있다. 하나는 거짓 중에 거짓이니, 이를테면, <죽서기년>은 진본은 없어지고, '위조작'은 나왔음을 앞에서 이미 말했거니와, 옛날 사학가들은, 늘 <고기>에, '단군은 요임금이랑, 함께, 무진년에 섰다.'고 한 글에 의해서, 단군에 '연대'(年代)를 알고자 하는 이는 항상 요 임금에, 연대에 비교하고자하며, 요 임금에, 연대를 찾는 이는, <속강목>에 고준한다. 대륙, 주소에 공화, 이전에 연대는, 대륙 역사가에, 대조라 할 만한, 사마천도 알지 못해서, 그에 <사기>연표에 쓰지 못했거늘, 하물며, 그보다도, 더 아득히 멂, 요 이금에 연대라.. 그러므로, <속강목>은 다만, 거짓된, <죽서기년>에 의거해서 적은 연대이니, 이제 <속강목>에 의거해서, 고대에 연대를 찾으려 함은, 도리어, 연대를 흐리게 한다.     


공안국에 <상서전>에는, '고구려 '한맥'이라는 구절을 인용해서, 고구려와, 삼한은 대륙에, 주무왕이랑, 교통했음을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사기>, <공자세가>에는, "'안국'은 현재, 황제에, 박사로 되었는데, 일찍 죽었다고." 했으니, '현재에 황제'는 대륙에, '무제'이다. 무제를 '현재에 황제'라 한 건, 사마천은 무제는 죽어서, 무제라는 시호를 받은 걸 못 봤기 때문이고, 안국을 일찍 죽었다.'고 한 건, 사마천은 생전에 안국에 죽음을 보았기 때문일거다. 


그렇다면, 공안국은 사마천보다 먼저 죽고, 사마천은, 무제보단, 먼저 죽었음은 명백한데, <상서전>에선, 무제에 아들인 '소제'시대에 창설한 '금성군'이란 이름은 있으니, 공안국, 그는 죽은 뒤에, 창설된 지명을 예언할만한, 점쟁이라면, 모를까, 만일 그렇지도 않는다고 하면, <위조서>임은 또 분명하고, 거기에, 기록된, 고'구려'. '한맥'. 등도 자연스럽게도, 명백해질거다.  


다음은 참 중에 참인데, 이걸 다시 둘로 나누면, 


1>. 하나는 본서에 위증이니, <초학집>. <유학집>. 등은, 전겸익은 실제로 저술했던게 있지만, 

그에 글 가운데서 씌어진, 우리나라에 대한 일은, 대체로, 전겸익에 위조고, 실제로는 없는게 더 많았으니, 그건 바로, 이런 따위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에 역사에선 그걸 반박할 확고한 증거들은 있거니와, 만일 우리 역사에 

반박할 재료는 없어지고, 지네들에, 거짓된 기록만을 떠돌면서, 유전된다고만 한다면, 다만 가설에 부인만으로는 안 될거니, 어찌하면 좋고, 옳을까. 옛날에 장유는 <사기>에, "무왕은 대륙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한 걸 바로잡고자, 변정하는데, 


첫째로는, <상서>에, "나는 남에 신하는 되진 않겠다고."한 말을 들어서, 기자는 이미 남에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했으니, 무왕에 봉작에, "기자는 조선으로 몸을 피하였다."고 한 걸 들어서, 대륙에, 반고는 <사기>를 지은 사마천보다 성실하고, 정밀한, 역사가로서, 사마천에 <사기>에 기록된 기자에 봉작설을 빼버리고선, 봉작은 사실은 아니라고 단언을 내렸으니, 


이건, 사람에 대한 까닭, '인증'(人證)이다.


삼국 이후론, 몽골 침입 이전에, 고려 말기, 우리나라 형세는 강성해서, 대륙에 대해서, 전쟁으로,

맞설 때에도, 내게 보낸 <국서>에, 저에게로, 우리를 낮추어 한 말은 많이 있었거니와, 그들은 다른 나라에 사신을 보내면 반드시 '내조'라고 썼음은, 대륙인에 병적인 자존에 대한 성질인거니, 

이는 대륙에, 근세즈음, 청조는 처음 서양에 마주했을 때, '영'. '로'. 등 여러나라에 와서 알려진 사실을 죄다 "모국은 신하를 일컫고, 공물을 바쳤다."고 썼음을 보아도 가히 알 수 있는 일이니, 무리들이나, 그네에 기록은 함부로 믿어선 안 된다.


또 대륙인들도 만든, <열조시집>. <양조평양록>. 등은 '시화' 가운데서도, 조선사람에 시를 가져다, 게재할 때에는 대담하게 한 구절 한 줄을 고쳤음을 볼 순 있으니, 우리에 역사를 적을 때에도, 자구를 고쳤었음은 알거다. 그리고 몽골에 위력은, 우리나라를 뒤흔들 때, 우리에 '악부'. '사책'을 가져다, '황도'. '제경'. '해동천자'. 등에 자구를 모두 고친 사실은, <고려사>에도 보였으니, 그 고친 기록을 바로잡지 못한 <삼국사>. <고려사>. 등도, 대륙이랑 관계된 문제는 실제에 기록은 아님을 알거다. 


이건, 일에 대한 까닭, '사증'(事證)이다.   


연전에, 김택영, <역사집략>. 장지연, <대한강역고>. 일본에 '신공여주' 18년에, 신라를 정복했고, '수인주', 2년에 '임나부'를 설치했다는 건, 모두 <일본서기>에서 그대로 따다가, 적고, 그 박식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신공' 18년은 신라 '내해왕' 4년, 서기론 199년이고, 내해왕 당년에는, 신라는 압록강을 구경한 이도 별로 없었을텐데, 이제 내해왕은 압록강(아리나례)를 가리키면서, 맹세했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이고, 수인주는 백제와 만나서, 교통하기 전에도, 일본에 임금이니, 백제에 봉직도 수입은 안됐을 때인데, 수인주 2년인데 '임나국' 사람에게, 붉은 비단, 이백 필을 주었다 함은 어쩌잔말인가.


이 두 가지 의문에 대답하기 전에도, 그 두 사건에, 기사는 스스로 부정하고 있으니, 


이건, 다른 까닭, '이증'(異證)이다. 


이렇게, 고인에 위증을 '사람'(人)으로 '일'(事)로 '이치'(理)로, 증명해서, 

부합하지 않으면, 그건 거짓임을 알거다.


2>. 후세 사람에 위증이니, 원서에는 본래 거짓은 없었는데, 후세 사람은 문구를 보태어서, 

위증한거다. 마치 당태종은, 고구려를 치려해서, 그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 <남사>. <북사>. 등에 보인 조선에 대한 사실을 가져다, 자기네에게 유리하도록 

대륙에, 안사고, 등으로 하여금, 왜곡한 사실로, 곡필을 잡아 고치고선, 보태고, 바꾸고, 

억지로, 주를 달아서, 사군에 연혁은 거짓 중에 거짓으로 되고, 역대 두 나라에 <국서>는

더욱 본래대로 전해진 건 없게 됐다. 


이러한 증거론, 본편 제2장 <지리연혁>에서도 볼 순 있을거다. 다음은 거짓, 가운데서도, 참된건데, 마치 대륙에, <관자>같은 건, 대륙, 관중에 저작도 아니고, 대륙에, 육국 시대에, 저작인 <위서>나, 조선이나, '제'나라에 전쟁은, 도리어 그 실상을 전한 자이니, 위서로서도, 진서 중에 <진서>, 

이상에 가치를 가진거라 할거다.          


5. 만주(滿). 몽고(). 오스만/토후국().


김부식은 김춘추. 최치원. 이래로 모화주의에 결정이니, 그가 저술한 <삼국사기>엔 "고주몽은 고신씨에 후예다.", "김수로는 금천씨에 후예다.", "진한은 중국 진인이랑 동래한거다."해서, 말이나, 피나, 뼈나, 교나, 풍속은 한가지도 같은게 없는, 대륙족을 동종으로 보아서, 말살에다, 쇠살을 묻힌 어림없는 붓을 놀린 후론, 그 편벽된 소견을 간파한 이는 아직 없었으므로, 우리 부여에 계는 분명하지 못해서, 드디어는 <조선사>에 위치를 어두운 구석에 둔 지는 오래였다. 


언제인가 필자는 <사기>, <흉노전>을 보니, 삼성에 귀족 있음은 신라와 같고, 좌우 현왕 있음은, 

고려나 백제와 같고, 5월에 '제천'은 마한이랑 같고, '무기일'을 숭상함은 고려와 같고, '왕공'을 

'한'이라 함은, 삼국에 '간'이랑 같고, 벼슬 이름 끝 글자에 '치'라는 음도 있음은, 삼한 때, 

'신지'에 '지'와 신라에 벼슬 이름인 '한지'에 '지'와 같고, 황제나, 임금에 아내를 뜻하던, 

'''알씨'라 함은 곧 '아씨'에 번역은 아닌가 하는 가설도 생겼다.


사람이랑 동물이나 짐승, 가축을 뜻하던, 인축. 물건값을 치르고, 회계하던 곳을, '담림' 혹은 '대림'이라 함은 '살임'에 뜻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나고, 삼한 때, '휴도'는 '소도'와도 음은 같을 뿐 아니라, 나라 안에선, '대휴도'를 둔 휴도국은 있고, 각처에 또 작은, 소, 휴도도 있어서, 더욱 삼한에 소도와 틀림은 없었다. 


이에 조선이나 노예신분이던, 이민족, 흉노는, 삼천 년 전에는 한방 안에 형제였다는 의문스러운, 의안을 가져서, 그 해결을 구하다가, 그 후론, 청나라, '건륭제'도 지은 <만주원류고>와, 요. 금. 원. 세 역사에선, <국어해>를 가지고서도 비교해보았더니, 비록 그 가운데선, 부여에 대신에 대한 칭호로 우두머리를 뜻하던, '가'로, 음을 풀이해서, 조선말 김이나, 이나, 하던, '가'와 같은 뜻이라 하진 않고, 뜻으로 풀이하고, 주석해서, 집을 뜻하던, '가'에 잘못이라 했으며, '금사'. '발극렬'을 음으로 맞는 신라에 '불구래'에 상당한거라 하지 않고서, 청나라, '청조'에 '패륵'에 동류라한 건 등에 대해선, 잘못은 없지 아니했으나, 주몽은 만주어론, '주림물', 곧, '삼림'에 뜻이라하고, 삼한에 벼슬 이름은, 가르다라는 뜻으로, '지'로, 곧 '동몽고'에 중을 만나서, '동몽고'에 말을, 동.서.남.북으로 물으니, 연나. 준나. 우진나. 회차라고 해서, <고려사>에, "도부를 '순나라'라 하고, 서부를 '연나라'라 하고, 남부를 '관나라하고, 북부를 '절나라'라하고" 라고 부르던, 같음을 알았다.


또 그 후론, 일본인, 도리이 류조, '조거용장'은 조사 발표한, 조선. 만주. 몽고. 토이기. 네 종족에 현행하는 말로, 내 떠올린, 기억으론, 오직 '귀자'를 '아기'라, '마른장', '건장', '메주'라 하는 한두 가지 뿐이지만, 같은 걸, 수십 종도 있음이란, 억단을 내렸고, 대륙 역사, 24사에, 선비. 이민족. 몽고. 등에 대한 기록만을 가지고서, 그 종교와 풍속에 같고 다름을 참조했고, 서양사로써, 이민족에 유종은 토이기. 흉아리. 등지로 옮겨간 사실을 고열해서, 조선. 만주. 몽고. 토이기. 네종족은 같은 혈족이라는 또 하나에 억단을 내리게된거다.


이 억단에, 옳고 그름은 고사하고,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조선에 고어뿐만 아니라, 만주어. 몽어. 등도 연구해서, 고대에 지명. 벼슬 이름에 뜻을 깨닫는 동시에, 이주하거나, 교통한 자취며,

싸우거나, 빼앗은, 자리며, 풍속에 같고 다른 차이며, 문명이나 야만이란, 문야에, 높고 낮은 원인을 구명하고, 그 밖에 허다한 서적에 탐구와 잘못된 문헌에 교정 등에도, 힘을 기울여야겠다.


이상에 다섯 가지는, 재료에 수집이나, 그 선택 등에선, 수고로움에 대해서 내 자신에, 경력을 말한거다. 조선. 대륙. 니폰. 등 동양 문헌에 대한 대, 도서관은 없으면, <조선사>를 연구하기란 정말로 어려울거다. 일본에 학자들은, 국내에 아직도 십분 만족하다할 도서관은 마땅하겐, 없으나, 그러나 동양으론, 제일이고, 또 현재에 들어선, 또, 조선에 소유는 그 외부에 창고나 옥사던, 곳집은 되고, 또, 서적에 구독이나 각종 자료에 수집은 우리같이 떠돌아다니고, 표랑생활 중에 있던 가난한 선비던, '한사'보단 월등하겐 나을거고, 게다가, 새 사학에 상당한 소양까지 있다고 자랑하기에 이르렀으나, 현재까지도 '동양학'에 훌륭한 사람으로, '위걸'도 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저들 중에선, 가장 명성은 높던 자는 시라도리 구라키치, '백조고길'이라 하지만은, 

그도 저술했던 <신라사>를 보자면, 배열. 정리에 새로운 형식은 볼 수도 없고, 한 두 가지 발명도 없음은 도대체 무슨 까닭이던가. 좁은 천성은, 조선을 헐뜯기에만 급급해서, 공평을 결함으로, 

인하거나, 여긴건가조선사람으로선, 어찌해서, 조선사학은, 일본인으로부터 열리고, 

'개단'하기를 바라리요, 바라지마는, 보배창고를, 보장마저, 

남김없이 가져다가, 어리석고, 어두워서, 암매 중에선, 

썩임을 못마땅해서, 개탄하고, 안타까워서도, 아까워하진 않을 순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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