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에 개조에 대한 소견.


역사 재료에 대해선, 그 없어진 걸 채우고, 빠진 걸 기우고, 거짓을 지우고, 헐뜯던 걸, 밝혀서, 

완전하게 하는 방법을 대략이나마 이미 말했거니와, 편찬하고, 정리하는 절차에 있어서도, 

옛날 역사에 투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될거다. 


이즈음, 근일에, 때때로, 새로운 체제에 역사를 지었다는 한 두 가지 새 저서는 없진 아니했으나. 

그건, 다만 <신라사>. <고려사>.라 하던, 왕조 독립에 식을 고쳐서, 상세. 중세. 근세로 했고, 

1권, 2권이라 하던, <통감>. <분편>에 이름도 고쳐서, 제 1편, 제 2편이라 했으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재주, 재기. 사이비, 이단이라 하던 걸, 예술이라, 학술이라 해서, 그 귀천에 위치만 바뀌었을 분이고, 임금에게 충실하거나, 외적을 막는, 근왕, 한외라 하던 걸, 애국이라고, 민족적 자각이라 해서,

새롭거나 헐거나, 신구에 이름, 명사만 다를 뿐이니, 전부 털어놓고 말하자면, 우리나라, <한장책>을 서양, <양장책>으로 고쳤음에 지나지 않는거다. 이에 내 어리석은 소견으론, 우리 역사에 개조 방법을 대강, 말해보자면 


1). '계통'을 찾을거다. 


옛 역사, <구사>에는, '갑'대왕은 '을'대왕에 아버지고, '정'대왕은 '병'대왕에 아우이니, 

해서, 왕실에 계통을 찾는 외에 다른 곳에서는 거의 계통을 찾진 않았으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공중에서 거인은 내려오고, 평지에서 참혹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에 넋은 살던, 

신산은 솟아오른 듯해서, 한 편에 <신괴록>을 읽는 거 같다. 


역사는 '인과'에 관계를 밝히자는건데, 만일 이와 같은 '인'이나 이외에 일이 있다 하면, 역사는 무엇하랴. 그건, 지은 사람에 부주의에 의한거고, 본질은 그러한게 아니다. 그러므로, 

<구사>에는 그 계통을 설령,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를 찾을 수 있으니, 

<삼국사기>, <신라사>에 적힌 신라에 화랑, 국선은 진흥대황 때부터, 문무대황 때까지, 전성해서, 신라에, 사다함 같은 이는 겨우 열 대여섯 살에 소년이므로, 그 제자에 수는 대륙에 '대성'인, 공구와 겨루게 되었고, 


이밖에, <삼국사기>에 금대문에 설에 따르면, 현상. 양장. 충신. 용사들은 모두 이 가운데서 났다고도 했으나, 그 동안은 수십 년에 지나지 않았고, 먼 곳에 전한, 성식은 아주 끊어져서, 국선 이전에, 구선에 원인, 개조도 볼 수 없었고, 국선 이후 국선에 후계자도 볼 수 없이도,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갔으니, 이게 어찌 신라에 <신괴록>이라 부르지 않지 아니하고, 없겠는가. 


옛 기록, <고기>에선, 왕검은 국선에 개조임을 찾으매, <고구려사>에선, 조의나 선인 등을 알거고, <고려사>에선, 이지백은 "선랑을 중흥시키자."고 한 쟁론이나, 예종은, "'사선'에 유적을 영광스럽게 하라."하고, 의종은, "국선에 복로를 다시 열라."고 했던, <조서>를 보면, 고려에까지도, 

오히려, 국선에 유통은 있었음을 볼지니, 이걸 계통으로 찾는 방법을 한 예시로 든다. 


2). '회통'을 구할거다.        


'회통'이란 먼저냐, 나중이란, 전후나, 이거냐, 저거냐, 피차에, 관계에 딸리던 걸, 유취해서 모은다는 말이니, <구사>에도 회통이란 명칭은 있었으나, 오직 <예지>(禮志). <과목지>(科目志). , 회통에 방법은 충분하게, 완미하진 못했지만, 이 밖에는 이 명칭을 응용한 곳은 없었다. 그러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홀연하게 모였다가, 홀연하게, 흩어지는 구름으로 같고

돌연하게 불다가도, 그치던 돌개바람, 선풍으로 같아서

도저히도 붙잡을 순 없었다.

 

<고려사>, <묘청전>에 보면, 묘청은 일개, 평양, 서경에, 한 중, 스님으로서, "평양에 도읍을 옮기고, 금국을 치자." 해서, 일시에 군왕 이하에 많은 시민에 동의를 얻어서 기세를 매우 빛내서, 

혁혁하다가, 마침내, 평양에 웅거해서, 나라 이름을 '대위'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고, 인종더러, 대위국 황제에 자리에 오르라고, 협박장 식에, 상소를 올렸는데, 반대 당에 수령인 한낱 유생이던, 김부식은, 임금에 군사를 거느린 스승, 왕사로서 와서, 죄를 묻고자, 문죄하니, 묘청은 어지간하게, 변변하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하에게 죽었으므로, 묘청을 미친 자라고, 한 역사비평, 사평도 있지만. 당시에, 묘청을 그처럼 신앙한 이가 많았음은 도대체 무슨 까닭이고, 

묘청은 하루차임에도 그렇게 패한 건 무슨 까닭이던가. 


<고려사>에 <세기>와 <열전>을 참고해서 보면 태조 왕건은 거란이랑, 국교를 끊고, 북방에 옛 강토를 회복하려 하다가, 거사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 후예 되는 임금, 광종. 숙종. 같은 이는 다 태조에 유지를 성취하려했었고, 신하에도 이지백. 곽원. 왕가도. 같은 이들은 열렬하게 북벌을 주장했으나, 다 실행하지 못하고. 윤관은, 군신에 한마음으로, 두만강 이북을 경영하려는 창끝을 약간이나마, 시험하다, 너무 많아서, 그, 이미 얻은 땅에 구성까지도, '금'나라에, 태조에게 다시 돌려주니, 이는 당시에, 무사들은 천고에 한되는 일로 여겼다. 


그 뒤론, 금에 태조는 '요'나라를 토벌하고, 대륙 북방을 차지해서, 황제를 일컫고, 천하를 노려보았다. 금은 원래 백두산 동북에 여진족, 촌동네, 부락으로서, 우리에게 복종하던, 종이자 노예던, 

노민에, "여진은 종으로 고려를 섬긴다."고 했고, <고려사>에 실린, '김경(영)조'에 <국서>에도,

"여진은 고려를 부모에 나라로 삼았다."고 했다는데, 갑자기도, 강성해져서, 형제에 위치로 바뀌었다. 

<고려사>에 실린 <김경(영)조에 <국서>에도, 형, 금황제(왕)는 글을 아우 고려왕에게 보낸다."고 했다. 이에 나라 사람들 가운데서, 좀 혈기 있던 사람이라면, 모두 국가에 치욕이던, 

국치에 눈물을 뿌렸다. 


묘청은 이러한 틈을 타서, 고려 초기부터 전해오던. "평양에 도읍을 정하면, 36개국, 나라에선, 조공온다고."하던 길흉을 예언하던, <도참>을 가지고서, 부르짖으니, 사대주의에 치우친, 편벽된, 소견을 가지던, 김부식 등 몇몇 사람 이외에는, 모두 묘청에게 호응해서, 대문호던, 정지상이며, 

무술에 뛰어나, 무장이던, 최봉심이며, 여러, 문무를 갖추고, 겸전하던, 윤언이 등은 모두 북벌론을 주창함으로써, 묘청에 세력은 일시에 전성했다. 


오래되진 않아서, 묘청에 하는 짓은 미치고, 어그러지고, 망령되어서, 평양에서 왕명도 없이, 나라 이름을 고치고, 온 조정을 협박했으니, 이에 정지상은 묘청에 행동을 반대했고, 윤언이는 도리어 주의에 다른 김부식이랑 함께, 묘청 토벌에 선봉은 되었다. 이건 묘청은 실패한 원인이다. 그런데도, 김부식은 출정하기 전에 정지상을 죽이고, 묘청을 토벌한 후에도, 또, 윤언이를 내쫓아서, 북벌론자에 뿌리를 소탕해버렸다. 


김부식은 비록 성공했으나, 이로 해서, 조선은 쇠약해질 터전은 잡혔다고 할 순 있을거다. 

이렇게, 참고해서 보면, 묘청에 성패한 원인이나, 그 패한 뒤로, 생긴 결과는 분명, 본명하지 않던가. 이로써 회통을 구한 한 예시를 보인거다.


3). '심습'을 제거할거다.


영국 해군성에, "세계 철갑선에 시초, 비조는 1592년 경에, 조선 해군 대장이던, 이순신이다."라고 한 보고는 <영국사>에 실려 있는데, 당시에, 일본인들은 모두 일본 배는 철갑이고, 이순신에 건, 철갑은 아니라면서, 그 보고는 틀린 거라고 반박했고, 조선에 집필자들은 이걸 과장하기 위해서, 그 보고를, 그대로 인용해서, 조선이냐, 일본이냐, 어느 나라에서 먼저 철갑선을 처음으로, 만들었는가를를, 창조했는가를 두고서, 논쟁하게 됐다. 


일본인에 말은 아무런 뚜렷한 증거도 없는, 거짓말, 위안인지라, 족히 따질 건 없거니와, 이순신 유고집인, <이충무공전서>에서 설명한, 거북선, 귀선에 제도를 보건대, 배는 널빤지로 꾸몄고,

철판으로 꾸민 건 아닌 듯 하니, 이순신을 장갑선에 비조라고 함은, 옳으나, 철갑선에 비조라 함은 옳진 않을거다. 철갑선에 창조자라고 하면, 보다 더 명예롭지만은, 창조하지도 않은 걸 창조했다고 하면, 이건 보다 더 진보된, '진화계급'을 어지럽힐 뿐이다. 가령 모호한 기록 중에선, 부여에 어떤 학자는 물리학을 발명했다든가, 고려에 어떤 명장은 증기선을 창조했다는 문구를 발견했다하더라도, 우리는 신용하지 못한 건 속일 순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거도 옳진 않기 때문이다. 


4). '본색'을 보존할거다.            


당시, 백과사전이던, <대동운부군옥>에선, "화랑, 국선. 구산, 승려. 등은, 사냥을 나가서, 

어린 짐승이나, 새끼를 가진 짐승을 함부로 어지럽게, 낭자하게, 죽였는데, 주막에 주인은 저녁 밥상에 자신에 다리살을 베어놓곤, 당신, 그대, 공은 어진 이는 아니니, 사람에 고기도 먹어보라고 했다."고 한말도 있었다. 이는 대체로, 당시에 신라에선, 영량. 술랑. 등에 학설은 사회에 침투해서, 국선.오계에 한 가지인, '살상은 골라서 하라.'라고 한 걸, 사람들은 다 실제로 행하던, 실행하던 때이므로, 이를 위반한 자는, 사람에 고기도 먹으리라는 반감으로, 주막에 주인들은 이렇게, 볼 면목 없이, 참혹하게 무안을 준 거다. 그건, 수십자에 지나지 않는 기록이지만, 

신라에 <화랑사>에 일부라 할 순 있겠다.


<고구려사>, <미천왕기>에는, "봉상왕은 그 아우던 돌고는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해서, 죽였으니, 돌고에 아들이던, 고구려 미천왕, 을불은 겁이나서, 달아나 수실촌 사람이던, 음모에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음모는 밤마다 기와와 돌을 집옆에 늪에 던져서, 개구리도 울지 못하게 하라 했고, 낮이면 나무를 해오라고 해서,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결국, 을불은 견디다 못해서, 일년 만에, 달아나서, 동쪽 마을, 동촌, 동네 사람이던 다시, 재모와 소금장수로 되어서, 압록강에 이르러선, 소금짐을 강동, 사수촌 사람, 집에다 부렸다, 뿌렸다. 한 노파는 외상으로 소금을 달라고하므로, 한 말 쯤 줬더니만, 그 후에는 또 달라고 하므로, 이를 거절했는데, 노파는 원한으로 벼르던 마음에, 앙심을 품고선, 몰래, 짚신 한 켤레를 소금 짐 속에다, 묻었다가, 을불은 길을 떠난 뒤에 쫓아와선, 도둑으로 몰아서, 압록, 벼슬아치, 우두머리던, 압록제에게 고발해서, 짚신 한 켤레에 값으로 소금 한 짐을 빼앗고는, 매질까지 한 뒤에 놓아 보냈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건 불과 몇 줄 안 되는 기록이지만, 또한, 봉상왕 시대에 재산은 넉넉하거나, 세력있던, 부잣집, 부호에 횡포하고, 잔악한 포학이나, 시민이나 우두머리, 수령들에 사악한 행위를 그린 줄인 

그림(이)자 도면이고, 지도(이)자 약도니, 그 시대에 <풍속사>에선 일반이라 할거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고려사>는 아무 맛도 없는, '어느 임금은 즉위했다.', '어느 대신은 죽었다.' 하는 등에 특정 연도나 월을(일), 연월이나 적고선, 보기만 좋게 '어느 나라, 어느 나라에 사신을 보내왔다.' 하는 등에 적은 사실들 뿐이고, 위에 3). 4). 두 절에서와 같은, 시대에 본색을 그린 글은 보기란 참 어렵다. 이는 유교도에 대의명분만 세운 춘추필법이나, 치우친, 외교주의에 따른 그런 치우친 편견을 낳아서, 

전해내려오던 옛기록, <고기>를 제멋대로 고쳐놓고선, 

그 시대에 사상을 흐리게 한 거다. 


옛날 서양에 어느 역사가는 이웃집에서 두 사람들, 다투던 말을 다 알 수 있도록, 

역력하게 다 들었다. 그런데도, 그 이튿날 자신은 들은 바와 남들은 말하던, 

그 두 사람에 시비는, 도무지도 달랐다. 이에, '옛날부터에 역사는 모두 이 두 사람에 

시비와 같이 잘못 전해진 건 아닌가.'하고선, 자신에 저술한 역사책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엿보던, 탐보원은 들어다 보고선, 편집원은 다시 교정하고, 그러고도 잘못은 생기는 예시도 있는

신문이나 잡지에 기사들도 오히려 그 진상이나 큰 차이는 있는 건 허다할 뿐은 아닌지라, 갑에 신문은 이렇다 하면, 을에 신문은 저렇다 해서, 어느 걸 믿을 수 없는 일은 많아졌으니, 하물며, 고대에 한두 사학가는 자신에 좋아하고 싫어하는대로, 아무 책임감도 없이 지은 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성계는 고려에 마지막, 말기에, 왕이던 우왕에 목을 베고 그 자리를 빼앗을  때, 후세 사람은 신하로서 임금을 죽인 죄를 나무랄까 해서, 죄를 놓아준, 백방으로 우왕은 원래

왕씨에 왕통을 잇지 못할 요망한 중이던, 삼라만상에, 신돈은 거듭, 천첩이자, 우왕에 어머니던 반야에 다시 살아난, 소생이라 하고, 공민왕이던, 경효왕은 신돈에게 집에 어떻게 데려왔냐느니 물어서, 반야는 우왕을 궁인이던 한씨에 소생으로 정한 걸 보고선, 매우 분하고, 통한해서 

울부짖어 우니, 대궐문, 궁문도 그 원통함을 알고 무너졌다느니 해서, 아무쪼록, 

우왕은 신씨임을 교묘하게 증명했다.


그러나 우왕은 오히려 개성 상인이던, 송도 유신들에게 있어 굴 속에 숨어서까지 우왕에 어려운 지경에 놓인, 무함당함을 절규했으므로, 오늘날 사학가들은 비록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오히려 우왕은 왕씨요. 신씨는 아님을 믿는 이도 있다. 또 왕건은 궁예에 장군으로서 궁예에 은총을 받아서 큰 군대, 대병을 맡게 되자, 드디어 궁예를 쫓아내서 객지에서 죽게, 객사하게 하고, 또한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다는 죄를 싫어하는데 온통, 전력을 집중해서 궁예를 죽여서 마땅한 죄를 구했으니, '궁예는 신라 헌안왕에 아들인데, 왕은 그를 5월 5일에 났음을 미워해서 버렸더니, 궁예는 이를 원망해서 군사를 일으켜서 도둑을 치고선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하고 어느 절에선 벽에 그려진 헌안왕에 상까지 칼로 쳤다.'고 했고, 


다시 확실한 증거를 만들고자, '궁예는 나자 헌안왕은 엄명을 내려서 궁예를 죽이라고 해서 궁녀는 다락처럼 높은 한옥집, 누각 위에서 아래로 내던졌는데, 유모는 누락 아래에서 받다가 손가락으 잘못 아이에 눈을 찔러서 한쪽 눈은 멀었다, 그 유모는 데려다가 비밀리에 길렀는데, 10살은 되자 장난은 몹시 심하므로 유모는 울면서 말하기를 "왕은 너를 버리신 건 내도 차마 버려둘 순 없어서 데려다 길렀는데, 이제 네는 이렇듯 미치광이 짓을 하니 만일 남도 알면 너와 내는 다 죽을거다." 하였다. 궁예는 이 말을 듣고선 울며 머리를 깍고 중으로 됐다. '그 후에는 신라에 정치는 문란함을 보고선 군사를 모아서 큰 뜻을 성취하리라 하고선 도둑 무리에 우두머리 괴수 양길에게로 가서 후한 대우를 받고 군사를 나누어서 동으로 나아가서 땅을 차지했다.'고 했다.


가령 위에 말은 다 참말이라면 이는 궁예와 유모에 평생 비밀일건데, 그걸 듣고 전한 자는 누구이고, 가령 궁예는 왕이 되어서 신라에 범죄와 처벌을 맡던, 형법 밖, 바깥에 있게 된 뒤에 스스로 발표한 말이라 한다면, 그 말한 날짜나 곳은 적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해서 데리고 말할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오늘날에 눈으로 보면 부모를 부모라 함은 나를 낳은 은혜를 위함인데, 만일 나를 낳음은 없고 나를 죽이려는 원수만 있는 부모는 무슨 부모겠는가. 


궁예는 헌안왕에 아들이라 하더라도 만일 역사, 사관에 말은 같이 그는 세상에 나오던 날, 죽으라고 누각 위에서 내던진 날로부터 아버지라는 명분이나 의리, 명의는 끊어졌으니, 궁예는 헌안왕에 몸에 칼질을 해도 아비를 죽인 죄는 될게 없고 신라에 서울이나 왕릉, 능을 남에 권리나 인권을 짓밟고, 유린한다 할지라도, 조상을 모욕한 논란은 될게 없거늘 하물며 왕에 그림을 치고 문란한 신라를 혁명하려 함은 무슨 큰 죄나 논란은 되리만은 고대에 좁은 논리관만으로는 그 두 가지 일, 헌안왕에 초상이나 신라에 대한 겸손하거나 공손하지 아니한, 불공만 해도 궁예는 죽어도 죄는 남을거니, 죽여도 죄는 남아 궁예를 죽이는 데에 무엇은 안 되었으리라. 이에 왕건은 살아서 고려 통치권을 가지고서 죽어서도 고구려, 태조문성에 의식(儀式)이나 존경, 존시를 받아도 추호에 부끄러움은 없을거니, 이건 고려 사관은 감히, 구태여서, 세달사에 한 거지, 비렁댕이 중이던, 궁에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왕궁에 왕자로 만듦인가 한다. 


임금, 제왕이라 반역, 역적이라 함은 승리와 패배, 성패에 별명일 뿐이고, 정론이라, 사론이라 함은 많고 적은 차이일 뿐인데, 게다가 보고 들은 데 잘못은 있고, 쓰는 사람에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은 섞이지 않았는가. 


사실도 흘러가는 물도 같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진 못한다. 이미 간 사실을 그리는 역사를 저술하는 이도 어리석은 사람이거니와, 그 써놓은 걸 가지고 앉아서 옳고 그르고, 굳고 곧은, 

시비곡직을 가리려는 역사를 읽는 이는 더욱 어리석은 사람은 아닌가. 

아니다. 역사는 개인을 표준으로 하는게 아니고, 사회를 표준으로 하는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왕에 성은 왕씨인가. 신씨인가를 조사해서 바로잡느니보다 다만 당시에도, 대륙에 대해서 전쟁을 개시했다고 선전하고, 대륙, 요동 옛 땅을 회복하려 함은 이루어질 일인가. 실패할 일인가. 승리와 패배, 성패 간에 그 결과는 이로울까 해로울까부터 정한 후에 이를 주장한 우왕이랑 반대한 이성계에 시비를 말함은 옳고, 궁예에 성은 궁인가, 김인가, 하는 변론보다, 

신라 이래로, 숭상하던 불교를 개혁해서 조선에 새 불교를 성립시키려 함은 궁예 패망에 도화선이니, 만일 왕건은 아니더라면 궁예에 그 계획은 성취됐을까. 성취됐다면, 그 결과를 확인한 뒤에야 이를 계획하던 궁예와 대적하던 왕건에 옳고 그름을 말함은 옳다고 생각한다. 


'개인으로부터 사회를 만드느냐. 사회로부터 개인을 만드느냐. 이는 고대로부터 역사학자들에 논쟁하는 문제이다. 이조 전반기에 사상계는 세종대왕에 사상으로 지배되고, 후반기에 사상계는 

퇴계 이황, 산인에 사상으로 지배됐다. 


그러면 이조 오백 년 동안에 사회는 세종, 퇴계로 만든게 아닌가. 신라 후기로부터 고려 중기까지에 육백 년 동안은 영랑, 원효는 각기 당시에 사상계에 한 방면을 차지해서 영랑에 사상은 성해지는 때에는 원효에 사상은 물러나고 원효에 사상은 성해지는 때에는 영랑에 사상은 물러나서, 한번 나아갔다 물러서고, 왔다갔다, 머뭇거리다, 갈라들어서, 사상계에 패왕은 되었으니, 육백 년 동안에 사회는 그 두 사람은 만든 건 아닌가.           


백제에 정치 제도는 온조대왕은 마련해서, 고이대왕으로 마무리했고, 발해에 정치제도는 대조영, 고왕, 고제로 마련해서 선제로 마무리했으니, 만일 온조왕이나 고이왕은 아니었더라면, 백제에 정치는 어떤 형식으로 되었을지, 고제와 선제는 아니었더라면, 발해에 정치는 어떤 형식으로 되었을지 또한 모를 일이다. 


삼경. 오도에 제도는 왕검이나 해부루로부터 수천 년 동안 정치에 모형은 되었으니, 이로써 보면 한 사람에 위대한 인격자에 손끝에서 사회라는 건 되어지는 거고, 사회에 자주성은 없는 건 아닌가. 그러나 다시 한편으로 살펴보자. 고려 말기에 불교에 부패는 극도에 이르러서, 법성종, 원효종은 이미 형세는 기울어서, 쇠미해지고, 대륙에, 임제종에도 또한 뛰어난 이는 없고, 다만 십만 명에 승려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반승회와 제사를 지내고 온갖 놀이도 즐기던, 백만 명에 팔관회로 제물이나 곡식을 낭비해서 국민은 머리를 앓을 뿐만 아니라, 사회는 이미 불교 밖에서 새로운 생명을 찾기에 매우, 급급했다. 이에 안유. 우탁이며, 정몽주는 유교에 목탁을 들었고, 그 밑에서 세종은 나고 퇴계는 났으니, 그러면 세종에 세종됨은 퇴계에 퇴계됨은 세종이나 퇴계 그 자신은 스스로 된 건 아니고, 사회는 그렇게 만들었다고 함은 옳지 않을까. 


삼국 말기에, 그 수백 년 동안에 찬란하게 발달한 문학이나 미술에 영향을 받아서 삼한에, 소도천군 미신이나, 불교, 율종소승에 질 나쁜, 하품 불교로는 영혼이나 정신에 세계, 영계에 위안을 줄 순 없어서 사회는 그 새로운 생명을 찾은 지는 또한 오래이므로 신라에 진흥대왕이나 고구려에 연개소문은 다 여러 교종 통일에 새로운 안(案)을 내놓으려 한 일은 있었다. 그 때에 영랑은 도령에 노래를 부르고, 원효는 화엄에 자리를 베풀었으며, 최치원은 유교, 유도에서 불교, 불도로 불도에서 화랑에, 선도로 바꾸는 헤아릴 수도 없는 신통한 재주를 보이니, 이에 사회에 각 방면으로, 각계는 갈채, 환영해서, 이 세 사람을 맞았다. 그러니 영랑이나 원효나 최치원이나 다 본인 자신은 그렇게 된 게 아니고, 사회는 그렇게 만든 게 아닌가.   



이에 따라서 하나에 의문은 생긴다. 원효는 신라 그때에 났기에 원효로 된 거고, 퇴계는 이조 그때에 났기에 퇴계로 된 거다. 만일 그들은 그리스, 희랍 철학 강단에 났더라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되지는 않았을까. 구라파, 현대에 프랑스나 독일에 났더라면 베르그송이나 발터 오이켄말고, 루돌프 오이켄 정도는 되진 않았을까. 나파륜, 나폴레옹에 뛰어난 재주와 큰 꾀나 계략만으로도, 두루마기를 입고 <대학>을 읽던 시절에 안동, 도산서원 부근에서 태어났더라면, 물러나선 송시열은 되거나, 나아가선 홍경래는 되었을 뿐은 아니었을까. 


크고 작은 분량으로도 그와 같이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에 면목은 아주 달라졌을 건 주저 말고 딱 잘라서, 단언할 순 있겠다. 논조는 여기에까지 미쳤으나, 개인은 사회라는 불무에서 이뤄질 뿐이니, 개인에 자주성은 어디에 있는가. 개인도 자주성은 없고, 사회도 자주성은 없으면 역사에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걸 볼 때면 개인이나 사회에 자주성은 없으나 환경이나 시대를 따라서도 자주성은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이며, 만주며, 터키, 토이기며, 헝가리는, 삼천 년 전에는 다 뚜렷한 한 혈족이었다. 그러나 혹은 아시아에선 그래로 있고 혹은 유럽으로 옮겨가선 대륙에 동서는 달라지고, 

혹은 반도, 혹은 대륙으로, 혹은 사막, 혹은 비옥한 땅으로, 혹은 뜨신 온대, 혹은 찬 한대로 분포해서, 땅에 멀고 가까움은 다르고, 목축이나 농업, 침략이나 낡은 걸, 보수하는 등으로, 생활이나 풍속은 해와 달을 지내는 대로 더욱 사이, 간격은 생겨서, 각자에 자주성을 가졌다. 이건 곧 환경을 따라 성립한 민족성이라 하는거다.


같은 조선으로도 이조 시대와 고려 시대와는 다르고, 고려 시대는 또 동북국들로는 다르고, 동북시대는 삼국와는 같지 아니하고, 왕검. 해부루 시대와도 같진 아니하다. 멀면 일천년에 전후는 다르고, 가까우면 일백 년에 전후는 다르니, 현재부터 이후로는 문명에 진보는 더욱 빨라서, 십년 이전에 거친 원기로, 오랜 옛날에, 홍황은 되고, 일년 이전에 먼 옛날은 될는지는 잘 모르는 일이니, 이건 이른바 시대를 따라 성립하는 사회성이다. 


원효와 퇴계는 시대와 경우를 바꾸어 났다 하면, 원효는 유학을 공부해서, 유자는 되고, 퇴계는 

불경을 공부해서, 불자는 됐을지는 모르는 일이거니와, 뛰고 날던, 도양, 발달한 원효더러 주자에 생활에 법도, 규구만 삼가 지키는 퇴계로 되라 한다면 이는 할 순 없는, 불가능한 일이며, 충실하고 용렬, 용졸한 퇴계더러 불가에 따로, 별종을 수립한 원효로 되라 한다면, 이는 또한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일 거다. 왜냐하면 시대와 경우는 인물을 낳는 원료 됨은 같으나, 인물은 시대와 환경을 이용하는 능력도 다르기 때문이다.


민족도 개인으로 같이 어느 곳, 어느 때에 갑이라는 민족으로 가서, 그 성적은 어떠했든지, 을이라는 민족은 갔더라도, 마찬가지로 결과, 성적을 이루었을 거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성급한 판단이다. 대체로, 대개, 개인이나 민족은 두 가지 개성은 있으니, 하나는 한결같은 성질, 항성이고, 다른 하나는 변하거나, 바꾸는 성질, 변성이다. 항성은 첫번째, 제일에 자주성이고, 변성은 둘째로, 버금가는 자주성이니 항성은 많고 변성은 적으면 환경에 순응하지 못해서 모조리 절멸할거고, 변성은 많고 항성은 적으면 보다 나은 자에게 정복 당해서 패할거니, 늘 역사를 회고해서, 두 가지 자주성에 많고 적음을 조절하고 무겁고 가벼움을 균일하게 나누고, 평균하게 해서, 그 생명은 천지와 한 가지로 장차, 장구하게 하려면, 

오직 민족적 반성에 돕고, 따르고, 의지할 수 밖에는 없겠다.  


2). 역사에 개조에 대한 두 가지 결론. 


역사에 개조에 대한 내 어리석은, 우견으론 이상에 의해서 개인이나 사회에 관계에 대해서 두 가지 결론을 지었으니. 


1. 사회에 이미 정해진 국면에서는 한 개인들은 힘쓰기 매우 곤란하고. 

2. 사회에 아직 정해지지 않는 국면에서는 한 개인들은 힘쓰기란 아주 쉽다는 거다. 


정여립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진 아니하고. 모범, 열녀는 두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하는 

유교에 윤리관을 여지없이 말살하고. "인민에게 해되는 임금은 죽이는거도 옳고, 가하고. 바른 일, 행의는 모자라는 지아비는 버리는 거도 가하다."고 하고. "하늘에 뜻, 사람에 마음은 이미 으뜸, 주실을 떠났는데. 주나라를 존중, 존주해선 무엇이고, 군중이나 땅은 벌써 삼국시대, 위나라, 조조와 사마의에게로 돌아갔는데, 긺, 구구하게, 한 구석에서 바른, 정통은 다 무엇하던거냐."하며, 공자. 주자에 역사 글씨, 필법을 반대하니.


그에 제자던, 신극성 등은. "이는 참으로 전에 성인은 아직 말하지 못한 말씀이다."하고 벼슬, 재상이나 학자들도 그에 재주와 기량, 재기와 학식에 마음에 기울이는 이는 많았으나, 세종대왕에 삼강오륜<三綱五倫>에 얕거나, 썩은, 부식은 벌써 터를 잡고, 퇴계 선생에, 임금을 높이고, 성인에 뒤만 따르던, '존군모성'<尊君慕聖>에 주의는 이미 깊이 박혀서 모든, 먼저, 전 사회는 잘 정돈, 안돈된 지, 오래이니, 이같은 엉뚱한 혁명적 학자를 어찌해서 용납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애매모호한 한 자에 고발장에 목숨을 잃고 온 집안은 폐허도 됐으며, 평생에 저술은 모두 불 속에 들어갔다. 이는 곳. 사회에 이미 정해진 국면, 즉, 1.에 속하는 거다.


최치원은 대륙 유학생으로 떠나갈 때, 그에 아버지는 "10년은 되어도 과거를 하지 못하면 내 아들도 아니다."라고 해서, 하나에 한자 문장, 한문 졸업생은 되는 걸 바랬을 뿐이었고, 최치원은 돌아와서, 휘파람곡으로 쌓는, 무협첩첩한 봉우리를 헤치고서, 절이나, 지위로, 중원에 들어가서 급제해서, 벼슬에서 놀기 3년, 비단옷, 금의로, 동쪽, 내 나라, 동국으로 돌아왔다." 하고 노래해서, 또한 스스로 하나에 한문 졸업생으로 되었음을 자랑했다. 


그 사상은 한나라나 당나라에만 있는 줄로 알고서 신라에 있는 줄은 몰랐으며, 학식은 <유서>나 

<불전>을 뚫고, 관통했으나, 정작, 본국에 대한 옛기록,<고기>는 한 편도 보지도 못했으니,

그 주의는 조선을 가져다가 좇거나, 따르고서, 순 대륙화하려는 거뿐이고, 그 예술은 푸른 하늘, 청천을 대낮, 백일을 대하며, 한 식물은 빛은 부족해서, 누런 물질로 화합해, 황화로나, 푸른 풀, 

녹초만 대하던 대륙에 육조, 당나라, 사륙문체에만 능할 뿐이었다. 


당시에, 영랑이나 원효는 두 파는 다 노후해서, 사회에서 중심도 되는 힘을 잃고, 새 인물에 대한 기대는 마치 굶주린 사람은 밥을 구함이나 같았으니, 그래서 대선생에 칭호는 한낱 한문 졸업생에게로 돌아가고, 다음에는 썩 오랜 시절, 나라에서, 피 묻은 산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던, 

천추에까지 그에게 바쳐선, 고려에 들어와서는 영량이나 원효나 두 파에 자리를 마주 대하게 됐다. '때를 만나면 더벅머리도 이루고, 성공한다.'함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니, 2.에 속하는 거다.


어찌 학계뿐일까. 모든 사업은 그러했으니, 재산도 많고, 세력이나 집안도 좋아서, 반란을 일으킨, 기휜이나, 양길도 한때에 크게 펼쳐짐은 신라 말기에, 안정되지도 않던, 판국에서 일어남이고, 이징옥이나 조선에 난, 반란을 일으킨, 이징옥이나, 홍경래도, 슬그머니, 쉽사리, 거연하게,

패망함은 이조에 안정되어 있던 판국에서 그리 된거다. 


백호, 임제는 말하기를. "나도 대륙에 왕조던, 육조나 오계를 만났더라면, 돌아가면서 임금이나 하던, 돌림천자는 얻었겠다."고 했다. 


임백호, 임제. 같은 시인에게 육조. 오계에 송나라, 초대 임금, 유유. 오대, 후량에, 주전충. 같은 도둑에 괴수와 같이 되어선, 돌림천자나마 돌아오게 할 위력만큼은 있었다고는 할 순 없겠으나, 그러나 대륙에 천자를 규모를 세우고 기초를 다져 나가는, 경영하려면, 한나라. 당나라에 잘 다스려진, 치세보단, 육조. 오계에 어지러운, 난세는 더 쉽다는 건 자명한 도리에 맞는 취지, 

이치일거다.


이미 안정된 사회에 인물은 늘 전에 사람에 필법만을 배워놓고선, 이걸 또 덧붙여선, 부연하고, 이걸 넓혀선, 확장할 뿐이니, 인물되기는 쉬우나, 그 공이나 죄는 크진 못해서, 혁명에 대한 성질, 혁명성을 가진 인물, 정여립 같은, 사람은, 매번, 실패로 미칠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를 원망하고, 미워해서, 한 말이나, 한 일에 자취나, 종적까지 없애버리므로, 후세에 끼치는 작용이나, 영향은 거의, 대부분 첫값, 영도로 되고, 오직 삼백 년이나, 오백 년 뒤에야, 한 두 사람, 마음이나 뜻은 맞던, 통하는 이는 있어서, 

그에게 남긴 들리던 소문, 유언, 유음을 감상할 뿐이고, 

안정되지도 않는 사회에선 인물은 반드시 창조적이고 혁명적인 사내다운 남아면 좋을 듯하지만. 


어떤 때에는 꼭 그렇지만도 아니해서, 최치원 같은, 작은 칼로도 잔재주를 부리는 하품에 재주꾼으로서, 

외국인(들)에 입만을 흉내내선, 말하고, 웃고, 노래함은, 그럴듯해서 사람들을 움직일만하면, 슬그머니, 쉽사리, 거연하게, 인물에 지위를 얻기도 하나, 사람됨에, 인격적 자주성에 대한 표현은 없고, 정작, 자유를 구속 당하고, 남에게 부림을 받는, 노예적 습성만 발휘해선, 

모든, 앞선, 전 민족에 한결같던, 항성은 파묻어버리고선, 

변하거나, 바뀌는, 변성만을 부추기고, 조장하는 나쁜 기계만 되고 마니, 

이는 사회를 위해선 두려워하는 바이고, 

어쩌면. 뛰어난 사람, 즉, 인물되기를 뜻하는 사람(들)은 잘못에도 마음을 쓰고, 

조심해서, 경계하고, 삼가야만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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