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위대한 유산 - 벼룩에서 인공지능까지 철학, 과학, 문학이 밝히는 생명의 모든 것
조대호.김응빈.서홍원 지음 / arte(아르테) / 2017년 9월
평점 :
품절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1.'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분들께
2.'영혼과 유전자, '진화와 창조', 생명계의 인간', '인간과 동물'이라는 키워드에 관심을 갖고있는 분들께
3.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섭을 기대하는 분들께
[이 책의 장점]
1.재미
이 책의 부제는 '벼룩에서 인공지능까지 철학, 과학, 문학이 밝히는 생명의 모든 것'이라고 적혀있습니다. 다양성과 풍성함에 대한 기대와 함께, 지적수준의 향상이 기대가 되는 제목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너무 어렵거나 난해하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갖고계신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기대와 달리 첫 번째로 느껴진 장점이 바로 '재미'였습니다. 이 책의 프롤로그는 16세기 영국 시인 존 던의 '벼룩'이라는 시와 함께 시작합니다. 시인의 능청스러운 시적 구애를 둘러보던 중 시적화자가 바라본 생명을 포착하더니, 어느덧 생물학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생물학과 과학을 돌아보던 중 그 한계를 바라보는 철학의 눈으로 전환합니다. 나아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흘러온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을 짚어봅니다. 하나의 대상을 바라보는 다방면의 자유로운 포착과 해석은 이 책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느낀 가장 큰 '재미'의 요소였습니다.
176 나는 존재하나 내가 누군지 모른다
나는 왔지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나는 가지먼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내가 이렇게 유쾌하게 산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그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는 과정에서 다양한 '볼거리'도 등장합니다. 바로 시와 소설과 그림과 이미지들입니다. 위의 시는 독일의 신비주의 철학자이지 종교 시인이었던 앙겔루스 실레시우스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생물학에 대한 배움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지적 호기심을 환기시키며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2.지식
정말이지 풍성합니다. 이 책의 세 공저자는 각각 철학, 생물학, 영문학 교수입니다. '생명'이라는 경이로운 주제를 바라보는 세 저자의 이야기는 역사와 문학과 생물학과 철학과 종교를 넘나듭니다. 일관되면서도 다양하고 풍성한 이야기들, 지식의 경계를 확장하고자 하는 분들께 즐거운 배움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사유의 기회
방대한 지식을 담고 있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정보만을 수집하며 읽을만한 책은 아닙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방대한 이야기들 역시 단 하나의 궁극적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바로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입니다. 과학적 기술을 갖추지 못했던 과거의 철학자들이 나름의 발견과 해석으로 생명을 정의한 이야기들, 시대를 흐르며 달라져온 주류적 해석들을 짚어보는 과정은 우리가 우리를 정의하는 방식에 대한 다양한 영감을 줍니다. 또한 3부에서 다루고 있는 과학과 인간, 동물과 인간에 관한 이야기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써의 규범체계를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 미래를 살아갈 인간으로써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관한 생각거리들을 던집니다. 특히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비교하는 대목은, 다른 방향의 디스토피아를 짚어봄으로써 지금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된, 의미있는 사유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멀리서 읽기:전반적인 이야기]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위대한 현자들에 의해 끝없이 탐구되어 온 질문입니다. 그 중 '나는 누구인가'를 규명하는 작업은 철학자와 신학자와 과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고, 오늘날 역시 최첨단 과학기술에 기반하여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류는 언젠가 그 답을 찾게 될까요?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많은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현대 과학이, 탁월한 과학자들이 밝혀낼 '나', '우리', '세상'에 대한 진실들, 생각만 해도 설레고 가슴이 뜁니다. 그런데, 과연 그 결과만이 중요한 것일까요? 긴긴 인류의 역사동안 '생명'을 규명하고자 했던 탐구들, 끝없는 호기심들, 지각된 세계와 무한한 상상력이 만나 피어난 나름의 세계관들, 기존의 세계관이 과학적 발견에 의해 무너지고 새로운 진리가 수용되는 과정들, 예술의 눈과 종교의 눈과 과학의 눈으로 바라본 각기 다른 세상들, 이 모든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영감과 의미는 과연, 그에 못미칠까요?
각자가, 각자의 기준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종교가 있는 사람이라면 경전에 따른 삶을,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각자의 신념에 따른 삶을, 즉흥을 사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느낌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삶의 방식은 정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합니다. 종교에 따르던 사람이 과학적 증명만을 믿게될 수 있고, 집시의 삶을 살던 누군가가 종교에 귀의하여 율법에 따르는 삶을 살게 될수도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지언정, 변화 그 자체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까요? 우리를 누구로 규정하며, 누구로 만들어가야 할까요? 여기 같으며 다른 고민을 해온 역사속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각자의 단서속에서 각자의 세계를 상상하고 각자의 자신을 규정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주는 지혜와 영감은, 우리 스스로 삶과 자신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귀한 지혜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재미'와 '지식', 그리고 '사유의 기회'. 앞서서 뽑은 세 가지 장점과 같이 이 책은 다양한 매력을 담고 있습니다. 즐거운 배움과 사유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까이 읽기:인상적인 구절과 생각]
234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비록 유추에 의한 설명이지만-그것보다 훨씬 더 과학적이지요. 그래서 막스 델브뤽이라는 과학자는 'Aristotle-tle-tle'이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논문에서 방금 소개한 그 구절을 염두에 두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면, 이 모든 인용문들이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형상이라는 원리는 정액 안에 저장된 정보이다. 수정이 되고 난 다음 이 정보는 미리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해독된다. 이 해독 과정은 그 정보가 작용을 미치는 질료의 형태를 바꾸어놓는다." 정액 안에 들어 있는 로고스가 프뉴마의 운동을 통해 질료에 전달되면서 생명체를 만들어간다는 말이지요.
아르스토텔레스의 생명에 관한 규정이, 현대과학이 밝혀낸 사실과 상당한 유사점을 갖고 있다는 것. 신기하면서도 위대한 철학자의 통찰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나 역시 '상상의 경계'를 제한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관찰의 한계와 판단력의 한계로, 지금 내가 내린 판단은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해야 하는것이 우리의 삶이다. 만약 나의 판단이 틀렸다면 그 때 가서 새로운 배움을 얻으면 된다. 그동안의 나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망설이며 주저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나의 상상에 날개를 달고, 생각의 움직임과 몸의 움직임에 자신감과 과감함을 더해가야겠다고 다짐한다.
320 인간의 실종은 실제 역사에서도 있었지요. 산업혁명이 한참 진행되던 시절 석탄을 너무 많이 땐 나머지 검댕이 굴뚝을 막으면 네다섯 살짜리 애들만이 거기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나이대 아이들을 고아원에서 대량으로 사서 굴뚝 청소를 시켰지요. 이것이 18, 19세기 영국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디즈니 영화 <메리 포핀스>에서 나오는 <침-침-체리>라는 노래는 굴뚝 청소를 하던 이들을 미화시킨 것인데 실상은 처참했습니다. 그 아이들의 생존율은 0퍼센트, 다섯 살이 되기 전에 폐병으로 다 죽었지요.
그들이 사악해서 그런것은 아닐 것이다. 무지와 몰이해, 무책임, 판단력의 부족 등이 어우러져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두둔하고 싶지는 않다. 그 어른아이들이 자신의 자식들이라면, 그런 일을 시키지 않았을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 마음, 아주 똑같을수는 없겠지만 어느정도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했더라면, 소중한 생명을 지켜낼 수 있지 않았을까.
과거의 시대상때문에 일어난 에피소드만으로 치부하기에는 최근에 우리 사회가 겪은 사건들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다. 남의 일이 아니다. 흐리멍텅 살다보면 '악의 평범성'은 어느새 나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생각하며, 더 많이 경험하는 과정속에서 '인간의 실종'이 나의 일이 되지 않도록 나아가야겠다고 다짐한다.
322 포스트먼은 <죽을 때까지 유희를 즐기기>라는 책에서 오웰과 헉슬리를 다음과 같이 비교합니다.
오웰이 두려워했던 것은 책을 금지시키려는 자들이었다. 헉슬리가 두려워했던 것은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어서 책을 금지시킬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오웰은 우리로부터 정보를 차단시키려는 자들을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정보를 너무 많이 줘서 우리를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전락시키려는 사람들을 두려워했다. 오웰은 진실이 우리로부터 가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진실이 사소한 정보의 바다에 익사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오웰은 우리가 속박받는 문화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우리가 하찮은 문화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마음같아서는 인용문을 포함한 전 챕터를 적어내리고 싶은 부분이다. 우선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로 다르면서 같은 두 디스토피아를 창조해낸 두 작가에 대한 감탄의 마음이 생겼다. 또한 우리의 시대의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속박을 싫어한다. 물론 사회생활을 이어가자면 지시를 이행해야 하는 경우들이 있고, 그런 경우까지 거부감을 갖는것은 아니지만,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야'만' 할때면 정말이지 짜증스럽기 그지없다. '자유'는 나의 가치체계에서 최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 나는, 눈에 보이는 속박에만 주의를 기울여왔던 것 같다. 당장에 나의 행위를 강제하지 않더라도, 간접적인 영향을 통해 나의 내적 사고나 외적 행동에 변화를 유도한다면, 그것 역시 자유를 침해하는 것 아닐까?
우리 시대가, 내가 안고있는 심각한 문제는 헉슬리의 통찰과 궤를 같이한다. 바로 '정보의 홍수'다. 빠른 속도로 어마어마한 양으로 쏟아지는 정보들은 진실을 가리고,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볼 기회를 빼앗는다. 무엇을 생각할까 고민하기 전에, 생각을 이끄는 자극들이 눈앞에 쏟아진다. 그 강력한 조류에 표류하며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멈춤이 필요한 때다. 정보에 의해 선택당하기에 앞서, '지금 이 순간'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지 스스로 선택하자. 정신적 세계를 어떤 생각으로 채울지, 물리적 세계를 어떤 경험으로 채울지 자유롭게 선택하자. 그럼으로써 보이는 자유와 보이지 않는 자유를 모두 누리는 자유인으로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