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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밤하늘 에디션)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9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 있음)
때때로 감정이 무디거나, 아예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밤에 이불킥을 할 때, 흑역사 제조기로 살아왔구나 괴로워 할 때, 기억을 지우지 못하니 감정이 없다면 낫지 않을까 고뇌했다.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SF영화에서 수없이 본, 인간의 형상을 했지만 어딘가 조금 어색한 휴머노이드가 눈앞에 그려졌다. 휴머노이드처럼 감정이 없거나 아주 단순하다면 살기 편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는 SF소설을 많이 읽지 못했어도 의외로 SF설정을 흔히 생각하며 산다는 반증이다. 또한 이런 상상은 휴머노이드와 인간의 차이를 이미 막연하게나마 설정한 것 위에 있는 거다.
2020년 초에 밀리의 서재에서 읽은 <작별인사>는 위 단락에서 말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기계와 인간의 차이와 정체성을 다룬 김영하표 근사한 SF소설이었다.
2년이 흐르고 <작별인사>가 재출간되었다. 한 눈에 봐도 늘어난 분량이라 달라진 점을 기대하며 읽었다. 등장인물과 굵직한 서사는 비슷하지만 기계와 인간의 정체성과 더불어 또 다른 묵직함이 있었다. 그 묵직함은 진지하지만 마냥 비장하지는 않았다. 적정수위를 지키며 독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작가로부터 받은 질문은 다음이다.
“휴머노이드로 살든, 인간으로 살든 어떻게 살 것인가?”
마치 종교가 추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내지는 살아가면서, 정확한 표현은 다르지만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이기도 했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사유하니 작가가 왜 이 작품의 제목을 ‘기계의 시간’에서 <작별인사>로 바꾸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든 간에 삶을 살아가고 삶과 이별을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소설은 살아있는 존재들의 근원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
자신이 인간인줄 알았는데 휴머노이드라는 걸 알게 된 철이, 철이를 만들고 철이를 찾으려 재판을 하는 철이 아버지(과학자 최 박사), 인간이지만 복제된 선이, 선이같은 클론을 무분별하게 만들어내는 인간들, 또 다른 휴머노이드 민이, 인간 세상에 대항하는 휴머노이드 달마, 모두 입장이 다르지만 이들 모두에게 살아가라고 주어진 시간은 같다. 이는 선이와 달마의 논쟁, 철이의 아버지가 재판에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는 부분에 이르면 선명하게 드러난다. 캐릭터들의 생각 차이로 시작되지만 결국 삶에 대한 넓은 태도를 보여준다.
물론 소설은 이렇게 곱씹을 거리만 던져주지 않는다. ‘휴먼매터스’와 휴머노이드 수용소라는 공간, 민병대의 등장, 쫓고 쫓기는 긴박함이 어우러져 눈앞에 강렬한 영화 한 편이 스쳐지나갔다. 김영하 소설의 특징인 손에 잡힐 듯한 뚜렷한 서사가 두드러졌다.
선이가 클론인데 그것에 얽힌 가슴 아픈 사연, 예상할 수 있었지만 철이가 휴머노이드라는 것, 달마의 터전이 급습당한 이유 등의 자잘한 반전 또한 작품을 풍성하게 한다. 한국 사회가 통일이 된 걸로 설정해서 미래 사회의 혼란함을 가중시킨 영리함도 빛났다.
소설은 숨 가쁘게 결말로 달려가고 독자는 결말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밀리의 서재 판을 이미 읽었기에 결말을 알고 있었다. 처음 읽을 때 결말의 씁쓸함에 허우적대면서도 ‘……인간이 소멸하자 지구에 평화가 찾아왔다, 인류가 지구에 남긴 건 플라스틱과 닭 뼈…….’라는 구절에서 피식 웃기도 했다. 올해 출간된 버전에서 이 문장이 빠져서 아쉬웠다.
소설의 막바지에 나온 선이의 모습은 마치 수행하는 종교인 같다. 그녀가 남긴 말처럼 삶을 마무리하는 존재들이 우주로 회귀한다는 걸 보여주며 작품은 막을 내린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시대, 중심잡기 힘든 요즘에 <작별인사>를 완독하면 서글픈 여운이 짙게 깔릴 것이다. 쉽게 가시지 않는 먹먹함이 되레 원동력이 될 거기에 <작별인사>, 그저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