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3세에 아버지를 여읜뒤 1906년인 16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2년 동안 린츠에서 방황하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빈에 있는 미술 학교에 2차례 응시했느아 모두 낙방하고 말았다. 18세 때에 어머니 마저 여의 히트러는 빈에서 약6년 반을 지낸뒤 독일 뮌헨으로 가서 포스터를 그리거나 그림 엽서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독일군에 자원입대하여 용감한 군인드로 만은 공을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1918년 11월 독일은 제 1차세계 대전에서 패하고 말았다. 패전에 따를 경제위기와 베르사유조약에 대한 불만을 가진 히틀러는 1919년 9월 독일 노동당이라는 작은 정당에 가입하면서 정치가로서 야심을 품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웅변 능력으로 선전 활동을 전개하여 소속정당의 세력을 확장했으며 1920년 4월 군대에서 제대한 뒤에는 당의 실권을 잡고 당의 이름을 나치스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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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1월 11일 연합국과 침략국의 휴전 조약으로 종식된 제1차 세계대전은 5년 동안 유럽 대륙을 전쟁의 공포에 떨게 했다. 그뒤1929년에 미국에서 비롯된 대공황은 전세계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1933년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위해 뉴딜 정책을 실시하였다. 영국과 프랑스 들 기존의 식민지를 운영하던 제국주의 열강들은 자국 내부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식민지 원주민들에 대한 수탈을 강화 하였다.  

한편 1933년 1월,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출현하였다, 그는 독일인의 우수성과 힘의 논리를 내세우는 나치즘을 기반으로 집권에 성공하였다.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아돌프히틀러가 헝가리 제국의 브라우나 우암인에서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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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실패로 끝나고, 로마는 군사를 거느린 장군들이 정치의 실권을 잡게 되었다. 그 중에서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기원전60년에 정권을 잡기위하여 서로 손을 잡은것이 제1차 삼두 저치였다.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대규모 해적단을 단 40일만에 소탕하는 공로를 세움으로써 크라수스와 함께 로마 최고의 민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둘다 권력의 야망을 품고있었지만, 원로원의 견제로 뜻을 못 펴고 있었다. 이때 에스파냐에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손을 잡고 원로원으로부터 로마가 이 세사람의 손아귀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삼두정치였다. 하지만 이세사람의 약속은 카이사르가 연이어 공을 세운 탓에 다른 두사람이 시기하게 되었다. 이것이 삼두정치의 종말을 불러왔다.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를 대적하러 갔지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물리쳤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로마의 절대적인 사람이 되었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제압하고 하는 명언이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도라! 카이사르가 이 기쁨을 즐기고 있을때 브루투스는 카이사르를 죽일계획을 짰고 실행에 옴겨 카이사르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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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던 카르타고마저 멸망하자 로마를 견제할 세력은아무도 없었다. 영토는 크게 늘었고 정복한 땅에서 데려오는 노예가 늘어나자 로마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였다. 이때 농민들과 군인들은 월급도 못받아 불평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 사회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원로원에서도 심각하게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어 실업자들에게는 약간의 구호 식량이 지급되었고 날마다 경기가 벌어졌다. 원형 경기장에서는 검투사끼리의 싸움이나 맹수들의 싸움, 그리고 인간과 맹수들의 싸움이 벌어졌는데 시민들은 이런 경기에 돈을 걸고 도박을 했다. 점점 타락해가는 로마에서 개혁을 외치며 나선 사람은 호민관으로 선출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였다. 로마 재건을 위한 개혁을 시도했던 그라쿠스는 결국 대지주들의 음모로 암살되고 말았다. 이때가 기원전 133년이었다. 그의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도 형의 뜻을 이어받아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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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카르타고에서 한니발이 대군을 이 끌고 진격을 해왔다. 카르타고는 예전부터 해군에 강했지만 로말 인해 해군이 전멸하고 육지로밖에 올수없었다. 이전쟁을 2차 포에니 전쟁이라고 한다. 한니발은 누구도 예상치못하고 누구도 넘은적이없는 알프스 산맥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로마의 원로원들은 한니발이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한니발은 위험한 인물이어서 갈리아 지역으로 군대를 보냈다. 하지만 이것을 미리 파악한 한니발은 갈리아로 가지않고 피레네를 넘어 알프스도 넘으려했다. 눈을 맞으며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는것은 누구도 상상하지못할 일이었다. 한니발은 그런 엄청난 일을 시도했고, 기적은 이루어 졌다. 4만명의 병사중 1만4000명의 병사가 죽었지만,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부대는 로마에 도달했다. 알프스를 넘은 한니박의 대군은 로마군을 차례로 격파하며 진군을 계속했다. 뛰어난 그의 작전과 공격에 단해 77만이나 되던 로마군은 계속 패하기만 했다. 패전이 거듭되자 로마는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막시무스는 로마에서 군대를 가지고 있다가 한니발이 오면 방어만 하자는것이었다. 그래서 물자의 부족으로 돌아갈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원로원들은 로마 군대를 출동시킨다. 한니발에게 지던 로마가 스키피오 장군의 지헤로 이겼다. 그의 지혜는 군대가 없을 카르타고로 가는것이다. 이로써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대패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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